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길의 CEO칼럼] 서상록 롯데호텔 쉔부른 웨이터
[전대길의 CEO칼럼] 서상록 롯데호텔 쉔부른 웨이터
  • 편집국
  • 승인 2018.09.19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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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총 고급인력정보센터 초대소장으로 인연과 감회
전    대    길
(주)동양EMS 대표이사,  
국제PEN클럽 이사, 수필가

1996년 7월29일(월) 오후 3시 정각, 
서울 마포구 용강동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회관 2층에 우리나라 최초로 군대 장군과 대령 전역자, 주요 그룹사와 기업의 부장급 이상, 국장급 이상의 공무원 퇴직자의 재취업을 위한 '경총 고급인력정보센터'의 문을 여는 개소식이 열렸다. 

<경총의 고급인력 정보센터 개소식 당시 모습>

진념 당시 노동부장관, 박종근 한국노총 위원장, 강신호 동아제약 회장, 조남홍 경총 상임부회장과 각 분과별 상임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센터의 초대 소장인 필자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이는 진념 노동장관이 아이디어를 내고 이동찬 경총회장께서 필자에게 업무추진을 특별하게 지시하여 1996년 4월부터 3개월간의 준비과정을 거쳤다.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등 그 어느 나라에서도 고급인력을 위한  재취업센타 운영 사례는 눈 비비고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경총 고급인력정보센터 설립과 운영에 관해서 이동찬 회장께 필자의 요구사항 3가지 조건(Option)을 당돌하게 말씀드렸다. 

첫째, 필자의 아이디어와 추진력으로 꼭 성공시키겠으니 위에서 간섭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고 
둘째, 필자가 어려울 때 이 회장께서 한번만 도와 달라는 것이며 
셋째, 필자가 초대 소장으로서 일하고 싶을 때까지 일하는 것이다. 

필자가 지금 생각해 보아도 어른께 무례한 제안이었지만 큰 그릇, 우정 이동찬 회장께서는 필자를 믿고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우정 회장께서는 경총고급인력정보센터 TV광고에 무료로 출연해 달라는 필자의 도움 요청을 웃으시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불광불급(不狂不及)'이란 4자성어가 “바로 이런 거구나”라는 실감(實感)이 났다. 새벽에 일찍 출근해서 밤늦게 까지 줄 서서 센터 소장의 면담을 기다리는 수많은 고급인력 들을 한 분도 빼놓지 않고 소장인 필자가 반갑게 맞아주고 정성껏 귀를 기울여 들어 주었다.  
 
남들이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일이라서 잠자다 일어나 분당 탄천 하늘에 뜬 반달을 쳐다보며 생각의 근육을 움직여 한 가지 생각에 몰입했었다. 

이 때 기업의 회생절차를 법원으로부터 책임자로 선정되는 ‘법정관리인 교육’을 생각해 냈다. 경총 법정관리인 교육을 기획하고 실행하는데 이영하 사법연수원 부장판사, 조용무 인천지방법원 부장판사와 권광중 서울지방법원 민사50부 부장판사께서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지금도 고마운 분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한다.  
 
고급인력 정보센터 문을 열고나서 필자가 경총을 사임한 1998년 3월까지 약 5,000여명의 고급인력들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고급인력 여러분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정말로 죽을 둥 살 둥 필자는 미쳐서 일을 했다. 수많은 고급인력들이 일할 의사는 있는데도 일자리를 찾아봐 줄 공식 기구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런 분들 중에서 롯데호텔 레스토랑, 쉔부른(Schoenbrunner)에서 웨이터로 일했던 서상록(1937년~2014년) 삼미그룹 前부회장을  잊을 수가 없다. 

고급인력정보센터(약칭 고인정) 문을 연지 얼마 지나지 않은 점심시간에 경총회관 승강기 안에서 백발의 노신사 한 분이 “우리같은 사람들 재취업시켜 주는 센터의 소장실이 어디냐?”고 물어서 필자가 바로 전 대길 소장이라며 상담실로 안내했다. 

그 노신사는 자리에 앉자마자 “나는 레스토랑의 웨이터로 일하고 싶어서 웨이터 복장까지 맞추어 놓았다, 꼭 좀 큰 식당의 보이(Boy)로 일할 수 있도록 힘써주세요”라며 구직신청서를 작성, 접수했다. 

 < 故.서상록 롯데호텔 쉔부른 웨이터>

처음엔 잘 믿기지가 않아서 “정말입니까? 삼미그룹 부회장으로 일했는데 레스토랑의 웨이터로 일하겠습니까?”라고 필자가 되물었다. 노신사는 “그렇다!”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에 필자는 “옳거니, 뭇 사람들에게 눈높이를 낮추는 좋은 본보기가 될 것 같다”는 생각으로 확실하게 다짐을 받아 두려고 열 번 정도 묻고 또 물었다. 

서상록 웨이터는 “내 인생 내가 살지”란 자전적 에세이 책(P19~25)에 나오는 필자와 그와의 사이에서 오갔던 이야기를 적고 있다. 

“서 부회장님, 여기는 장난하는 곳이 아닙니다. 다시 한 번 묻습니다. 구하시는 직업이 식당 종업원이 틀림없습니까?”

