[전대길 CEO 컬럼] 우리 말 탐구(1)
[전대길 CEO 컬럼] 우리 말 탐구(1)
  • 김용관
  • 승인 2017.07.24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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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文人)이란 소리를 들으면서도 여러 가지 부끄러움이 앞선다.
우리말의 70%가 한문이다. 평소에 낯 설은 우리말을 한번 알아보았다.

‘미주알’은 인체의 배출구인 항문(肛門)에 닿아 있는 창자의 끝부분이다.
따라서 ‘미주알을 캔다’는 건 창자의 끝까지 들여다보는 거다. 사람 속을 처음부터 끝까지 속속들이 살펴보는 거다. 그래서 사소(些少)한 일까지 세밀하게 따지고 드는 게 ‘미주알고주알’이다.

‘고주알’은 별 뜻이 없으며 미주알과 운(韻)을 맞추기 위해 붙인 말이다. 이렇게 운을 붙여서 만든 말이 ‘눈치코치, 세월아 네월아, 어중이떠중이, 알뜰살뜰’ 등이다.

미주알고주알 대신 ‘밑두리콧두리’라는 말도 있다. ‘밑두리’는 어떤 사물 둘레의 밑 부분을 뜻하며 어떤 사실을 확실히 알기 위해서 세세히 묻는 것이며 ‘콧두리’는 고주알처럼 운(韻)을 맞추느라 붙인 것이다.

미주알고주알과 밑두리콧두리처럼 아주 사소한 것까지 따지는 모양을 나타내는 ‘시시콜콜, 꼬치꼬치’ 같은 말도 있다.

조선의 10대 왕, 연산군은 조선8도에 채홍사(採紅使)를 파견, 아름다운 처녀를 기생으로 뽑았다. 방방곡곡 고을마다 원님이 기생들을 관리하게 하고 기생들 이름을 '흥청(興淸)'이라고 이름지었다.

연산군이 흥청이 하고 놀던 중에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서 실각(失脚)했다. ‘흥청이랑 놀다 망했다’고 해서 ‘흥청망청(興淸亡淸)’이란 말이 생겨났다. 망청(亡淸)은 운(韻)을 맞추느라 덧붙인 말이다.

고자질은 남의 허물을 덮어주지 않고 타인에게 실토하는 것이며 믿음이 없고 비겁한 행동이다. 그런데 고자질이란 말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남자로서의 생식기가 불구(不具)가 되어 성생활이 불가능한 남성이 고자(鼓子)다. 궁궐 거주하는 내시(內侍)들은 모두 다 고자다. 궁궐의 후궁(後宮)들이 왕의 여자이기 때문에 부적절(不適切)한 일을 자전에 예방하기 위해서 내시를 들일 때엔 꼭 거세(去勢)를 했다.

거세 후에는 남성호르몬 보다 여성 호르몬이 더 많아져서 자연스럽게 여성화(女性化)된다. 내시들이 말(言)이 많아지고 말로서 스트레스를 풀다 보니 궁궐은 늘 시끄러웠다. 그래서 하도 시끄러워져서 ‘고자 놈들이 고자질하고 자빠지다’는 말이 ‘고자질’이 되었다.

조선 14대 선조가 임진왜란 피난길에 맛있게 먹었던 생선이 '은어(銀魚)‘다. 그 후 선조가 은어를 다시 먹어 보니 예전의 그 맛이 아니어서 도로'묵'이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생겨난 말이 ‘도루묵’이다.

'시치미 떼다'의 어원을 알아본다. 시침(始針)은 시치미라고도 한다.
시침은 본바느질을 하기 전에 본바느질이 제자리를 지키게 하기 위해 군데군데 임시로 뜨거나, 박음 선을 표시하기 위해 임시로 꿰매는 것인데 이 것을 가봉(假縫)이라고도 한다.

 
이런 행위가 '시침질'이고, 시침을 한 실(絲)이 '시침실'이다. 시침실은 본바느질인 박음질이 끝나면 흔적이 나지 않게 막 바로 뜯어버린다. 어떤 일을 저지르고도 ‘아무 일도 없다’는 뻔뻔한(?) 표정을 지을 때에 우리는 ‘시치미(를) 뗀다'고 하는 연유이다.

 
옛날 농촌에서는 누에를 치거나 삼 ·모시· 목화 등을 길러서 명주, 삼베, 모시베, 무명 등을 자기 집 안에서 자가(自家) 생산했다.

집안에서 물레를 직접 돌려 실을 잣거나 베틀에 올라 옷감을 짜는 게 길쌈이다. 길쌈이 끝나고 겨울이 되면 여인들은 식구들의 옷을 밤을 새며 손수 바느질해서 만들어서 입혔다.

이때 시장기라도 달랠 겸 낮에 숨겨둔 누룽지 조각을 혼자 먹고 있는데 이웃 사람이 마실 오면 아무 것도 먹지 않은 척 하느라고 옷감에 붙은 시침(시치미)을 떼면서 슬그머니 말꼬리를 돌렸다.

