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범석 칼럼] 일본의 정치인들⑥ - 일본정치의 전설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栄)」
[장범석 칼럼] 일본의 정치인들⑥ - 일본정치의 전설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栄)」
  • 편집국
  • 승인 2019.10.24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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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소학교(초등학교) 학력으로 대장성(大蔵省) 대신, 전무후무한 기록
10년 후 통상산업대신을 거쳐 전후 최연소 총리 취임
1970~1980년대를 풍미한 희대의 정치천재
‘100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한 불세출의 인물’
별명이 ‘컴퓨터 달린 불도저’
‘일본열도개조론’으로 현대 일본의 기초마련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栄)」 (위키피디아제팬 캡처)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栄)」 (위키피디아제팬 캡처)

1962년 7월 이케다(池田)내각에서 다나카가 대장성(大蔵省) 대신으로 발탁되었다. 당시 재무성은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기관으로 고대 율령국가 때부터 천년 넘게 같은 이름으로 존속해 온 부처였다. 관료들 자부심 또한 그 어느 조직보다 높았다. 이러한 유서 깊은 곳에 변방 니가타(新潟) 출신의 44세 젊은 중의원이 수장으로 취임했다. 게다가 그의 학력은 시골 소학교(초등학교)졸업이었다. 1890년 의회제도가 도입된 이래 이러한 인물이 대신으로 등장한 것은 전무후무한 기록이었다. 그는 취임식장에 도열한 관료들에게 말했다.

“제가 다나카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소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여러분은 전국에서 모인 수재들로 금융과 재정의 전문가입니다. 저는 초심자지만 가시밭길을 헤쳐 나오며 업무의 핵심이라는 것을 조금 압니다. (이하 발췌) 이제부터 대신 집무실 문은 언제든지 열려 있을 겁니다. 자신 있는 사람은 누구나 제 방으로 오십시오. 그리고 무엇이든 얘기해 주십시오. 할 수 있는 것은 하고, 할 수 없는 것은 안 합니다. 그러나 모든 책임은 이 다나카가 집니다. 이상!” 그의 솔직하고 박력 넘치는 취임사에 좌중은 압도되었고, 승부는 그것으로 끝났다. 그로부터 10년 후 다나카는 통상산업대신을 거쳐 전후 최연소 총리가 된다.

1970~1980년대를 풍미한 희대의 정치천재 다나카 카쿠에이. 언론은 그를 ‘어둠의 재상(闇将軍)’이라 칭하고, 어떤 이는 금권으로 정치를 농락한 정상배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30년 의정기간 중 117개나 되는 법안을 성립시켰다. 그 대부분은 지방분권 등 서민 생활수준향상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진정으로 국민을 위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나카 기념관에서는 그를 ‘100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한 불세출의 인물’로 묘사한다.

그는 고등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비상한 기억력과 두뇌의 소유자였다. 과감하고 기상천외한 돌파력도 장점이었다. 그래서 관료시절 따라다닌 별명이 ‘컴퓨터 달린 불도저’였다. 다나카가 대장성 대신으로 있을 때 일이다. 그가 신임관료들과 첫 대면하는 자리에서 한 사람씩 호명하며 환영인사를 했다. 모두 설마 하는 가운데 20명 전원의 이름이 정확히 불렸다. 천하의 수재들도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다나카는 1972년 7월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일본열도개조론’을 내세워 현직총리가 미는 후보를 누르고 당선된다. 다나카내각 출범당시 지지율이 70%였으니 국민들 기대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일본열도개조론은 전국을 고속도로·신간선·세토대교 등 고속교통망으로 연결해 지역을 활성화시킴과 동시, 인구 과밀과 과소 문제를 해결하자는 구상이었다. 정책시행 과정에서 개발지 땅값이 폭등하는 등 부작용도 있었지만 일본의 미래를 바꾼 획기적 발상이었다. 아직도 공사가 진행 중인 규슈신칸센(九州新幹線)의 나가사키 루트도 이때 결정된 신칸센 정비계획의 하나다.

그는 총리재임 2년 5개월이라는 길지 않은 기간을 통해 외교 분야에도 큰 족적을 남긴다. 중국과 국교정상화, 브라질 농업개발프로젝트, 소련과 시베리아개발과 북방영토 이슈화, 김대중 납치사건 때 한국정부 입장을 수용한 것 등이 대표적이다.

