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길의 CEO칼럼] 박항서(朴恒緖)와 쩐흥다오(陳興道)
[전대길의 CEO칼럼] 박항서(朴恒緖)와 쩐흥다오(陳興道)
  • 편집국
  • 승인 2018.12.26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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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대   길 
(주)동양EMS 대표이사, 수필가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최근 동남아시아 월드컵이라 불리는 '2018 AAF SUZUKI CUP' 축구대회에서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이 말레이시아 축구 국가대표팀을 누르고 2008년에 이어 두 번째로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막강한 팀이 즐비한 가운데 기적과 같은 우승을 일구어 낸 경상도 산청출신의 박 항서 축구대표 감독은 ‘베트남 국민 영웅’으로 등극했다. 

우리나라 공중파와 지상파 TV에서도 생중계 방송을 했는데 그 시청율이 22%란다. X-MAS인 어젯밤 하노이에서 벌어진 북한과의  축구 대표팀 평가전에서는 무승부를 이루어 국가대표 간의 A매치 축구경기에서 17전(戰) 무패(無敗)를 달성했다.  
 
우리나라 국가대표팀 축구선수와 감독으로 활동했던 박 항서 감독은 “나는 대한민국 사람이다. 베트남 국민들이 나를 사랑해 주듯이 베트남 국민들은 대한민국을 사랑해 달라”면서 우승으로 받은 특별보너스(1억 원)를 베트남 축구발전에 써달라며 흔쾌히 쾌척했다. 

한국에서는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60세의 박 항서 감독은 베트남 축구대표 선수들의 아버지로 불리며 ‘Papa 리더십’을 보여 주었다. 

그는 대한민국 최고의 외교관이라고 칭송받으며 시공(時空)을 초월해서 천시(天時), 지리(地利), 인화(人和)를 일구어 낸 명실상부(名實相符)한 축구영웅이다. 박 항서 감독이 이처럼 성공할지는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사람팔자는 정말로 모를 일이다”라고 주변에서 이구동성이다. 

그런데 박 항서 감독을 지켜보면서 베트남인들로 부터 ‘월남의 이 순신’이라 존경받고 사랑받는 ‘쩐흥다오(陳興道)장군’을 뇌리에 떠올린다. 그는 BBC방송이 선정한 세계 100대 전략가 중 한 명이다.  

820년 전인 1,200년에 원(元) 쿠빌라이 황제는 베트남을 세 번이나 침공했다. 1,257년 30,000명의 몽골군사로 1차 침공 때의 전투는 몽골군의 승리가 예상되었다. 

그러나 베트남군은 ‘자체파괴 전략’과 ‘청야(淸野)전술’, 유격전 그리고 날씨와 기후를 활용한 지구전(持久戰)을 펼쳤다. 여름에는 풍토병, 겨울에는 추운 북부 베트남의 기후가 몽골군을 괴롭혔다. 

몽골군은 쉽게 베트남의 수도를 점령했지만 굶주림과 추위 그리고 질병에 시달렸기 때문에 오히려 화전(和戰)을 요청하는 궁지에 몰렸다. 

나중에 베트남군의 총반격으로 몽골군은 패퇴(敗退)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몽골 전쟁사에서 첫 패전(敗戰)이며 굴욕이었다.

1,284년, 몽골은 500,000의 병력으로 2차로 침공했다. 베트남은 항전했으나 수도가 함락되었으며 베트남 황제, 인종은 몽골에 항복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때 ‘베트남의 이 순신’이라 일컫는 ‘쩐흥다오(陳興道)장군’이 등장한다.    

 월남 지폐 500동의 ‘쩐흥다오(陳興道)장군’

그는 ‘격장사(檄將士)’란 글을 지어 장병들에게 베트남 왕조의 위급함을 호소하며 결사항전을 외쳤다. 사기가 오른 베트남군은 수도를 탈환한다. 

