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연 사장의 별빛에 꿈을 담고2] 처음 해본 아르바이트 찹쌀떡 팔기
[이수연 사장의 별빛에 꿈을 담고2] 처음 해본 아르바이트 찹쌀떡 팔기
  • 편집국
  • 승인 2019.09.0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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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연 제이앤비컨설팅 대표이사
이수연 제이앤비컨설팅 대표이사

“찹쌀떡 팔아요.”
처음에는 TV에서 흐르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 찹쌀떡 같은 걸 돌아다니면서 팔까 생각했던 까닭이다. 그런데 TV 화면에는 다른 그림이 흐르고 있다. 그렇다면 이건 정말로 사람의 목소리인 거다. 

다시 한 번 귀를 쫑긋 세워본다. 희미하게 멀어지는 소리, “찹쌀떡 팔아요.” 갑자기 코끝이 시큰해져온다. 거의 동시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건 왜일까. 순간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국민학교, 그러니까 지금으로 치자면 초등학교 5,6학년 때쯤이었을 거다. 그때 우리집은 참 가난했다. 그 덕에 용돈은 고사하고 학비 대기도 빠듯했던 나는 어린애답지 않게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조숙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조숙해야만 했던 그런 아이였다.
 
돈을 벌어야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아이였던 나는 수시로 일거리를 찾고 있었다. 요즘 말로 하면 아르바이트를 찾고 있었던 것. 그때의 나는 매일 돈 버는 궁리에 빠져있었다. 무얼 할까 고민하던 차에 우연히 찹쌀떡을 팔면 어떨까 싶어졌다. 

그 시절엔 늦은 밤 가방에 찹쌀떡이나 메밀묵 따위를 넣고 다니면서 파는 사람들이 곧잘 있었다. 요즘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우리 시절엔 그랬었다. 찹쌀떡을 떼어다가 약간의 이문을 남기고 파는 일, 그건 사실 어린 아이가 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늦은 밤, 다른 아이들이라면 잠자리에 들어야 할 그 시간에 거리를 돌아다니는 일이었으니까.

무섭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 큰 가방을 메고 다닐 만큼의 체력이 따라주지도 않는 일 아닌가. 그러나 난 그런 걸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돈을 벌 수 있다면 찹쌀떡 아니라 돌멩이라도 지고 다닐 수 있던 아이였다. 적어도 난 그랬다.

그렇게 시작한 찹쌀떡 장사. 그래도 어느 정도는 팔릴 거라고 생각했다. 집에 있다가도 구수한 목소리로 외치는 “찹쌀떡 팔아요, 찹쌀떡”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크게 생각이 없다가도 사먹어야겠다 싶어졌던 경험 탓이다.

그러나 그건 오산이었다. 원체도 크지 않은 목소리의 소유자 아닌가.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리면 얼마나 들렸을까. 덕분에 내 찹쌀떡은 싱싱함과는 거리가 먼 제품으로 전락해버렸다. 

운좋게 몇 개 판 날도 없진 않았다. 아직은 애기인 여자아이가 찹쌀떡을 파는 게 신기해서, 혹은 애처로워서 팔아준 몇몇 분들 이외에는 내 목소리에 반응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나날이었다.

사실 팔아서 없앤 것보다 내가 먹어서 없앤 날들이 더 많았다. 그 늦은 시간까지 무거운 가방을 메고 돌아다니다 보면 당연히 허기가 지기 마련 아닌가. 하나만 먹어야지 했던 게 두 개가 되고 세 개가 되던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렇게 내 배는 불릴 수 있었지만 정작 목표로 했던 돈은 못 버는 아르바이트생이 바로 나였다.

처음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괜찮아질 거야 생각했지만 그게 계속 되다 보니 점점 더 불안해졌다. 결국 좀 더 공격적인 전략을 구사해야만 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군부대였다. 집 근처에 군부대들이 있었던 지리적 환경을 활용했던 셈이다. 

그러나 군부대라는 곳이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잖은가. 보초를 서던 군인 아저씨들이 맹랑한 여자 꼬마를 보면서 웃어는 주었지만 그렇다고 제대로 팔아주지는 않았었다. 

하긴 그 시절의 군인이 돈이 있을 턱이 없었다. 요즘에야 월급이라도 나온다지만 그 시절의 군인은 월급이랄 것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나름 머리를 썼던 일이지만 성과는 없었다. 

그리고 나서 찾아간 곳이 바로 동네 면장님이었다. 요즘은 좀 다를지 몰라도 당시 면장은 동네 최고의 유지에 속하는 존재였다. 그런 사람이라면 팔아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분에게 찹쌀떡을 팔아달라고 했을 때 면장 아저씨의 얼굴이 어땠을까.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 놀라움과 황당함, 애처로움과 어이없음 등이 복합적으로 그려지지 않았을까 싶다.

등에 둘러멘 가방보다 그리 크지 않은 여자아이가 찹쌀떡을 팔아달라는데 어느 어른이 안 그랬을까. 아무튼 그럼 복합적인 감정은 판매로 연결되기는 했다. 자신의 집으로 배달하란 말을 들은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팔아준다는 말도 좋았지만 더 좋았던 건 그 양이었다. 아마 내가 팔아본 것 중에서는 한번에 가장 많이 팔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남아있던 떡을 다 사주셨으니 말이다. 절로 콧노래가 흐를 만큼 기뻤다. 부리나케 배달 의뢰를 받은 집으로 찹쌀떡을 들고 갔다. 문제는 거기에서 벌어졌다.

그 집이 내 친구의 집이었던 것. 그때까지 난 내 친구의 아버지가 면장이란 것도 모를 만큼 어리숙했던 모양이다. 막상 친구의 얼굴을 보게 되자 왜 그리 서글펐던지. 그래도 그 앞에서는 내색을 하지 않으려 정말 애를 썼던 게 분명하다.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분명한 건 친구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을 거란 사실이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 정말 많이 울었다. 창피해서였겠지. 워낙 눈물이 많은 사람이긴 하지만 그때만큼 많이 울어본 기억도 흔치 않은 건 분명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참 대견했구나 싶어지지만 그때의 나는 그런 감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생각을 하니 또 눈물이 흐른다. 그때 그 면장집 딸은 지금 뭘 하고 살까. 그 아이는 내게서 찹쌀떡을 샀다는 걸 기억이나 할까. 

“찹쌀떡 팔아요” 소리가 멀어져간다. 갑자기 마음이 다급해진다. 잠옷 위에 가디건 하나 걸치고 밖으로 뛰쳐나가는 나. “아저씨, 찹쌀떡 아저씨. 잠시만이요.”

먹지도 않을 거면서 이 밤에 찹쌀떡을 사러나가는 이유는 뭔지. 그래도 꼭 사야겠다. 근데 제대로 넘어갈지는 모르겠다. 울면서 먹을 게 뻔한 탓이다. 

이수연
-제이앤비컨설팅 대표이사(현)
-한국HR서비스산업협회 부회장(현)
-영등포구청 중소기업 창업지원센터 위원(현)
-호서대학교 벤처전문대학원 경영학 박사
-여성가족부 가족친화우수기업 표창
-고용노동부 남녀고용평등 우수기업 표창
-제45회 상공의 날 모범 상공인 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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