다나카는 1974년 12월 패밀리 기업의 부정축재 문제가 터지며 총리직에서 물러난다. 그로부터 1년 여 후인 1976년 2월, 이번에는 미 상원에서 폭로된 록히드항공 리베이트 사건으로 비서와 함께 구속되는 불운을 당한다. 6개월 만에 보석으로 풀려난 그는 ‘숫자가 힘’ ‘힘은 돈’이라는 신념으로 다나카파 세력을 불려 나간다. 무소속 신분으로 자민당 접수에 나선 것이다. 막대한 자금이 동원되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파벌 숫자는 곧 140명을 넘었다. 후일 총리가 되는 다케시타·하타·하시모토·오부치도 이 조직에 속해 있었다. 언론에서는 파벌의 압도적 규모와 화려한 멤버를 두고 ‘다나카군단’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다나카의 막후정치가 시작된다. 1978년 오히라내각, 1980년 스즈키내각, 1982년 나카소네 내각이 다나카의 지지를 업고 탄생했다. 이 중 나카소네 내각은 ‘다나카소네’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5년간 장수한다. 다나카는 자타가 공인하는 킹메이커가 되었다. 다만 자파소속 의원이 총재선거에 출마하는 것은 철저하게 막았다. 자신이 록히드 재판에서 무죄판결을 받아 다시 총리에 복귀하려는 일념 때문이었다. 하지만 1985년 불의의 뇌경색으로 쓰러지며 그는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한다.

이후 1987년 파벌의 중진이었던 타케시타가 새로운 파벌을 만들어 총재에 당선됨으로 다나카파는 와해의 길로 들어선다. 언어와 행동이 부자유했던 다나카는 1989년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고, 1990년 중의원이 해산되자 정계를 은퇴한다. 그리고 1993년 12월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작년 다나카 탄생 100주년을 맞아 다나카를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대체적으로 금권이나 파벌정치의 어두운 면보다 그의 친서민적 정책과 대인배다운 언행에 초점이 맞춰지는 분위기다. 그가 남긴 어록과 일화도 새삼 화제가 되고 있다. 그 중 몇 가지를 추려본다.

“나의 목표는 노인과 손자가 함께 재미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인간은 미완성이다. 모두 실패도 한다. 문제는 그 부족한 인간 그대로를 사랑할 수 있느냐 없느냐다. 정치를 하려는 자는 먼저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나카가 돈을 건넬 때는 상대가 뇌물로 생각하지 않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없도록 세심하게 배려했다. 상대가 정치가인 경우에는 “자금이야 있으시겠지만, 부디 제 것도 받아 주십시오” “당을 위해, 나라를 위해 당신이 당선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손아래 관료에게는 “이 정도 돈으로 움직일 자네가 아니겠지? 내 성의네” “나 역시 어떤 담보를 요구할 만큼 어리석은 남자는 아니네”하는 식이었다. 일면식이 거의 없는 타파 의원이 찾아와 돈을 부탁했을 때도 다나카는 선뜻 자금을 마련해 주었다. 그가 원하는 금액보다 더 많게. 이유는 필요한 금액을 제대로 말하지 못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 마디 건넨다. “곤란할 때가 있는 건 피차일반. 돈은 돌려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대신 내가 곤란할 때 잘 부탁합니다”

-1945년 2월 다나카는 조선으로 건너간다. 거래처 공장을 대전에 이설하기 위해서였다. 공장이 거의 완성될 무렵 소련이 전쟁에 참여하며 상황이 급변한다. 이 때 다나카는 주저 없이 조선에 있는 모든 자산의 목록을 만들어 ‘신생국 조선에 기부한다’며 현지직원에게 건넸다. 그의 나이 27세, 천황의 항복방송이 있기 전이었다. 이런 다나카를 누가 미워할 수 있겠는가?
 
장범석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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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통역안내사
-백만인취업센터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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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온 2021-06-04 15:39:10
록히드 사건으로 유죄판결까지 받았는데요. 다나카 가쿠에이가 한 금전에 대한 얘기는 죄다 개소리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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