그러자 일본에 대한 침공을 접고 몽골은 300,000 명의 수륙군이 3차로 베트남을 침략한다. 그 당시 베트남의 병력은 200,000명이었다. 쩐 장군은 ‘치고 빠지기 전략 전술’인 ‘청야전술’을 펼치며 몽골군대의 보급 길을 차단했다. 무더위와 열대병으로 고전하던 몽골군은 전투식량 조달이 어려워지자 결국엔 패퇴했다.

쩐 장군은 특유의 창의적인 전략과 전술을 구사했다. 썰물 때 바익당 江바닥에 쇠말뚝을 깊숙하게 박아놓았다. 밀물 때에는 몽골군을 강 안쪽으로 깊숙하게 유인했다가 썰물 때가 되자 베트남 군대는 총공세를 펼첬다. 

그러자 몽골 전함들은 쇠말뚝에 걸려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전투가 끝났을 때 몽골군(약100,000구)의 사체(死體)가 바익당강(白藤江)에 떠다녔다. 강물은 피바다였다고 전한다.

베트남은 15세기에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남부를 통합하여 세력을 떨쳤다. 비슷한 시기에 타이에는 수코타이 왕조와 아유타야 왕조가 연이어 들어섰다. 13세기에 자바 섬의 마자파히트 왕국은 인도네시아의 뿌리가 되었다. 말라카 해협에는 말라카 왕국이 이슬람 해상 왕국으로 자리를 잡았다.

한문으로 된 베트남 정사(正史)인 역사책, 「대월사기(大越史記)」를  베트남인들은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한다. 13세기에 몽골 군대가 베트남에 3번이나 침략해 왔지만 이를 전부 막아 낸 것이다. 

‘쩐흥다오(陳興道) 장군’이 이끄는 베트남군의 끈질긴 저항이 몽골을 꺾은 것이다. "항복하려면 먼저 제 목을 배소서~!"라고 그가 외치면서 출전(出戰)하는 대목은 인상적이다. 

일찍부터 베트남은 국왕을 황제라 높여 부르고 베트남 민족문자, '추놈(Chunom) 문자'로 베트남 문화를 창달하며 나라의 힘을 키웠다. 

15세기에 또 다시 이어진 명나라의 침략과 베트남을 신하의 나라로 삼아 온갖 재물을 빼앗으려는 중국의 지배에 맞서 베트남 사람들은 끈질기게 저항하고 투쟁하며 싸워 이겼다. 

베트남은 남쪽으로 눈을 돌려 인도네시아계인 참족이 세운 나라인 ‘참파(Champa)’ 나라를 공격하기도 했다. 17세기에는 참파를 손에 넣고 육지와 바다를 아우르는 인도차이나의 강국으로 부상을 한 것이다.

몽골군을 격퇴한 베트남의 위대한 '쩐흥다오(陳興道)' 장군은 베트남 호치민(HoChiMinh)의 사이공강 광장에서 손가락으로 강을 가리키며 동상으로 우뚝 서 있다. 

베트남의 위대한 전쟁영웅인 그가 몽골군과 싸워 이기자 몽골의 동남아시아 정벌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는 동남 아시아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쩐흥다오(陳興道) 장군’은 원래 13세기 베트남을 지배했던 쩐(陳) 왕조의 왕족이며 당시 베트남의 왕이었던 태종과는 사촌간이다. 

아버지가 조정 내의 권력다툼에 패배해 조정과 대립하던 시기도 있었으나 그의 운명을 바꾼 것은 몽골제국의 침공이었다. 

1257년에  ‘우리양카다이(兀良合台) 몽골군 장수’가 남송을 공격하기 위해 베트남에 길을 빌려달라고 사신을 보낸 적이 있다. 명나라를 치기 위해 조선에 길을 내달라며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처럼 말이다. 

13세기 몽골제국 판도. 당시 몽골제국은 세계 제일의 군사력을 자랑했다. 유라시아 대륙 대부분을 정복한 대제국을 건설했다.

