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길의 CEO칼럼] 착한 고흐, 못된 고갱
[전대길의 CEO칼럼] 착한 고흐, 못된 고갱
  • 편집국
  • 승인 2018.10.03 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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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대    길 
(주)동양EMS 대표이사, 수필가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이사     

빈센트 반 고흐와 폴 고갱에 삶에 관해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들의 독특한 인생역정을 알아보고 1888년 10월23일부터 12월23일까지 두 달간 프랑스 아를에서 동거하며 그림을 그린 이야기다.

태양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1853~1890)’는 네델란드의 브라반트(Brabandt)에서 태어났다. 1869년(16세)에 고흐는 구필화랑(Gouphil & Cle) 헤이그 지점에서 그림 복제품을 파는 일을 했다. 그는 화랑(畵廊) 일에 만족했으며 주변 사람들은 그를 유명한 화상(畵商)이 될 거라고 믿었다.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은 고흐는 1873년에 런던지점, 1875년에 파리지점에서 일했다. 런던지점에서 일할 때 영국 여성 ‘유제니 로여(Euginie Loyer)’와 첫사랑에 실패한 후에 방황하다 종교에 심취하여 회사 일을 소홀히 하는 바람에 1876년(23세)에 고흐는 구필화랑에서 해고된다.   

  빈센트 반 고흐
  빈센트 반 고흐

목사인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되기를 꿈꾸던 고흐는 열심히 공부했으나 신학대학교 입시에서 낙방한다. 성직자의 꿈을 포기하지 못한 고흐는 벨기에 보리나주(Borinage) 탄광촌에서  전도사로 일한다. 

그러나 그의 격정적인 성격으로 목회자 일에 부적합해서 전도사 직책을 잃는다. 이에 좌절한 고흐는 가족과의 연락을 끊고 탄광촌에서 성경공부를 하며 짬짬이 그림을 그렸다. 

“무언가 세상에 가치 있는 사람이 되자!”는 고흐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림으로 전하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확신을 가져라. 아니 확신에 차 있는 것처럼 행동하라. 그러면 차츰 진짜 확신이 생기게 된다”는 믿음을 갖고 생활했다.   

고흐는 브뤼셀, 헤이그, 드렌테, 뉴에넨(Nuenen)에서 화가 수업을 받는다. 1880년 브뤼셀 친구인 ‘안톤 라파트(Anton Rappard)’에게서 드로잉 기초지식을 배우고 1881년엔 헤이그 친구, ‘안톤 모베(Anton Mauve)’에게서 유화와 수채화를 배운다. 

그러나 그의 격정적인 성격으로 인해서 남에게 지도를 받기 보다는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한다. 1883년 말, 목사인 부친이 드렌테(Drenthe)을 거쳐 뉴에넨(Nuenen)으로 부임하자 고흐는 아버지와 동거한다. 고흐는 땀을 흘리는 농민과 노동자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노동자의 정직한 삶의 모습을 그리려고 힘쓴다.  
 
고상한 야만인이라고 불린 폴 고갱(Paul Gauguin...1848~1903)은 파리에서 출생했다. 1849년, 고갱 가족은 정치적 박해를 피해 페루(Peru)로 향하는 배를 탔는데 선상에서 아버지 ‘클로비스 고갱(Clovis Gauguin)’이 동맥파열로 사망한다. 

페루에 도착한 고갱은 부자인 친척 도움으로 경제적 어려움 없이 어린 시절(1849~1854)를 보낸다. 그의 이국적인 체험은 고갱의 예술을 풍성하게 만든다.                        

  폴 고갱

1854년(6세), 고갱 가족은 5년간의 페루생활을 접고 프랑스 오를레잉(Oreleans)으로 귀국한다. 그러나 가계가 궁핍해서 어머니 ‘알린 고갱(Aline Gauguin)’은 옷 수선하는 일을 하며 고갱과 동생 마리를 키운다. 

1865년(17세)에 고갱은 선원(船員)이 되어 지중해, 인도, 북극과 페루 등지를 떠돈다 1867년(19세)에 모친이 사망하자 고갱은 인도에서 프랑스로 돌아온다. 

1871년(21세), 페루에서 함께 지냈던 은행가, 사업가인 ‘구스타브 아로자(Gustave Arosa)’의 도움으로 고갱은 베르탕 은행원으로 취업하며 증권거래인이 되어 여유롭게 산다. 

