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길의 CEO칼럼]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전대길의 CEO칼럼]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 편집국
  • 승인 2018.09.26 08: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 귀화한 김충선 장군 일대기
 전    대    길
 (주)동양EMS 대표이사,  
국제PEN클럽 이사, 수필가

“남이 잘한 것이 있으면 칭찬해 주고 남이 잘못하거든 덮어주어라. 
남이 나를 해치려 해도 맞서지 말고 남이 나를 비방해도 묵묵히 참아라. 그러면 해치던 자는 스스로 부끄러워할 것이며 비방하던 자는 스스로 그만둘 것이다“

“남풍이 건 듯 불어 문을 열고 방에 드니 행여 고향소식 가져왔다.
급히 일어나니 그 어인 광풍인가. 지나가는 바람인가. 홀연히 소리만 날 뿐 볼 수가 없네. 허탈히 탄식하고 덩그러니 앉았자니 이내 생전에 골육지친(骨肉之親)을 알 길 없어 글로 서러워하노라“ 

 조선에 귀화한 김 충선 장군 

임진왜란 때 조선에 귀화한 김충선(1571~1642) 장군의 말과 시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 때 ‘22세의 왜장(倭將) 사야가(沙也可)’는 가등청정(加藤淸正)의 우선봉장(右先鋒將)으로 왜군 3,000명을 거느리고 부산을 침략했다. 

“남의 나라에 들어와 토지를 빼앗고 재물을 탐내 사람을 죽이고 노략질하는 것은 병가에서 금하는 일이다. 너희들은 마음을 단속해 내 명령을 기다리라.”며 사야가(沙也可)는 명령을 내린다. 조선으로 출병한 임진왜란의 시작이다. 

‘모하당 문집’에는 임진왜란 배경과 사야가의 당시 심경이 적혀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군사를 일으키고 우리나라에 사신을 보내 “중국에 조공을 바치러 갈테니 조선이 길을 빌려 달라”고 했다. 조선을 먼저 함락시킨 후 중국을 치려는 속셈이었다. 

사야가는 명령을 따르고 싶지 않았지만 중하(中夏, 중국)에 가서 보려고 명령을 따르는 척하고 출병했다. 조선에 와서 보니 풍토와 문물이 과연 듣던 그대로였다. 

왜구가 조총으로 조선 땅을 유린할 때 왜장(倭將) 사야가(沙也可)는 아내와 아이를 둔 한 농부가 노모를 업고 가파른 산길을 따라 피난 가는 모습을 본다. “착한 조선 백성을 해칠 수는 없다“며 자신을 따르는 왜군과 함께 사야가는 경상좌병사 박진에게 귀순한다. 

EBS에 소개된 김충선

일본 아소 가문의 가신인 오카모토 에치고로 아소 가문이 가토 기요마사에게 멸문되어 그의 부하로 편입된 것을 수치로 여겨 임진왜란 때 일본을 등졌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귀순 후에 사야가는 조선군에게 조총과 화약을 만드는 방법을 가르쳤으며 수많은 싸움터에 출전해서 승리하여 큰 공을 세웠다. 

임진왜란 때 경주, 울산 등에서 전공을 세웠으며 정유재란에 손시로 등 항복한 왜장과 의령전투에 참가했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 큰 무공을 세우고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스스로 광주의 쌍령에 나아가 전투에 참전했다.

선조는 사야가에게 사성 김해김씨라는 성과 김충선이란 이름을 하사하고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란 벼슬을 내렸다. 김충선은 오로지 조선의 국난 극복에만 신경을 쓴 위인으로 더없는 충신으로 평가받는다.이렇게 해서 사야가란 왜장은 김충선이란 조선인으로 환생(還生)한다. 

왜장이었던 김충선을 조선인들의 시선은 곱지만 않았다. 오랑캐 땅에서 건너 온 이방인, 조선을 침략한 원수라며 김충선과 그 가족에게 손가락질하고 작은 허물에도 비난했을 것은 명약관화하다. 

김충선은 일본의 고향이야기를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속엔 결혼했던 일본인 처와 가족을 잊지 못했을 것이다. 일본에선 배신자로 낙인찍었고 조선인들은 그를 곱게 보진 않았을 것이다.

