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길의 CEO칼럼]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왜 창제했나?
[전대길의 CEO칼럼]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왜 창제했나?
  • 편집국
  • 승인 2019.02.07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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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대   길
(주)동양EMS 대표이사
국제PEN 한국본부 이사

조선(Korea) 왕조 4대왕인 세종(1397~1450...李祹) 10년(1427년)에 진주사람 김 화(金 )가 자기 아버지를 죽이는 존속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조정의 대소신료들은 김 화를 극형으로 처형하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세종은 “내가 덕(德)이 없어서 일어 난 살인 사건이다”라며 효행사상을 높이고 백성들의 교화(敎化)를 위한 ‘효행록(孝行錄)’을 펴낸다. 

그런데도 효과가 없자 세종은 1434년(세종 16년) 직제학 설 순에게 왕명을 내려 백성들이 쉽게 배울 수 있게끔 부모에게 효도하는 그림을 넣은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란 책을 펴냈다.          

그러나 백성들이 한자(漢字)로 쓰인 효행록과 삼강행실도를 읽고 이해하고 실행할 수 없었다. 선비와 양반들만 쓰는 한자(漢字)를 까막눈이 백성들은 읽지를 못하고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삼강행실도
삼강행실도

이를 안타깝게 여긴 세종은 백성들이 배우고 익혀서 일상생활 속에 쉽게 쓰일 문자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한자(漢字)를 쓰면 되지, 새로운 문자를 왜 만들려고 하느냐?”며 명(明)나라에게 트집을 잡을 것 같아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를 밖으로 들어나지 않도록 은밀하게 추진한다. 

훈민정음 창제의 시발점은 ‘김 화의 존속 살인사건’에서 기인(基因)한다.                             

훈민정음
훈민정음

세계적인 발명품(World-Best Masterpiece)이 세종의 재위(1418~1450)기간 중에 21점이 만들어졌다. 동 시대(1400~1450)에 ‘세계의 과학적 성과물’을 중국(China)은 4점, 일본(Japan)은 0점, 기타(Others) 국가는 19점을 만들었다. 

일본의 이토 준타로 교수는 이러한 역사적 진실을 시대별로 정리해서 ‘과학사/기술사 사전(1983)’에 ‘C4 J0 K21 O19’라고 암호문처럼 수록했다. 세종의 재위(1418~1450) 32년간 조선은 세계 제일의 과학기술을 이끈 창의력 넘치는 최첨단 국가였다. 

세종 재위기간 중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과학 발명품들이다. 
세종 23년(1441년) 강우량 측정을 위해 장 영실 등이 세계 최초로 발명한 세계적인 발명품(World-Best Masterpiece)이 ‘측우기(測雨器)’다.                          

앙부일기
앙부일구

천체의 운행과 고도와 방위, 낮과 밤의 시간을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었던 발명품 천문관측기기는 ‘간의(簡儀)’다. 세종 19년(1437년)에 처음 만들어진 천문의기는 해 시계인 ‘앙부일구‘다.

세종 16년(1434년) ‘스스로 부딪히며 떨어진다’는 의미를 담은 ‘물 시계’인 ‘자격루(自擊漏)’가 장 영실 등에 의해 발명되었다. 세종 11년(1429년)에 박 연(朴淵)에 의해 개량된 ‘편종(編鐘)’도 꼽힌다.

그 당시 개기 일식을 예측(정확도 1분이내 오차)하는 나라는 조선뿐이었다. 낮이나 밤에도 시간을 동시에 측정할 수 있는 최첨단 시계인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는 전쟁 시에도 필요했다. 

그럼 세종은 위와 같은 세계적인 과학 발명품(21점)을 왜 만들었을까?

세종실록(163권 154책)에 따르면 세종 재위기간인 15세기 전반에 지구의 온도가 영하로 하강한 ‘소빙하기(小氷下期)’가 찾아왔다. 한파(寒波)가 극 심하고 가뭄이 극심해서 백성들은 농사짓기가 어려웠다. 해마다 흉년이 들고 기근(饑饉)으로 인해서 흙까지 파먹는 백성들도 생겨났다.

백성들의 ‘안거낙업(安居樂業)’과 ‘생생지락(生生之樂)’을 표방하며 “밥은 백성의 하늘이다(民以食爲天)”라고 생각한 세종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하늘에서 비가 오기를 바라는 기우제(祈雨祭)만 지낼 수는 없지 않은가? 
해와 달, 그리고 별과 천체를 관측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잴 수 있는 해 시계와 물시계를 발명해야 할 필요성이 절박했다. 이러한 필요성(Needs) 이 세종으로 하여금 세계적인 과학 발명품을 탄생토록 한 것이다. 

끝으로 세종은 어떻게 신하들을 설득하고 국정(國政)을 이끌었을까?

법 제정과 세제개혁 등 중대사는 다수결(多數決)로, 죄인 처형은 만장일치로 의결했으며 중요한 군사문제에 관해서는 세종이 숙고(熟考)한 끝에 최종적으로 결정했다. 대마도(對馬島)와 백두산을 조선 땅으로 귀속시킨 왕이 세종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서울 광화문 광장의 세종대왕 동상과 이 순신 제독의 동상을 우러러 보면서 나라를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치신 두 위인(偉人)께 머리 숙인다.  

전   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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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PEN 한국본부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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