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범석 칼럼] 일본의 정치인들 - ⑨중의원 17선의 오자와 이치로(小沢一郎)
[장범석 칼럼] 일본의 정치인들 - ⑨중의원 17선의 오자와 이치로(小沢一郎)
  • 편집국
  • 승인 2019.11.28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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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의원 17선, 헌정사상 6번째 명예의원
1993년 야당연립정권, 2009년 민주당정권의 산파역
정권교체를 위한 야당 단일화 주장
한국인 비서등용, 국민대학교에서 명예정치학박사 받은 지한파
오자와 이치로(小沢一郎) ‘생활을 지킨다’ 공식사이트 캡처
오자와 이치로(小沢一郎) ‘생활을 지킨다’ 공식사이트 캡처

 국민민주당 오자와는 중의원과 참의원을 통틀어 현역의원 중 최다선이다. 1969년 이와테(岩手)현 2구에서 첫 당선된 이래 연속 19선을 기록하고 있다. 부친도 같은 지역구에서 10선을 했다. 선출직이 이처럼 장기 세습하는 경우는 공산권을 제외하면 유례를 찾기 어렵다. 오자와는 의정생활 50년이 되는 2019년 12월 28일, 일본 헌정사상 6번째 명예의원이 된다.

오자와는 1942년 변호사이자 도쿄도의회 의원이었던 사에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향 이와테현 미즈사와에서 초등학교를 마친 후 중학교 때 도쿄로 올라와 게이오의숙대 경제학과를 나온다. 니혼(日本)대 대학원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중 부친이 사망하자 27세에 정계에 뛰어든다.

오자와의 정치 원점은 1970~1980년대 일본정치를 쥐락펴락한 다나카(田中) 전 총리다. 오자와가 중의원에 출마했을 때 다나카가 선거를 지휘하는 간사장으로 인연을 맺었다. 다나카는 어려서 세상을 떠난 아들과 나이가 같은 오자와를 특별히 아꼈다. 그에게 정치 ABC를 가르쳐 ‘다나카 비장의 카드’로 키워냈고, 부부의 연을 맺어주었다. 오자와는 다나카를 ‘정치의 아버지’로 여기고 있다.

오자와의 별명은 ‘파괴자’다. 1993년 자민당을 탈당한 후, ‘구태정치 타파’와 ‘양당제’를 명분으로 수많은 당을 만들고 해체했다. 가장 최근인 지난 4월에는 자신이 당수로 있던 <자유당>을 <국민민주당>에 통합시키며 10번째 당적을 변경했다. 그가 만든 당 중에는 <국민의 생활이 제일>이나 <생활의 당과 야마모토 타로 동료들>처럼 이색적 이름의 정당도 있다. 그는 현재 국민민주당에서 종합선대본부장상담역을 맡고 있다. 다른 정당에는 없는 독특한 직책이다. 오자와의 정치궤적을 살피면 일본의 정치가 보인다. 그의 50년 역정을 간략히 정리한다.

오자와는 4선 시절인 1981년 <자민당> 정조부회장을 시작으로 1983년 의원운영위원장, 1985년 자치대신 겸 국가공안위원장, 1989년 간사장 등 당정의 요직을 두루 거친다. 특히 1990년 중의원선거 때 자민당을 뒤흔든 리쿠르트 사건으로 고전할 거라는 예상을 깨고 과반수를 훌쩍 넘기며 입지를 굳건히 한다.

1991년 자민당 최대파벌인 다케시타파의 회장대리로 조직을 이끌던 중, 후원자였던 가네마루가 뇌물사건으로 정계를 떠난다. 후임회장 자리를 놓고 자신이 지원한 후보가 오부치에게 패배하자 오자와는 개혁포럼21(하타파)을 결성해 다케시타파와 갈라선다. 1991년 들어선 미야자와 내각과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던 오자와는 1993년 6월 야당이 제출한 내각불심임안에 찬성표를 던지고 하타파와 함께 탈당한다.

이 무렵 오자와는 ‘일본개조계획’을 출판하는데, 이 책자가 일본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딱딱한 정치서적이 70만부나 팔리며, 1993년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책의 내용은 소선거구제에 의한 양당제, 규제철폐, 정치개혁 등 그의 소신을 국민에게 직접 물어보는 형식이었다. 민심의 소재를 확인한 오자와는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갔다.