또한 아로자는 고갱에게 예술에 대한 안목(眼目)을 키워준다. 고갱은 아로자의 집에서 ‘코로’, ‘쿠르베’, ‘들라크루아’, ‘파사로’와 같은 유명 화가들의 작품을 접하고 미술품의 수집과 예술에 대한  혜안(慧眼)을 뜬다.  

고갱은 일요화가로서 그림을 그리고 (그림)수집가(Collector)로서 활동한다. 그는 인상파의 리더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o)’를 만나서 ‘드가’, ‘마네’, ‘모네’, ‘세잔’의 그림을 사들였다. 1879년에 ‘파사로’와 ‘드가’의 배려로 그림 전시회에 고갱의 작품이 출품된다. 1880년부터 고갱은 개인 화실을 열어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한다. 

1881년엔 앙당팡당(Independant)展에 ‘바느질하는 수잔:누드연습(Suzanne Sewing: Study of a Nude)’을 출품해서 호평을 받는다. 당시 대표적인 뒤랑 뤼엘 화랑은 고갱의 작품 세 점을 고가에  사 주었다. ‘에드가 드가(Edgar De Gas...1834~1917)’의 강력한 추천 덕분이다. 한마디로 ‘에드가 드가’는 고갱의 은인이다. 

1873년(25세)에 고갱은 ‘메티 소피 가트(Mette Sophie Gatte)’란  덴마크 여성과 혼인한다. 건강하고 지적인 그녀는 ‘에밀’, ‘알’, ‘클로비스’, ‘장 르’, ‘폴 폴라’ 등 5명의 자식을 낳았다. 

뭇 사람들은 “선한 고흐, 악한 고갱”이라고 한다. 이는 1888년 11월, 고갱이 고흐의 동생인 ‘테오(TEO..Theodore의 애칭)’에게 보낸 편지에서 농담으로 한 말이다. 그런데 130년이 지난 지금도 고흐와 고갱을 구분할 때 이 말이 쓰이고 있다. 

고갱만 그렇게 말을 한 것은 아니다. 고흐의 친구 ‘에밀 베르나르’도 ‘착한 고흐, 못된 고갱“이라고 불렀다. 이 외에도 ’솔직한 고흐와 〮계산적인 고갱‘, 또는 ’천사 고흐, 악마 고갱‘이라고 불린다. 고흐는 긍정적인 이미지로, 고갱은 부정적인 이미지로 인식된다.  

고흐가 착한 사람인 것은 맞다. 고흐는 보리나주 탄광촌의 임시 전도사로 일할 적에 광부들에게 자기의 옷과 양식을 나누어주며 광부들 오두막에서 함께 지냈다. 헤이그 시절에는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거리의 여인, ‘시엔’을 애정으로 보살펴 주었다. 

남프랑스 아를(Arles)은 고흐가 사랑한 시골 마을이다. 아를의 화가 공동체를 추진한 것도 어렵게 파리에서 살아가는 화가 친구들, 특히 고갱을 돕고자 함이었다. 

1887년 11월에 반 고흐와 폴 고갱이 파리의 한 화랑에서 만난다. 고흐와 동생 테오는 고갱의 작품에 매혹 당했으며 고갱은 고흐의 동생인, 테오 화상(畵商)에게 관심이 컸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자 그 둘은 서로 작품을 교환했다. 1888년 10월부터 아를Arles에서 2개월간 공동작업을 하는 계기가 된다. 

아를 시절에 고흐는 정신질환으로 고통받는 ‘지누 부인’을 보살폈다. 고흐는 주변인의 고통과 슬픔에 가슴아파한 휴머니스트였다. 

반면 고갱은 현실적이고 냉정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을 부유한 증권거래인으로 키워준 ‘구스타브 아로자’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고흐의 죽음에도 남의 일처럼 냉대했다. 

한마디로 고갱은 냉정하고 계산적이었다. “고갱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천재로 인식시키는 일에만 급급하며 누구든지 자신이 가는 길에 걸림돌이 되면 박살냈다”고 고갱의 스승 ‘카미유 피사로’는 고갱의 인간성을 혹평했다. 

고갱은 사랑 앞에서도 계산적인 행동을 취했다. 
고갱은 타히티에서 만난 원주민 소녀인 ‘티티’, ‘테하마나’와 ‘파후라’, 자바 출신의 흑인 여인 ‘안나’와 동거하며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기 자식들에 대한 연민과 책임의식이 전혀 없었다. 