“전 소장님 눈에는 내가 머리가 좀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는 모양인데 내가 보기에는 당신이 인력센터 소장 자격이 없는 사람 같소.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었어도 떠났으면 다른 직업을 찾는 게 당연하지 않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하겠다는데 무슨 확인이 그리 필요해요? 직업에 귀천을 따지거나 편견이 있다면 인력센터 소장 자격이 없는 것 아니오? 이제 그만 확인하고 내 일자리나 찾아 봐 주세요”

그를 승강기 앞까지 배웅하고 자리에 앉자마자 조선일보 R기자가 찾아왔다. “방금 다녀간 멋쟁이 신사 분은 어떻게 오셨느냐?”고 물어서 자초지종 이야기를 했더니 “자기가 그 노신사를 취재해서 인터뷰 기사를 신문에 싣겠다”며 R기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 다음 다음 날, 조선일보 지면에 “서상록 부회장의 웨이터 되기”란 인터뷰 기사가 대 문짝 만하게 나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R기자가 서상록 부회장 집 앞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인터뷰에 성공했다. 

이젠 빼도 박도 못하고 서 부회장은 웨이터로 변신하는 일만 남았다. 그리고 나서 평소에 큰형님으로 뫼시던 롯데그룹 종합조정실 김종호 인사노무담당 전무(한국전력 前노조위원장)께 전화로 말씀드리니 “아~! 그 친구가 사고쳤구나. 나랑 고려대학교 정외과 동기동창 친구이니 내게 맡겨 달라”고 했다.  

어디 그 뿐이랴, 그리고 며칠 후에 분당의 일식집에서 서 부회장의 친구인 박종헌 삼양그룹 부회장과 서상록 부회장 그리고 필자와의 눈높이 낮추기에 관한 대화가 ‘MBC-TV 화제집중’에 방영되었다. 

그밖에도 필자는 MBC-TV 손석희 앵커와 SBS-TV뉴스, KBS뉴스라인, KBS-R 박찬숙 앵커와 고급인력 재취업에 관한 대담프로에 출연했으며 한국경제, 매일경제 등에 관련기사가 계속해서 게재되었다. 이 당시 우리나라 모든 신문, 방송, 잡지 등에 기사가 떴다.  

그 후 서상록 부회장은 김종호 롯데그룹 전무의 추천으로 롯데호텔 레스토랑, 쉔부른의 웨이터로 변신했다. 그에게 화제가 집중되었다. 

그는 쉔부른 레스토랑에 오시면 최상의 서비스로 모시겠다는 손 편지를 수많은 친지들에게 친필로 써서 보냈으며 특강한 날 오후에는 남대문시장에서 맛있는 튀김을 사서 들고 귀사해서 동료 웨이터들을 즐겁게 했다.  

그리고 서상록 웨이터를 ‘주부생활’ 잡지사의 특별강연 연사로 필자가 추천한 후 부터는 국내 최고의 명강사로 인기를 끌었으며 전국의 기업이나 공공기관 신문, 잡지, 방송사의 ★강사로 우뚝 섰다. 

한 때, 그가 정당을 만들고 그 대표로서 대통령 출마를 진지하게 고려한 적이 있는데 필자가 적극적으로 만류한 바 있다. 

2014년 여름에 서상록 웨이터는 췌장암으로 소천했다. 고인의 고려대학교 후배인 이동호 롯데 부산호텔 사장과 함께 고인의 영정 앞에서 하얀 국화를 바치고 머리숙여 고인의 명복(冥福)을 빌었다.  

서상록 웨이터는 젊어서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으며 길거리 노점상으로 출발해서 부동산 중개인으로서 큰 부자가 되었다. 귀국해서는 기업인을 거쳐 정치인이 되려 했으나 실제로는 어릴 적 꿈꾸어 왔던 큰 식당의 웨이터의 삶을 즐겼다. 

서상록 부회장의 웨이터로의 변신은 눈높이를 낮추는 본보기가 되었으며 직업에는 귀천이 없음을 실증적으로 보여 주었다. 

어느 초등학교 교장 선생은 정년퇴임 후에 그 학교의 정문에서 학생들을 보살피는 수위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고급인력들이 3D업종에 재취업한 사례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지금까지 친지와 이웃의 이목(耳目)을 심각하게 의식하던 사회분위기도 점차 변화해 갔다. (주)낫소, (주)한양, (주)한주 등등 수많은 기업의 법정관리인들이 어려움에 처한 기업들을 회생(回生)시켰다. 

물론 필자가 기획한 법정관리인 교육과정(3개월)을 마치고 7과목의 필기고사에 합격한 고급인력들만이 서울지법 파산부에 추천되었다.
 
끝으로 경총고급인력정보센터를 통해서 재취업에 성공한 5,000여명의 고급인력들 중에서 서상록 웨이터는 한줌의 소금이며 한 줄기 불꽃이었다. 서상록 쉔부른 레스토랑의 웨이터는 큰 바위 얼굴이다. 

그는 우리사회에 큰 감동을 불러일으킨 풍운아(風雲兒)였다. 
      
전    대    길
(주)동양EMS 대표이사,  
국제PEN클럽 이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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