자민당을 나온 오자와는 1993년 <신생당>을 창당하고 대표간사에 취임한다. 그리고 7월에 치러진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과반수 확보에 실패하자, 야당을 규합해 연립내각을 구성한다. 1955년 이후 독주해온 자민당 체제를 오자와 일개인이 무너뜨린 것이다. 오자와는 한편으로 ‘연립여당대표자회의’를 결성해 정국을 주도해 나간다. 그러나 기대를 모았던 호소가와내각이 주도권 싸움으로 8개월 만에 물러나고, 이어 등장한 하타내각도 2개월 단명으로 끝난다. 오자와가 차기 내각을 구상하던 중, 일본사회당이 독자적으로 자민당과 연합해 무라야마 정권을 탄생시킨다.

정권을 창출한 후 1년이 지나지 않아 야당으로 전락한 오자와는 1994년 공산당을 제외한 나머지 정당을 합쳐 <신진당>을 만들고 간사장에 취임한다. 신진당은 1995년 참의원과 1996년 중의원 선거에서 선전하지만, 공명당이 독자노선을 선언함으로 1997년 12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오자와는 1998년 1월 자신을 따르는 ‘오자와 그룹’ 54명과 함께 <자유당 ※첫 번째>을 창당하고 당수에 취임한다. 1년 후 자민당과 연립정권을 구성해 여권에 복귀한다. 그러나 공명당이 추가로 연립내각에 참여하고 복당이 이루어지지 않자 2000년 4월 연립을 해소하고 야당으로 되돌아간다. 이 때 탈당에 반대하는 잔류파가 나와 자유당은 당세가 위축된다.

2003년 9월 오자와는 자유당을 야권 제1당인 <민주당>에 합당하고 백의종군한다. 우여곡절 끝에 2006년 민주당대표로 선출된 오자와는 2007년 지방선거와 참의원선거를 승리로 이끈다. 그 여세를 몰아 9월 참의원에서 총리에 지명되지만, 총리자리는 중의원을 장악한 자민당 후쿠다에게 돌아간다. 2009년은 민주당이 중의원선거에서 대승을 거두고 정권을 인수한 뜻 깊은 해였다.

하지만 운명의 신은 오자와를 비켜갔다. 선거 3개월 전 비서가 정치자금 의혹혐의로 체포되자 대표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신임대표가 된 하토야마는 그에게 선거담당 대표대행을 요청했고, 오자와는 전체의석의 64%를 차지하는 압승으로 보답했다. 이후 오자와는 정치자금의혹이 불거져 당원권이 정지되고, 동일본대지진과 소비세 문제로 내각과 마찰을 빚으며 2012년 7월 민주당을 나온다.

이번에도 오자와는 지체 없이 당을 만들어 <국민생활이 제일>이라고 명명한다. 그러나 이때부터 오자와의 마법이 한계를 드러낸다. 그동안 오자와의 의중에 따라 행동을 함께하던 지역의원과 후원단체들이 이탈하기 시작한 것이다. 2012년 12월 중의원선거는 오자와에게 악몽이었다. 선거 직전 <일본미래당>과 합당을 통해 61석으로 몸집을 키우지만, 선거에서 살아남은 건 겨우 9석뿐이었다. 후쿠시마사고와 경기침체로 자민당에 쏠린 민심이 오자와에게도 책임을 물은 결과였다.

2013년 오자와는 <생활의 당>으로 이름을 바꾸어 참의원 선거에 임하지만 공천자 전원이 낙선하고, 2014년 중의원 선거에서도 자신을 포함한 2명만 살아남는다. 자칫 정당등록이 취소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무소속의 야마모토 타로가 입당해 위기를 넘긴다. 정당이름을 <생활의 당과 야마모토 타로와 동료들>로 변경한 이유다. 이 당명은 2016년 10월 <자유당 ※두 번째>으로 바뀐다.

오자와는 누구보다 한국과 접점이 많은 인물이다. 일본정치가 중 처음으로 한국인 비서를 등용해 통역 등 국제 업무를 맡긴다. 이 비서는 2000년부터 2008년까지 재직 중 도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퇴직 후 동북대학 부교수로 재직한 김수현씨다. 그는 일본의 각료급 정치인으로는 유일하게 한국의 독립운동가 김구선생, 윤봉길의사, 이봉창의사. 백정기의사 묘소에 참배했다. 2014년 국민대학교에서 명예정치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1월 18일자 아사히신문 디지털 RONZA는, 오자와가 아이치현 안죠(安城)시의 당원 모임에서 “새해 초 중의원해산과 총선거설이 흘러나오는 요즘, 자민당을 대신해 정권을 감당할 그릇이 필요하다”며 “야당결집이 급선무”라는 견해를 나타냈다고 근황을 보도했다.

장범석 칼럼니스트
장범석 칼럼니스트

[장범석]
-칼럼니스트
-일본어통역안내사
-백만인취업센터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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