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범석 칼럼] 일본의 정치인들 - ⑧최장수 총리 아베 신조(安部晋三)
[장범석 칼럼] 일본의 정치인들 - ⑧최장수 총리 아베 신조(安部晋三)
  • 편집국
  • 승인 2019.11.14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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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내각제 도입된 후 헌정사상 최장수 총리
한일협정의 막후 조정자 ‘기시 노부스케’가 외할아버지
2015년 위안부협정 체결 후 강경 자세로 전환
양국에 역지사지 지혜가 필요할 때
아베 신조(安部晋三)」총리, 2012년촬영 (위키피디아제팬 캡처)
아베 신조(安部晋三)」총리, 2012년촬영 (위키피디아제팬 캡처)

 2006년 9월 20일 고이즈미내각 관방장관이었던 아베는 헌법 개정과 구조개혁 승계를 내걸고 자민당 총재가 된다. 이어 개최된 임시국회에서 90대 총리에 지명된 그는 ‘아름다운 나라’를 국가상으로 제시했다. 그의 나이 54세로 전후(1945년 이후) 최연소였다. 총리에 취임한 아베는 곧 야스쿠니 참배문제로 관계가 험악했던 중국과 한국을 방문해 정상화 의지를 표명했다. 국내적으로는 방위청의 방위성 승격, 교육기본법 개정 등 정치현안을 신속히 처리했다.

그러나 아베내각은 연이어 터진 각료 스캔들, 참의원 선거 패배, 건강악화 등 악재가 겹치며  1년 만에 막을 내린다. 그리고 5년의 절치부심 끝에 2012년 9월 다시 총재에 도전해 라이벌 이시바와 2차 투표까지 가는 격전을 치루고 재선에 성공한다. 그해 12월 중의원선거에서 민주당에 대승을 거두고 정권을 찾아온다. 그 당시 일본에는 국내외적 난제가 산적해 있었다. 2011년 3월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의 복구에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고, 환율이 치솟아 자동차나 전기 등 일본을 대표하는 제조업이 경쟁력을 잃고 있었다. 특단의 경기부양이 요구되는 시점이었다.

2차 내각을 구성한 아베는 주저함 없이 대담한 경기부양 정책을 도입했다. 소위 ‘3개의 화살’이라는 금융완화, 재정확대, 민간투자가 그것이다. 이를 ‘아베노믹스’라고 부르는데, 이 말이 2013년 유행어 톱10 부문상을 수상한다. 딱딱한 경제용어가 유행어로 선정될 만큼 당시 일본 경제가 어려웠다는 반증이다. 이후 일본경제는 정국안정과 엔저효과로 수출이 증가하고 고용이 늘어나는 등 호황을 구가하고 있다. 아베가 장기집권을 하고 있는 배경이다.

98대 총리 아베는 11월 20일이 지나면 역대 최장수 총리 기록을 세우게 된다. 1885년 일본에 내각제가 도입된 이래 62명의 총리가 배출되었고 그들의 평균 재직기간은 2년 정도였다. 이에 비해 아베는 곧 만 8년을 넘긴다. 그의 총재 임기가 2021년 9월이므로 당분간 기록갱신은 지속될 것이다. 참고로 일본내각의 초대 총리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히로부미(伊藤博文)이고, 그동안 최장수는 1900년대 초 가츠라(桂)총리의 2,886일(약7.9년)이었다.

아베는 1954년 도쿄 신주쿠에서 아베 신타로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도쿄도 무사시노시에 소재한 세이케이(成蹊)학원의 초·중·고를 거쳐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세이케이대학은 한국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고려대학과 이화여대과 유학협정을 맺고 있는 사립명문이다. 아베는 대학졸업 후 미국 남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단기유학을 마치고 고베제강에 입사해 뉴욕사무소 등에서 수년간 근무한다.

