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길의 CEO 칼럼] 뭐 하러 왔노?
[전대길의 CEO 칼럼] 뭐 하러 왔노?
  • 김용관 기자
  • 승인 2017.11.08 16: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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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오롱그룹 이동찬 전 명예회장 3주기를 기리며
전     대     길(주)동양EMS 대표이사한국경총 고급인력정보센터 前소장(前연수담당 이사)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이사
전     대     길(주)동양EMS 대표이사
한국경총 고급인력정보센터 前소장(前연수담당 이사)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이사

2017년 11월8일, 우정(牛汀) 이동찬(李東燦) 코오롱그룹 前명예회장/한국경총 前회장께서 93세로 서거(逝去)한지 3주기(週忌)를 맞는 날이다. 

우정 회장의 고향, 경북 영일만 비학산(飛鶴山) 단풍이 곱게 물든 가을 날, 백수(白壽)를 바라보며 모든 걸 다 내려놓고 극락왕생(極樂往生)하셨다. 두 손을 합장하고 우정 회장과의 일화(逸話)를 떠 올린다.  

종로 체부동의 수제비 단골집에서 ‘점심 한 끼 함께 하자’라는 연락을 받고 우정 회장님을 모시고 보리밥과 수제비로 오찬을 하면서 ‘회장님께서 오랫동안 맛있는 밥을 사 주셨는데 오늘은 제게 회장님께 점심식사를 대접할 기회를 주십시요’라고 말씀드리니 ’왜 자네가 점심을 사려고 하는가? 오늘이 무슨 날인가?‘ 되물으시기에 ’예! 10월25일, 오늘은 제 월급날입니다‘라고 말씀드리고 점심식사를 대접한 게 운명하시기 14일 전이다. 

30년 동안 필자와의 정(情)을 때려고 마지막으로 모실 기회를 주신 것 같다. 수제비집 주인이  방명록에 우정 회장의 글을 받으려 하자 ‘자네가 나 대신하라’는 눈빛 명(命)을 내리셨다. “우정 회장님을 모시고 맛있는 외미(畏味)를 함께 하다!”라고 필자가 붓으로 썼더니 빙긋이 웃으셨다. 

1985년~1998년(13년간) 경총(한국경영자총협회)에서 우정 회장을 가까이서 모시고 일한 필자는 ‘저는 이 세상에서 존경하는 분이 세 분 계십니다.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어머니와 도산 안창호 선생 그리고 경제영웅, 우정 이동찬 회장님을 존경합니다’라고 했더니 ‘내가 왜 유(You=자네)의 존경을 받아야 하는가?’라고 묻기에 ‘그 건 제 마음에서 우러난 존경심 때문입니다’라고 말씀드린 바 있다. 

어느 날, 우정 회장께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는가?’를 여쭈어 보았다. 그냥 가르쳐 줄 순 없지만 ‘주머니에 한번 들어 온 돈은 단 돈 
1원도 명분(名分)없인 쓰지 않는 것’이라고 알려주셨다. 

1992년 여름, 스페인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황영조 마라톤 선수(Kolon소속)가 죽음의 몬주익(Montjuic) 언덕(해발 213M)을 숨 가쁘게 넘어서  손기정 선수 이후 56년 만에 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막판에 스퍼트하는 그를 지켜보면서 ‘아! 어릴 적 일본 오사까의 극장 화면 속에서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뛴 손기정 선수의 못 이룬 꿈(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을 땀)을 이루는구나!’라며 뜨거운 눈물을 펑펑 흘리셨단다. 나라 없는 고통과 슬픔을 날려버리고 마라톤 한국의 DNA를 되찾았다.  

응원 차 바르셀로나로 날아 온 우정 회장은 대회 전 날 밤에 황영조 선수가 금메달을 목에 건 꿈을 꾸었다. 황영조 선수가 대회 전 날 밤에 숙면을 취하도록 일본인 친구가 구해 준 귀한 약은 꺼내지도 않아도 황영조 선수는 밤잠을 잘 잤다.