임금이 공신(功臣)에게 내린 성<姓>씨인 ‘사성(賜姓) 김해김씨’ 시조는 김충선(金忠善)이다. 그가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 입향하며 '사슴을 벗하다'는 의미로 직접 우록(友鹿)이라고 지었다.

그는 2명의 아내와 10명의 자식을 둔다. 지금 보면 다문화 가정이다. 현재 우록리에는 사성 김해김씨 67가구가 집성촌을 이루고 산다. ‘사성 김해김씨’를 '우록 김씨(友鹿金氏)'라고도 한다.

우리나라 성씨 중에는 같은 본(本)과 성(姓)을 사용하면서도 그 근원이 달라 사실상 혈통적으로 관련이 없는 성씨가 있다. 김해김씨(金海金氏)와 같은 본과 성을 사용하나 혈연적으로 전혀 관계가 없는 ‘사성 김해김씨’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녹동서원

사성 김해김씨(종친회장 김상보)와 관련해서 가창면 우록리에는 김충선의 위폐를 모신 ‘녹동서원(鹿洞書院)’을 비롯하여 ‘충절관(忠節館)’, ‘달성 한일 우호관(達城韓日友好館)’과 김충선 묘소가 있다. 

그의 후손들은 1910년이후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총독부에 의해 핍박을 받았으나 1945년 8.15 해방 후에는 일본과의 민간교류에 힘써 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끝으로 왜놈의 자식이란 선입견과 편견으로 인해서 사성 김해김씨 후손들의 겪은 어려움과 고초는 형언할 수가 없으리라. 

사성 김해김씨 시조, 김충선 자헌대부가 후손에게 준 생활철학이다. 

“남의 허물을 보려하지 말고 좋은 점을 적극적으로 찾아내라. 칭찬해 주어라. 거센 바람보다는 따뜻한 햇볕이 사람의 마음을 돌리는 법이다. 

너희를 해치려 하는 이들에게 앙심을 풀지 말고 웃어 주어라. 그들의 말이 맞다면 너의 행실을 고치면 될 것이며 그들이 잘못했다면 스스로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다. 

순간의 분노는 더 큰 화(禍)를 부르는 법이다. 시간이 지나면 그들은 잠잠해질 것이다. 명심하여라.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우리가 어릴 적부터 부모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지는 게 이기는 것이다”란 말의 원조가 누구인지 이제야 알 것 같다.   

김충선 외에도 조선시대에 귀화한 외국인들이 여러 명 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화산이(華山李)씨와 정선이(旌善李)씨, 덕수장씨(德水張氏) 그리고 임천 이씨와 경주 설씨 등의 성(姓)씨 를 덧붙인다. 

화산이(華山李)씨의 중시조는 베트남에서 온 이용상(李龍祥)이다. 시조는 베트남 리 왕조(이조)의 개국황제인 이공온(李公蘊·Lý Công Uẩn)이다. 중시조 이용상은 7대손이며, 6대 황제 영종 이천조(李天祚·Lý Thiên Tộ)의 7번째 아들이다. 

또한, 정선이(旌善李)씨의 시조 이양혼과는 종손과 종조부 사이다. 1226년 정란에 베트남 왕족들이 살해당하자 화를 피하기 위해 측근들을 데리고 바다에서 표류하다 황해도 옹진군 화산면에 정착했다. 2000년 인구조사 결과 230 가구, 1,775명의 화산이씨가 살고 있다. 본관이 있는 황해도 개풍군 덕수리 집성촌에는 화산이씨가 좀 더 있을 것이다. 

덕수장씨(德水張氏)는 위구르에서 유래한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 장순룡(張舜龍)은 위구루 사람으로 그의 부친은 원 세조 때 필도치라는 벼슬을 지냈다. 장순룡은 1275년(충렬왕 1년) 충렬왕비인 제국공주를 배행하여 고려에 온 후에 금자광록대부, 문하찬성사지내고 덕수 부원군에 봉해졌다. 2015년 덕수장씨(德水張氏)는 24,185명이며 조선시대 문과급제자 14명을 배출했다.   

임천이씨 시조 이현(李玄)과 경주설씨 시조 설손(偰遜)도 위구르 사람이라고 한다.

 
 전    대    길
 (주)동양EMS 대표이사,  
국제PEN클럽 이사, 수필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