고갱은 정말로 나쁜 사람이었나? 
생활환경이 그를 약삭빠른 기회주의자, 거만한 사람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고갱이 이런 성격은 그의 성장 배경과 생활환경 때문이다. 

고갱은 한 살 때, 페루로 가는 배에서 아버지를 잃고 옷 수선 일을 하는 홀어머니 슬하에서 어렵게 살았다. 페루에서의 어린 시절을 빼고 그는 늘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 살았다. 정신적〮 물질적으로 열악한 환경 속에서 고갱은 늘 외톨이였다. 

그는 고흐처럼 착하고 든든한 후원자, 동생이 없었다. 그를 보살펴 줄 가족도 없었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노력만으로 미술작품을 팔거나 어떻게 해서든지 생존해야만 했다. 

경제적 어려움은 그를 더욱 현실적이고 냉정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고갱은 매월 200프랑을 후원하는 동생을 둔 고흐와는 사정이 달랐다. 고갱도 고흐처럼 정상적인 가정에서 성장하고 고갱의 후원자가 있었더라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고갱은 1885년, 부인과 헤어져 집을 나온 후에 자신의 힘만으로 의식주를 해결하고 작품 활동을 했다. 파리 뒷골목의 화가로 활동하던 시절에 아들 ‘클로비스’가 아프고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자 일당 5프랑의 벽보 붙이는 일도 했다. 

1888년 아를에서 고흐와 공동작업을 한 것은 경제적인 이유가 크다. 고갱이 몸이 아파서 작품 활동을 제대로 할 수가 없고 병원 치료비와 하숙비 등을 해결하기 위해 고흐와의 공동작업을 내키지는 않았지만 받아들인 것이다.  

1888년 10월23일~12월23일까지 2개월간 프랑스 아를(Arles)의 노란 집(Yellow House)에서 반 고흐와 폴 고갱은 한 지붕 아래에서 살며 공동작업을 한다. 

이들은 고대 로마의 유적지가 많은 아를의 이곳저곳을 그리면서 미술과 예술에 관해 토론한다. 처음에는 하루하루가 즐겁고 새로웠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들 사이에는 불협화음이 일어났다.

고흐와 고갱처럼 개성이 강하고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 한 지붕 아래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성장 환경이 다르고 가치관, 예술관, 성격이 맞지 않았다. 

특히 누구에게나 복종하지 못하는 둘의 성격은 날마다 격렬하게 부딪힐 수밖에 없었으며 한 달이 지날 즈음, 둘은 심하게 싸워서 아침에 일어나기도 힘이 들었다. 

개성의 다름이 고흐와 고갱의 특징이었고 개성적인 작품을 만드는 원천이었다. 그들은 보통사람과는 다른 독특한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독특한 눈으로 주변의 사람과 자연, 예술, 사물, 제도 등을 보았다. 고흐와 고갱은 세상을 보는 방식이 달라서 서로 다른 그림을 그린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개인 사정으로 고흐와 고갱이 공동작업을 시작했으나 결말은 비극적이었다. 고흐와 고갱의 공동작업은 그 들의 예술세계와 나아가 세계미술사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동거하는 동안 우리는 엄청나게 많은 작업을 했으며 우리는 분명 모종의 결실을 거두었다”고 고갱은 평가했다. 

고흐는 고갱의 상징주의 예술관을 수용하지 않았지만, 고갱과의 공동 작업을 통해 자신의 예술관을 확고히 굳힐 수 있었다. 고갱이라는 존재는 고흐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고갱이 아를에 도착하기 전에 고흐는 고갱을 기다리며 걸작 ‘해바라기’를 비롯하여 ‘화가의 침실’, ‘시인의 정원’과 같은 걸작명화를 그렸다. 

고흐는 고갱에게 얕잡아 보이지 않으려고 열심히 좋은 작품들을 그렸다, 또한 고흐는 고갱의 영향으로 기억과 상상력에 의존해 그리는 방법을 배웠다. 고갱은 고흐의 영향을 부인했지만 고흐에게서 감정을 담아 강렬하게 표현하는 화법을 발견했다. 자신의 상징주의 예술관을 굳히는데 큰 도움을 받았다.

고흐와 고갱의 공동작업은 단순히 귀를 자른 슬픈 결말만을 준 것은 아니다. 고흐와 고갱은 19세기 후반에 사진의 출현으로 위기에 빠진 미술계를 구했으며 20세기 현대미술의 새로운 장르인 야수파(Fauvism), 표현주의(Expressionism), 다다이즘(Dadaism), 초현실주의(Surrealism)와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의 탄생에 공헌했다. 