행사 당일 아침 일찍이 올림픽 주경기장을 둘러보던 우정 회장은 경기장 안의 기념품 매장에서 파는 금/은/동 메달 중에서 단 한 개만 남은 금메달이 눈에 띄어 얼른 그 금메달을 사서 우정 회장의 Y셔츠 속의 목에 걸고 ‘이젠 되었다!’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는 ‘마라톤 사랑 이야기’를 필자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우정 회장의 얼굴엔 소년처럼 홍조 띤 함박웃음이 넘쳐났으며 무척 신나 하셨다. 

1992년 가을에 ‘코오롱그룹 보람의 일터 대행진’이 2,000여 코오롱 임직원들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1991년 강원도 고성에서 열린 세계잼버리(Jamboree)대회를 김주성 코오롱그룹 비서실장 등이 벤치마킹, 기획했다. 그 후에 ‘행사에 참가한 소감을 우정 회장께서 경총 간부들에게 물었다. 이구동성으로 행사에 관한 이야기는 제쳐 두고 ‘비가 많이 와서~?’라고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필자의 차례에 ‘비가 억수로 퍼 붓던 첫 날 밤은 코오롱의 과거(Past)이고 다음 날 아침에 햇빛이 쨍쨍 비추일 땐 코오롱그룹의 미래(Future)'라고 생각합니다. 행사가 끝난 직후 화장실에서 코오롱그룹 직원들 간의 대화를 우연히 엿들은 내용을 가감없이 말씀드렸다. 한 참을 눈을 감고 계시던 우정 회장께서 ‘다시 말해 보라‘고 해서 같은 이야기를 또 했다. 

1996년 5월6일(월) 아침 10시, ‘경총고급인력정보센터 운영계획(안)’ 결재를 맡으려고 이동찬 코오롱 명예회장실 문을 노크하고 들어 선 필자에게 “뭐 하러 왔노? 바쁜데 전화나 팩스로 하지!”라는 우정 회장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예, 긴급하고 중요한 TV광고에 관한 내용이라 직접 결재를 맡으려고 왔습니다”라고 말씀드리니 “그럼 설명해 보라!‘고 하셨다. 

“회장님! 지난 토요일 오후에 안해와 함께 공주 갑사(甲寺)의 부처님께 108배를 올리고 계룡산을 넘어서 하룻밤을 보내고 어제 새벽 4시에 동학사(東鶴寺) 부처님께 108배 기도를 하고 지금 왔습니다”라고 말씀드리니 “그래서? 본론을 말하라. 왜 갑자기 절(卍) 이야기를 꺼내느냐?”고 짜증을 내셨다.

코오롱그룹 이동찬 전 명예회장과 함께
코오롱그룹 이동찬 전 명예회장과 함께

회장님께서는 고급인력을 위한 재취업센터를 운영하라고 제게 특별지시를 하시면서 “어려울 때 한번은 도와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지난 경총 간부회의에서 TV광고 모델(무료)을 회장님께 서달라고 제가 부탁드렸더니 ”이 나이에 무슨 TV광고 모델이냐”면서 ”내가 미쳤냐?“라고 단호하게 거절하셨습니다. 그래서 불자인 회장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유일한 방법은 부처님의 월력뿐이라는 생각으로 공주 갑사와 동학사 부처님께 안해와 함께 간절하게 기도드리고 왔습니다. 일배(一배) 일배 할 때마다 부처님 얼굴을 보면서 ‘부처님, 월력을 발휘해서 우정 회장이 TV광고모델을 꼭 서게 해 주세요’라고 절을 했습니다.  

“남아일언 중천금(男兒一言 重千金)이라는데 약속을 지켜주십시요”라고 말씀드리니 우정 회장께서 참으로 난감(難堪)한 표정을 지으셨다.  

이 때다 싶어서 “부처님! 우정 회장께서 마음이 움직일 듯 말 듯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부처님의 월력(越力)을 펼쳐 주소서!”라고 두 손을 합장하니 우정 회장의 두 눈가에 이슬이 맺히며 “알았다! 그래, 내가 약속을 지키마! 어찌해야 하노?”라고 말씀하시기에 부처님께 감사하며 필자도 감사의 눈물을 흘렀다. 