마실 온 이웃이 이걸 모를 리가 없으며 숨겨둔 누룽지 조각을 뺏어 먹으며 ‘깍쟁이, 내가 모를 줄 알고? 시치미를 떼지 마! 라고 했다’
 
또 다른 설이 있다. 국어사전에는 매(안)의 주인을 밝히기 위해서 주소를 적어 매의 꽁지 털 속에다 매어둔 네모진 뿔이 '시치미' 또는 '시침'이다.

학자들은 옛날엔 사냥이 나라에서 장려할 정도로 성행했을 때 매의 꽁지에 매어둔 시치미를 떼면 누구의 매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시치미 떼다'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이것이 정설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매사냥이 옛날에 아무리 성행했을지라도 매사냥은 매를 최소한 2년 이상 길들여 부릴 수 있는 ‘봉잡이’와 같이 한 조를 이루는 사람들이 즐기던 놀이였다.

매 꽁지에 이름표를 매는 것은 사냥할 때 ‘보라매’가 멀리 달아났을 경우를 대비한 것이다. 등잔 곁에서 쓰던 물건은 등잔 밑에서 찾아야 효과적이다. 옷을 만들 때 꼭 필요한 바느질인 시침질은 옛 여인들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등잔 밑에서 늘 하던 일이다.

실생활에서 두루 쓰이던 ‘시치미 떼다’의 어원이 매에서 유래했다는 일부 학자의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는 게 필자의 단견(短見)이다.

일거양득(一擧兩得)이란 뜻의 우리말은 ‘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꿩 먹고 알 먹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마당 쓸고 돈 줍고’등이 있다.

진서(晉書)의 〈속석전(束晳傳)〉에 나온다. 진사(晉史)를 편찬한 ‘속석(束晳’이 진(晉)나라 혜제(惠帝)에게 농업정책 발전에 관해 ‘위(魏)나라 때의 개척지, 양평(陽平)지방에서 살게 했던 백성들을 다시 서쪽으로 이주시키자’고 진언했다.

‘백성들을 서주(西州)로 이주시킴으로서 변방(邊方)을 지키게 하고 10년간 세금을 면해 주어 실질적으론 국익을 챙기며 백성에겐 관용을 베푸는 일이기 때문에 일거양득이다’란 주장이다.

진(秦)나라 혜문왕(惠文王) 시절, 패업(覇業)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던 왕에게 재상, 장의(張儀)가 중원(中原)진출을 주장했다.

중신 사마조(司馬錯)는 이에 반대하며 “무릇 나라가 부유하기를 바라는 군주는 국토를 넓힘을 우선으로 해야 하며, 병사들이 강력하기를 바라는 군주는 무엇보다 백성들이 잘 살 수 있게 해야 한다. 패자(覇者)가 되길 바라는 군주는 먼저 덕을 쌓아야 한다”고 진언했다.

이 세 가지가 이루어지면 패업은 자연스레 이루어진다. 그러나 지금 진나라의 국토는 협소하고 백성들은 빈곤하다. 진나라의 강력한 군대로 하여금 촉(蜀)나라 땅을 정벌하면 국토는 넓어지고 백성들의 재물은 쌓이게 되며 한 가지 일로 두 가지 이익을 얻는 것과 같다는 사마조의 제안을 받아들여 혜문왕은 촉나라를 정벌하여 국토를 넓혔다. (전국책(戰國策), 〈진책(秦策)〉에 나오는 이야기다.

사람이 옷을 입거나 벗을 때 편리한 기능적 목적과 장식적인 목적을 갖춘 물건이 단추(Buttons)이다.

매듭단추는 중국의 육조시대에 옷감을 이용한 단추, 청령두(蜻蛉頭...잠자리 머리 모양)가 등장하면서 옷에 사용되었다.

금속, 플라스틱 , 조개껍질, 유리, 뼈, 나무, 가죽을 재료로 쓴다. 단추류(Fastener) 기원은 BC 6000년, 고대 이집트 시대까지 올라간다. 당시의 단추 형태는 지금과 달리 두 개의 옷자락을 뼈 ·금속 핀 등으로 끼우는 형태에 불과했다.

두 개의 금속 고리를 연결하는 방식이 등장하기 시작한 때는 기원 전 100년이다. 그 후엔 구슬모양의 금속 단추를 루프 형태의 고리에 끼우는 단추가 등장했다. 그 모습이 마치 꽃봉오리와 같다고 해서 ‘bouton’이란 라틴어가 단추인 버튼(button)이 된 것이다.

13세기경 유럽에서는 금 ·은 ·보석으로 단추를 만들어 지위나 신분을 과시했다. 1770년 독일인 위스터가 발명한 금속 단추 제조기술은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기계화의 보급에 따라 천연재료 등으로 대체되는 발전을 이룬다. 또한 여성의 테일러 슈트가 등장하면서 여성복장에도 쓰인다.

중국은 육조시대(六朝時代)에 옷감을 이용한 매듭단추인 청령두(蜻蛉頭...잠자리 머리 모양)가 등장하여 일반적 의복형태를 이룬다.