1882년 6월, 고흐와 동거하던 ‘시엔’이 아이를 낳았는데, 고흐는 ‘빌렘(Villem)’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고흐는 빌렘을 위해 화가로서 성공하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생활의 고통은 커져갔고, 결국 경제적 어려움으로 시엔의 가족과 헤어지고 말았다. 고흐는 시엔과 빌렘을 버렸다는 죄책감으로 평생 괴로워했다. 

1885년, 셋째 아들 ‘클로비스(Clovis)’를 데리고 집을 나온 고갱은 파리의 친구 ‘쉬페네커’ 집에 머무르며 제8회 인상파 미술전에 모든 것을 건다. 그러나 전시가 실패하자 1886년 7월, 고갱은 어린 ‘클로비스’를 누나 ‘마리’에게 맡기고 떠났다.

고흐의 어머니 ‘안나 카르벤투스’는 고흐의 아버지 ‘테오도루스 반 고흐’와 결혼하여 여섯 명의 자녀를 낳았다. 안나는 목사인 남편을 충실히 보필하면서 자녀들을 키웠으나 행복한 삶을 살지는 못했다. 그녀는 60대 초에 남편을 잃었다. 세 아들, 고흐는 37세, 테오는 33세, 막내 코넬리우스는 23세에 죽었다. 

고갱의 어머니 ‘알린 고갱’은 매력적인 모습과 달리 그리 편안한 삶을 살지 못했다. 1846년, 고갱의 아버지 ‘클리비스’와 결혼한 알린은 결혼 3년 만에 남편을 잃었고, 젊은 미망인으로 옷 수선 일을 하며 힘들게 두 아이를 키우다 40대 초반에 세상을 등졌다. 어린 시절 알린은 친아버지에게 납치와 성폭력이라는 고통을 당하기도 했으며 아들 고갱에게는 행실이 부정한 여인으로 여성혐오증을 심어주었다. 

1888년 10월, 고흐와 고갱은 각자의 자화상을 주고받는다. 공동작업을 시작하기 전, 각자의 자화상을 그려 교환하자는 고흐의 제안을 고갱이 받아들여 성사된 것이다. 처음 고갱은 고흐와 그림을 주고받을 생각이 없었다. 5월까지 그는 아를에 갈 생각이 없었다. 

공동 작업 하자는 고흐의 제안을 차일피일 미루다 1888년 8월에나 아를로 가겠다고 결심했다. 몸이 아파 병원비가 많이 든 데다 여관비도 많이 밀렸다. 테오가 생활비를 지원하고 매달 작품 한 점을 팔아주겠다고 하자 눈 딱 감고 몇 달간 고생하는 셈 치고 아를에서 보내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이왕 가기로 했으니 보다 적극적으로 임하자는 의미에서 고흐의 제안을 수용한 것이다.

아를의 라마르틴 광장에 위치한 밤의 카페는 지누 부부가 운영하는 카페로 술주정꾼들과 도시의 부랑자들, 하역을 마친 선원들, 손님을 유혹하려는 매춘부들이 밤새 들락거리는 술집이다. 고갱이 아를에 온 이후 둘은 거의 매일 밤의 카페를 들락거렸다. 1888년 9월, 고갱이 오기 전 고흐는 사흘 밤을 새워 ‘밤의 카페‘를 그렸다. 고흐는 밤의 카페를 태워서 없애 버려야 할 악의 소굴로 표현했다. 

1888년 11월, 고갱도 고흐와 같은 주제로 ‘밤의 카페‘를 그린다.  
같은 주제를 그렸지만, 둘의 그림은 양식과 의도가 완전히 달랐다. 고흐는 밤의 카페를 근심과 스트레스를 푸는 친구의 사업장으로 그렸다. 반면에 고갱은 사람들을 타락시키고 병들게 하는 악의 소굴로 그렸다.
 
‘조셉 롤랭’은 아를역에서 근무하던 집배원이다. 그는 아를에서 고흐의 둘도 없는 친구였다. 고흐에게 롤랭은 온화하며 자비롭고, 대가족을 거느린 책임감 있는 가장이었다. 고흐는 그가 마치 소크라테스와 같은 외모와 인품의 중년 남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갱에게 롤랭은 소크라테스가 아니었다. 그에게 롤랭은 아를이라는 시골  술집에서 매춘부들과 히득거리며 밤새 술이나 퍼마시는 술주정꾼에 불과했다.