동그라미 여러 개로 이루어진 재가(裁可)Sign을 하고 수첩을 펼치시며   “내일 밖에 시간이 없다, 언제, 어디서 찍나?”라고 묻기에 “내일 오전에 이 곳 회장실에서 찍겠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 모두 보는 TV광고입니다. 라디오, TV광고비 일체는 노동부 예산(2,000만원)이 지원됩니다”
 
다음 날인 5월7일, 오전 10시~오후 4시까지(6시간) 코오롱그룹 회장실에서 쫘르르~ 돌아가는 매경TV 카메라 앞에 선 74세의 우정 회장께서는 회장실 안을 거닐며 필자가 준비한 대사(臺詞)를 수도 없이 반복하며 촬영했다. “고급인력 여러분! 새로운 일자리를 원하십니까? 경총 고급인력센타로 오십시오. 여러분의 일자리를 구해드리겠습니다”라고. 
그 당시에 필자는 출입문 뒤에 숨어서 광고 촬영 현장을 지켜보며 우정 회장님께 무한한 감사함과 죄송함을 느꼈다.

1998년 2월, 경총을 사직하고 매경 인력개발원과 (주)동양EMS의 대표이사로 일해 오면서 우정 회장님 생신(4월1일) 때 “우정 회장님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KOLON그룹 大吉”이란 리본을 단 예쁜 축분을 회장실로 보내고 인사드리면 “왜 코오롱 대길인가?”라고 해마다 물으시곤 하셨다. 

“예, 코오롱그룹이 계속 성장 발전하려면 대길(大吉)이란 제 이름이 붙어야 합니다”라고 말씀드리면 빙그레 웃으시곤 하셨다. 그리고 1998년부터 2014년 11월 우정 회장님이 서거하실 때 까지 일본판 ‘문예춘추(文藝春秋)’ 월간 잡지를 빠짐없이 회장실로 보내드렸다. 

2014년 4월1일, 생신 축하인사를 드리려고 우정 회장님을 찾아뵈었다.

“내가 대한민국의 큰 죄인이다. 1982년부터 14년간 경총회장으로 일했다. 그 전의 부회장 8년까지 합하면 총 22년간 경총 수장으로 노사관계 일을 했는데 그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루어 논 게 없다. 봄철이 오면 노조의 임금인상 춘투(春鬪)가 해마다 열리는데 ”노사가 머리 맞대고 마음을 열고 물가인상과 생산성을 자동적으로 반영한 ‘임금조정 공식(방정식)’이라도 사회적 합의로 마련했어야 하는데 안타깝다!‘며 후회하셨다. 

이에 “이 모든 것은 회장님을 경총 간부들이 잘못 보필한 때문입니다. 멍석에 두 무릎을 꿇고 국민께 석고대죄(席藁待罪)할 중죄인(重罪人)은 바로 저를 포함한 경총 간부들입니다”라고 우정 회장께 머리를 숙였다. 

우정 회장께선 정직하고 겸손하며 올바른 일에 열정(熱情)을 다 바친 경제영웅이시다. S그룹, D그룹처럼 힘들어 하는 기업들을 인수합병(M&A)해서 몸집을 키우는 경영방식은 바르지 않다. 처음부터 땅에다 말뚝을 박고 공장을 세운 제조업이 바람직하다‘는 경영철학을 고수하셨다. ‘이상은 높게, 눈은 아래로’하고 ‘벌기보다 쓰기가, 죽기보다 살기가’ 더 어렵고 힘들다고 늘 가르쳐 주셨다. ‘산을 오를 때보다 내려올 때가 더 위험하니 조심하라‘고 알려주셨다. 
 
1980년대 말, 나중에 대통령이 된 두 분의 야당 대표도 참석한 한국노총 대의원대회장(6층)에 우정 회장을 수행하고 참석했다. 단상 정면에 VIP(정계, 경영계, 노동계 지도자들)석에 착석한 우정 회장이 축사를 하려고  단상에 오르려는 순간, 대회장내 이곳저곳에서 ‘물러가라! 이동찬!’하는 구호가 터져 나왔다. 

그 때, 대회장이 떠나갈 듯한 우렁찬 큰 목소리로 ‘축싸~!!!’라고 우정 회장이 대갈일성(大喝一聲)하셨다. 그러자 분위기가 금방 잠잠해지고 끝까지 축사를 마친 우정회장께 참석자들의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우정 회장께서는 6.25전쟁 중에는 경찰에 자원입대하여 ‘대구경찰서 경북지역 특경대장(전투경찰대장)’으로 공비토벌작전 선봉장으로 참전했던 참전용사의 극기정신과 위풍당당함을 보여주셨다. 