1982년부터 외무대신이었던 아버지의 비서관으로 근무하던 중 부친이 사망하자 야마구치(山口)현 지역구를 승계 받아 1993년 첫 중의원에 당선된다. 정치명문가의 후예로는 비교적 늦은 정계데뷔였다. 하지만 이후 아베의 행보는 화려하다. 2000년 고이즈미의 추천으로 모리내각에서 내각관방 부장관이 되고, 2003년 자민당 간사장에 오른다. 각료나 당 요직을 경험하지 않고 간사장으로 발탁되는 것은 매우 이례적 일로 당시 언론에서는 아베의 발탁을 고이즈미총리의 ‘서프라이즈 인사’라고 불렀다. 2005년 10월 개각 때 내각관방장관으로 입각한 아베는 이듬해 총재선거를 거쳐 총리가 된다. 정치입문 13년 만의 일이었다.
이러한 아베의 초고속 출세 뒤에는 청화정책연구회(약칭:세이와렌, 통칭:호소다파)가 있다. 세이와렌(淸和硏)은 1955년 자민당결성의 주역이자 1957~1960년 총리를 지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의 계보를 잇는 자민당 제1파벌이다. 기시는 아베의 외할아버지다. 1980년대 외무대신을 4대나 역임한 아버지 아베 신타로도 이 파벌의 회장을 지냈다.

여기에서 잠시 일본의 현대정치사에 큰 족적을 남긴 기시에 대해 알아본다. 기시는 정치력이 출중하고 심지가 굳은 인물이었다. 태평양전쟁 당시 도죠(東條)내각의 상공대신이었던 기시는 전쟁말기 내각의 갖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줄기차게 강화를 요구한다. 종전 후 A급 전범으로 기소되지만 이러한 정황이 참작되어 3년 만에 무죄방면 된다. 1957~1960년 총리를 역임한 그는 퇴직 후에도 폭넓은 인맥을 통해 현역 때 못지않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1965년 체결된 한일협정 막후에 그가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기시는 한국 박정희 대통령과 일본제국주의 말기 만주에서 각각 고위관료와 일본군 장교로 근무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한일협정 당시 총리였던 사토 에이사쿠(佐藤栄作)가 기시의 친동생이라는 점이다. 원래 사토가문에서 태어난 기시였지만 17세 때 기시가문의 양자로 들어가 성이 바뀐 것이다. 사토역시 기시 못지않게 정치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이다. 7년이 넘는 집권을 통해 일본의 고도성장기를 이끌었고, 비핵화 3원칙을 제창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현재 자민당 제3의 파벌인 다케시다파가 사토의 계보를 이어가고 있다. 아베의 막강한 정치자산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2015년 3월 헤이그에 한미일 정상이 마주 앉았다. 미국이 위안부와 독도영유권 문제 등으로 꼬여있는 양국관계를 정상화시키려 주선한 자리였다. 회담 시작에 앞서 오바마대통령을 사이에 둔 아베총리가 박대통령에게 서툰 한국어로 "만나 반갑다"는 인사를 했다. 그러나 박대통령은 아베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양국관계가 얼마나 냉랭했는지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결국 위안부문제는 그해 12월 밀실협상이라는 비판 속에 ‘불가역’이라는 희한한 조건을 달고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듬해인 2016년에는 GSOMIA(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도 체결되었다.
일본의 요청에 의한 미국의 영향력이 작용한 결과였다.

어쩌면 지금 한국과 일본은 세계안보를 앞세운 미국의 비즈니스전략에 놀아나고 있는지 모른다. 최근 징용공보상문제가 불거지며 일본은 수출규제, 한국은 GSOMIA종료를 선언했다. 결코 양국에 유익할 것이 없는 하책들이다. 지금이라도 양국 정상은 역지사지의 지혜를 발휘해 공동의 이익을 추구할 때다.

 

 

장범석 칼럼니스트
장범석 칼럼니스트

[장범석]
-칼럼니스트
-일본어통역안내사
-백만인취업센터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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