몽골은 1276년 남송을 무너뜨린데 이어 1283년에는 베트남 남부 일대에 있던 참파왕국을 공격하기 위해 베트남에 군사를 파병하라고 압박했다. 

베트남이 이 제안을 거절하자 분노한 당시 몽골제국 황제인 쿠빌라이 칸은 1285년, 아들인 토곤(脫驩)을 사령관으로 삼아 50만 대군으로 베트남을 침공했다. 수적(數的)으로 불리한 베트남군은 참패해 그 당시 수도인 탕롱성이 함락됐으며 대부분 신하들도 몽골에 항복해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었었다.

이때 쩐 장군이 구국의 영웅으로 나섰다. 그는 임금에게 "항복하려거든 신의 목부터 치소서"라고 간하며 "모든 국민이 떨쳐 일어나서 마음을 뭉쳐 싸운다면 이길 것"이라고 왕을 설득했다. 

이후 격장사(檄將士)'라는 글을 지어 군에 입대할 베트남 장정들에게 돌렸다. 그는 이 글에서 "쿠빌라이의 머리를 대궐 아래 매달고 토곤의 살점을 장안 거리에서 썩게 해야 한다"고 강하게 외쳤으며 피난을 가던 베트남인들이 격장사(檄將士)를 보고 군대에 자원입대하면서 250,000명이란  병력을 모으는데 성공했다.

그는 여전히 숫적으로 압도적인 몽골군과의 전면전은 피하고 지속적으로 몽골군을 괴롭히는 게릴라전을 시작한다. 그를 따르는 베트남군도 팔꿈치에 몽골 오랑캐를 죽이겠다는 의미의 '살달(殺撻)'이란 글을 문신으로 새기며 집요하게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20세기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고전하고 패전한 것처럼 정글과 밀림 속의 게릴라전에 익숙치 못한 몽골군은 패전(敗戰)했다. 몽골군 500,000명은 폭염과 식량부족에 지쳐 대패한 것이다. 이로 인해 쿠빌라이 칸의 동남아시아 원정 작전은 대실패로 돌아갔으며 몽골군은 베트남을 다시는 침략하지 못했다. 

쩐 장군은 나라를 지키다가 13년 뒤인 1,300년에 사망했다. "군대는 부모자식처럼 단결시키고 백성을 너그럽게 대하면 대업을 성취할 것이다"라는 유언을 왕에게 남겼다. 

모든 베트남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그의 일대기는 베트남이 세계 최강의 열강들과 맞서 싸우는 원동력이 되었다. 베트남에서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쩐흥다오(陳興道)' 장군이 죽고 700년 가까이 지난 1979년이다. 중국과의 중·월 전쟁이 마지막 전쟁이다. 

베트남에 관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적는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자신의 이름을 소중히 여기고 이름을 더럽히지 않으려 애썼다. 본명은 임금이나 스승, 부모만이 부를 수 있었다. 

대신 어릴 때는 아명을 사용했으며 장성해서는 ‘자’나 ‘호’를 사용했다. 뼈대 있는 집안에서는 부모도 자식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를 않았다. 이름을 중요시하는 민족이었으니 부모가 물려준 성씨를 바꾼다는 것은 감히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베트남에서는 필요에 따라 성과 이름을 수시로 개명하여 시용하는 특이한 문화가 있다. 베트남에서 성과 이름을 바꾸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그 예로 ‘호찌민(胡志明) 주석’을 든다. 그의 본명은 ‘응우옌신꿍(阮生恭)’이다. 

그의 성은 '호(胡)씨'가 아니라 ‘응우옌(阮)씨’다. 프랑스로 부터 독립을 주창하면서 형벌을 피하기 위해 때와 장소가 바뀌면 성명을 개명했다. 호치민 주석은 174개나 되는 이름을 바꾸면서 살았다. 