이 때 필자는 사회자(조용언 노총 사무차장)뒤에서 우정 회장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썼으며 우정 회장의 눈을 응시하며 눈 당번에 충실했다. ‘불미스런 사고가 있으면 안 된다. 나는 우정 회장의 수행비서이며 유일한 보디가드이다’라고 다짐했다.
 
행사가 끝나자 맨 먼저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우정 회장을 축화환 삼각대 밑으로 필자가 번개처럼 기어 나와서 자료집을 받아들고 우정 회장을 모시고 나오면서 노조 대의원들의 시선을 받았다. 이게 바로 수행비서의 기본 책무다. 

행사 후 VIP들과 함께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그 시각이 오전 11시50분이었다. “이 근처에 적당한 오찬장소가 있는가?”라고 우정회장이 필자에게 물었다. “예! 63빌딩 56층 와꼬(和光)가 있습니다”라고 말하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좋다는 반응이었다. 

6층서부터 계단으로 뛰어내려 온 수행비서들에게 ‘63빌딩 56층, 와꼬!‘라고 소리친 후 승용차 앞좌석에 타자마자 평소에 기억하던 전화번호(789-5751)로 전화를 거니 전망이 가장 좋은 강(江)실이 비어 있단다. 이런 게 천우신조(天佑神助)일까? 강실 예약을 하고 나니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우정 회장을 룸미러로 슬쩍 살펴보니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계셨다.  

중간에 식사비를 계산하라고 우정 회장의 골드카드가 쟁반에 받쳐 나왔는데 경총의 대외활동비는 법인카드로 정산하고 반납했다. VIP 오찬간담회가 끝난 후 엘리베이터 안에서 우정 회장은 ‘해마다 발표하는 임금인상 가이드라인 때문에 경총 직원들 임금수준이 전경련, 상의보다  임금수준이 낮아요. 맞는가?’라고 필자에게 물어서 ‘예, 사실입니다’라고 대답하니 옆에 있던 VIP들이 월급을 올려주고 일을 시키라고 이구동성이었다. 

이런 일이 계기가 되어서 경총 임직원의 임금수준은 우정 회장의 특별지시로 전경련 등 타 경제단체 임금수준으로 파격적으로 인상된 바 있다. 경총 회원사업부장인 필자는 회원사 배가(倍加)운동을 펼치며 그 재원마련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거액의 금일봉을 경총 직원협의회 복지기금으로 우정 회장께서 쾌척해 주셨는데 그 고마운 마음을 잊을 수가 없다. 

신라호텔에서 열린 ‘1996년 전국 최고경영자 연찬회’를 기획하고 이를 총괄 진행한 필자는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의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특별강연의 사회를 보았는데 2002년 월드컵 조직위원장으로서 조직위 회의 를 연기하며 끝까지 경청하는 우정 회장의 따뜻한 배려에 감동했다. 조중훈 회장께는 ‘사업은 예술이다’라는 은쟁반에 칠보를 입힌 감사패를  전했다. 그 이전엔 회장님들 간에 어떤 교류도 없었다고 한다. 

우정 회장님을 모셨던 코오롱그룹 김주성 前비서실장과 안병덕 사장, 석도정 前사장, 홍성안 전무, 강대주 부장, 류현준 부장의 노고도 컸다. 
   
특별히 개인생활과 가정생활을 포기하고 지난 36년간(1978년~2014년) 우정 회장님을 위해서 24시간 숙식을 함께 하며 보필한 분신(分身)인 서기복 이사가 가장 무서운 사람이라고 하셨다. 

우정 회장님이 돌아가신 후 서기복 이사 부부는 코끼리 바위로 유명한 울릉도 천부에 안식처를 마련하고 낚시를 즐기며 여생을 보내고 있다. 송곳 산 아래 절에서 우정 회장을 위해 날마다 새벽예불을 올리는데 지극정성이다. 

끝으로 영면(永眠)하신 우정 회장님의 명복(冥福)을 빈다. 

 

전     대     길
(주)동양EMS 대표이사
한국경총 고급인력정보센터 前소장(前연수담당 이사)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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