우리나라는 조선시대 마고자나 무관(武官)이 입던 공복(公服)인 철릭(帖裏) 등에 단추를 사용했는데 갑오개혁 이후 일반에 널리 보급되었다.

형태는 매우 다양하나 일반적으로 표면에 구멍(1~3cm)이 있는 것과 구멍이 없는 것으로 구분한다.

남자양복 단추와 같이 딱딱한 느낌을 주는 테일러 단추, 아름다운 모양의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팬시 플라스틱 단추, 약간 차가운 느낌이지만 활동적이고 경쾌한 느낌을 주는 금속 단추, 흔히 와이셔츠에 다는 셔츠 단추 종류가 있다.

남성은 오른쪽, 여성은 왼쪽에 단추를 다는데 그 유래다. 인간의 좌뇌는 감성, 우뇌는 이성으로 분리된다. 성(性)에 따라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오른손잡이가 옷 속에 숨겨둔 무기를 쉽게 꺼내기 위해서라는 다른 주장도 있다.

‘눈 감으면 코 베어 먹을 세상’이란 세상의 인심이 험악하고 신뢰가 없음을 나타내는 속담이다.
소설가 박경리의 토지에 나온 글이다.

‘엄마는···맏며느리에다 손 귀한 집 장손의 엄마이기도 했다. 그리고 맨손으로 서울이라는 눈 감으면 코 베어 간다는 대처에다 최초로 말뚝을 박은 담대한 여자였다’, ‘교하 댁은···아무나 서울이라는 눈감으면 코 베어갈 데서 취직이나 장사를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듣도록 타이르길 잘했다.

야단법석(野壇法席)이란 떠들썩하고 시끄럽다는 불교 용어다.
‘야단(野壇)’이란 ‘야외에 세운 단’, ‘법석(法席)’은 ‘불법을 펴는 자리’를 뜻한다. 바로 ‘야외에 자리를 마련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자리’란 뜻이다.

법당이 좁아 많은 사람들을 다 수용할 수가 없어서 야외에 단을 펴고 설법을 듣고자 한 것이다. 부처님이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했을 때엔 약 3,000,000명이 모였단다. 수 많은 사람이 모이다 보니 질서가 없고 시끌벅적하다. 시끌벅적한 혼둔(Chaos)의 상태를 가리킨 말이다.

이총(耳塚)은 일본 교토시 히가시야마구에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왜X들이 조선의 군사와 조선인들의 코와 귀를 마구잡이로 베어가서 묻어놓은 무덤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한 왜군이 전공(戰功)의 표식으로 무겁고 부피가 큰 사람의 머리를 베는 대신에 조선 군민(軍民)의 코와 귀를 베어 소금에 절여 일본으로 가지고 돌아가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명령에 따라 교토(京都)에 매장했다.

당시 왜X들의 전리품으로 사망한 조선인이 126,000명이다. 조선인의 원혼(冤魂)을 억누르려고 무덤 위에 오륜석탑(五輪石塔)을 세운 나쁜 왜X들! 이곳이 귀 무덤이라지만 실제도 코 무덤, 비총(鼻塚)이라고 한다.

애시당초 왜X들은 코 무덤이라 불렀으나, 에도시대 유학자, 하야시 라잔(林羅山)이란 자가 그 명칭이 야만적이라 해서 귀 무덤이라 부르자고 한 뒤 귀 무덤으로 부르게 되었다. 왜X들은 이곳을 이총공원(耳塚公園)이라 하고 2003년 3월에 이총과 비총을 병기한 안내판을 세웠다.

이총은 교토의 히가시야마구(東山区)에 있는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위한 토요쿠니신사(豊国神社)에서 가까운 거리(100m)에 있다. 그러나 교토를 찾는 한국인들은 이러한 역사적 슬픈 진실을 모르고 왜X들끼리 싸우는 전쟁 이야기만 귀 따갑게 듣다가 하품만 하고 귀국한다.

이 얼마나 부끄럽고 수치스런 한국인들인가? 지금 당장이라도 126,000명 이상의 침략자, 왜X들의 코와 귀를 잘라다가 서울 광화문 광장 한 복판에 왜X들의 이총(耳塚)과 비총(鼻塚)을 세우고픈 바램이 간절하다.

아비규환의 전장(戰場)에서 무지막지로 코와 귀가 잘려 돌아가신 우리 조상들의 넋을 달래고 그 슬픔을 과연 언제, 어떻게 씻겨낼 것인가? 역사는 반복한다.

국가의 힘이 부강하지 못하면 왜X들에게 또 다시 그렇게 당할 수 있다. 우리 모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세계최강의 국력을 키우는데 앞장서자.

이런 역사적 진실을 까맣게 모르고 얼마 전에 일본 쿄토를 여행하고 온 필자 자신이 마냥 부끄럽다. 엄중하게 나 자신을 힐책(詰責)한다. 무릎 굻고 두 손 모으고 머리 숙여 조상님들께 사죄(謝罪)드린다.

전 대 길
(주)동양EMS 사장,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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