또한 베트남에서는 역신이 자식을 해치지나 않을까 하는 다분히 미신적인 두려움으로 계약에 의해 사람을 사당이나 사찰에 팔아넘기는 예를 올리고 자식을 입양시키는 문화가 있다. 

성인(聖人)이나 부처의 자녀로서 해를 받지 않고 성장하도록 자녀의 양육을 위탁하는 것인데 이를 ‘반코안(Bankoan)’이라 부른다.  

베트남의 민족 영웅, 쩐흥다오 장군의 사당에 어린 아이를 반코안 하면 성을 쩐(陳)씨로 바꾼다. 아이가 12세에 이르면 다시금 자식을 되찾는 예를 올리고 생가로 돌아와 부모와 함께 산다. 또한 베트남 사람들은 우리 한국인처럼 성명에 한자(漢字)를 사용한다. 

전제군주제 하에서는 왕의 이름과 같다는 이유로 강압에 의해 성을 변경하는 사례가 있었다. 왕이 공신들에게 자신의 성씨를 하사하는 퐁꾸옥띤(封國姓)과 공적에 따라 성씨를 하사하는 사성(賜姓)에 의한 변경도 있었다. 

지리적으로 남북으로 길게 늘어진 베트남은 역사적으로 남북 분쟁이 많아서 분쟁이 끝난 후 상대방의 보복을 피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보복을 피하기 위해 성씨를 바꾸곤 했다.

중부 베트남의 꽝응아이 성의 소수민족은 1960년 이전에는 '딘(丁)씨'였으나, 1975년 베트남이 통일된 뒤에는 거의 '호(胡)씨'나 ‘팜(范)씨'로 개명했다. 

이는 정치인이자 공산주의 사상가로서 호치민과 함께 반(反)프랑스 독립운동가로 활약했던 ‘팜반동(Phạm Văn Đồng)수상’과 고향이 같다는 연유로 자신들의 성(性)을 바꿨다. 

일종의 위인(偉人) 숭배사상에 의해서 자신들의 성(性)을 바꾼 것이다. 베트남은 역사적으로 외부의 침략을 많이 당했다. 남북 간의 분쟁도 심했기 때문에 그들은 명예보다는 생존을 최우선시 했다. 

베트남 민족은 생존을 위해서는 부모로부터 받은 성씨도 편의에 따라 언제든지 바꾸는 실용주의를 우선시한다. 앞으로 박 항서 감독의 성을 따라서 ‘박(朴)씨’로 성을 바꾸는 베트남 사람이 생겨날 것같다. 베트남과의 비지니스에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기본이다.

박 항서 축구감독과 '쩐흥다오(陳興道)' 장군은 두 사람 다 쇠말뚝을 박아서 승리한 명장(名將)의 반열에 올랐다는 공통점이 있다.  

박 항서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부임한지 15개월 만에 박 항서 감독은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 선수들 가슴마다 자신감, 희망과 열정이란 말뚝을 박았다. 

뿐만 아니라 화합과 신뢰의 아버지 상(像)인 ‘Papa 리더십’이란 쇠말뚝을 박았다. '쩐흥다오(陳興道)' 장군은 바익당강(白藤姜) 바닥에 쇠말뚝을 박아놓고 몽골군대와의 전쟁에서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다. 

끝으로 베트남에서 쩐흥다오(陳興道)' 장군처럼 존경받고 사랑받는 박 항서 축구감독에게 환호와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베트남어로 ‘감사하다’는 ‘깜옹’이란 인사말과 아울러 “목(1), 하이(2), 바(3), 본(4), 남(5), 사우(6), 바이(7), 땀(8), 찐(9), 무어이(10)”란 하나에서 열까지 헤아리며 박 항서 축구감독이 쉼 없이 승승장구(乘勝長驅)하길 기원한다. 

한국에서는 제대로 능력을 인정받지는 못했으나 베트남에서의 위대한 축구영웅으로 거듭 태어남을 축하한다. 

전   대   길 
(주)동양EMS 대표이사, 수필가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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