‘오귀스틴 롤랭(Augustine Roulin(1851-1930)’은 조셉 롤랭의 부인이다. 1888년 11월 말에서 12월 초, 고흐와 고갱은 노란 집에서 오귀스틴을 그렸다. 고갱은 오른편에서 그녀를 그렸고, 고갱은 왼편에서 그렸다. 고흐는 라마르틴 공원을 배경으로 오귀스틴을 그린 반면, 고갱은 최근에 완성한 자신의 ‘푸른 나무(1888)‘를 배경으로 오귀스틴을 그렸다. 다른 그림처럼 한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그렸음에도 두 사람의 그림은 전혀 다른 그림이다.

1888년 10월 말, 고흐와 고갱은 알리스캉으로 스케치 여행을 나선다. 고흐와 고갱의 첫 번째 공통작업이다. 고흐는 어떻게 해서든 오랫동안 고갱을 아를에 머물게 할 생각으로 아를이 자랑하는 고대 로마의 공동묘지인 알리스캉(Alyscamps)을 첫 작업지로 선택한다. 알리스캉 길가에는 포플러나무가 늘어서 있고 나무 아래에는 커다란 석관묘가 줄지어 있다. 알리스캉을 배경삼아 고흐는 네 점, 고갱은 그림 두 점을 그린다. 

1888년 11월, 고흐와 고갱은 해질녘, 황금색 태양빛을 받으며 비가 그친 아를의 저녁 무렵에 여인들이 포도를 수확하는 풍경을 그린다. 고흐는 저녁 태양빛에 따라 수시로 변화하는 포도밭의 가장 인상적인 순간을 강렬한 색채와 힘찬 터치로 포착하여 그렸다. 고갱은 화실에서 종합주의(Synthetisme)방식으로 ‘아를의 포도수확:인간 고뇌(1888)’를 그렸다.

1888년 12월, 고흐와 고갱은 비가 와서 며칠간 밖에서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이 때 고갱은 ‘해바라기를 그리는 고흐(1888)’를 그렸고, 고흐는 ‘붉은 베레모를 쓴 고갱(1888)’을 그렸다. 상대방을 모델로 그렸는데 서로 작업하는 모습을 곁눈질하며 그린 것이다.

그러나 공동생활 두 달이 지나자 두 화가의 예리한 눈은 서로의 실체를 꿰뚫어 보았다. 고갱은 고흐를 해바라기 그리는 미치광이로 그렸으며 고흐는 고갱을 음흉한 음모가로 그렸다. 더 이상 그들의  눈에 비친 상대는 수도승과 장 발장이 아니었다. 

고흐는 자타가 공인하는 ‘해바라기의 회가’이다. 
1888년 여름, 고흐는 해바라기를 그려 고갱의 방을 멋지게 장식했다. 고갱도 고흐의 해바라기를 높이 평가하였다. 1887년, 고갱은 자기가 그린 풍경화를 고흐가 그린 해바라기와 교환했다 

아를을 떠난 뒤 고갱은 고흐에게 해바라기 그림 한 점을 달라고 해서 고흐의 분노를 산 적이 있다. 그랬던 고갱이 1901년에 마르키즈에서 네 점의 해바라기를 정물로 그리기도 했다.

1885년, 엔트워프(Antwerp)에서 일본 목판화를 본 고흐는 단순한 선과 강렬한 색면으로 정교하게 표현된 일본의 목판화에 빠진다. 

그것은 고흐가 그토록 추구하고 싶었던 예술세계였다. 1886년에  자연을 단순화하게 그리던 고갱은 인상파의 분할주의(Pointilisme)방식을 버리고 유려한 곡선과 밝은 색의 색채를 평편(平便)하게 칠하는 그림을 시작한다. 일본 회화의 영향을 받은 때문이다. 

여성과의 사랑에 대한 결핍으로 고흐는 늘 로맨틱한 사랑을 꿈꾸었다. 그는 연인들이 서로 팔짱을 끼거나 어깨동무를 하고 공원이나 강변을 거니는 낭만적인 연애를 꿈꾸었다. 

반면 일찍부터 여러 여성과의 밀회나 섹스에 대한 경험이 풍부했던 고갱은 에로틱한 시선으로 여성들을 바라보았다. 고갱은 여성이란 성적욕망을 해결하는 대상이자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농민화가를 꿈꾸었던 고흐는 자기 자신을 그림 그리는 노동자라고 생각했다. 반면 고갱은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자였지만 예술적으로는 귀족화가였다. 

농민화가인 고흐의 취미는 독서, 편지 쓰기, 산책 등이다. 이와 반대로 귀족화가인 고갱의 취미는 글쓰기, 악기 연주, 시낭송, 펜싱 등이다. 고갱의 화실에는 늘 시인과 음악가들로 가득 찼다. 그는 아를에 갈 때도 펜싱 검과 마스크를 소지했다.

1888년 12월23일, 고갱이 머지않아 아를을 떠날 것이라는 사실을 안 고흐는 불안했다. 고갱을 위협했던 면도칼로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잘라서 ‘라체’란 창녀에게 주었다.               

 귀를 자른 고흐 자화상       
 귀를 자른 고흐 자화상       

그 다음 날인 12월 24일, 고갱은 도망치듯이 아를을 떠났다. 
이후 둘은 서신교환을 몇 차례 했지만 서로 만나지 않았다. 고흐는 고갱을 방문하기 원했지만 고갱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고흐의 방문을 거절했다. 이별 후에도 두 사람의 삶은 행복하지 못했다. 

고흐가 말년에 자살한 것은 치유할 수 없는 정신질환이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돈이었다. 고흐는 생전에 동생 태오에게 800여통의 편지를 썼다. 자신을 지원하던 동생 테오의 결혼문제와 이직문제 로 어려움에 처해서 고흐에게 후원금을 제 때에 보내주지 못했다. 

이에 고흐는 금전적인 어려움으로 마지막이 왔다고 생각하고 1890년 7월27일, 고흐는 오베르(Auvers-Sur-Oise) 들판에서 자신의 배를 권총으로 쏜 후 7월29일 사망한다. 고갱도 1903년 5월8일,  남태평양 마르키즈섬(Marquesas Islands)에서 가난과 질병 동맥파열로 쓸쓸히 죽는다. 

“난 무식해서 잘 모르지만 고흐의 그림에는 진정성(眞正性)이 있다”라는 태호의 칭찬에 고흐는 용기를 얻어 ‘두 개의 손(Two hands)'과 ’감자 심는 사람‘ 등의 명작을 그린다. “네 그림 속엔 거름냄새가 풍겨났으면 좋겠다”는 게 고흐의 소박한 바램이다.

고흐가 살아있을 때에 고흐의 작품은 한 점만 팔렸다. 
귀를 자르고 붕대감은 모습과 입술이 터지고 피를 머금은 모습 40점의 자화상(自畵像)과 한 점당 1,000억 원을 호가하는 2,000여점의 명작을 10년(27~37세)간 그린 천재화가 고흐다. 이틀에 한 작품씩 그린 꼴이다. 살아서 보다 사후에 진가를 발휘하는 고흐, 고갱이다. 

1990년 5월,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서 고흐의 ‘닥터 가셰의 초상(1890)’의 경매가 있었다. 경매가액은 무려 8,250만 달러(약 830억 원)이다. 당시 세계 최고의 경매가였다. 

그 후 24년이 지난 2014년 고갱이 다히티에서 그린 ‘언제 결혼하니?’는 경매 사상 최고가인 3억2,500만 달러(약 3,500억원)에 팔렸다. 미술품 판매 사상 최고가였다. 그런데 요즘 고흐의 작품이 경매에 나온다면 고갱이 세운 최고가를 넘어서는 천문학적 경매가가 될 거라고 한다. 

1888년 10월23일부터 12월23일까지 두 달간 프랑스 아를에서 고흐와 고갱이 한 지붕 아래에서 살면서 작업했다는 실화를 집중적으로 탐구해 보았다. 이제 고흐가 왜 자기 얼굴의 오른쪽 귀를 스스로 잘라서 ‘라체’란 창녀에게 주었으며 왜 권총으로 자살했는지 그 의문이 풀릴 것이다.

끝으로 필자의 절친인 ‘윤고방 화가(시인)’와 하정열 화가(시인, <예>육군★★)’가 두 달간 함께 생활하며 작업을 한다면 어떤 작품이 나올지 눈감고 그려본다. 한국 최고의 명화(名畵)를 기대한다.  

전    대    길 
(주)동양EMS 대표이사, 수필가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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