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길의 CEO칼럼] 능(陵)·원(園)·묘(墓)·총(塚)·분(墳)
[전대길의 CEO칼럼] 능(陵)·원(園)·묘(墓)·총(塚)·분(墳)
  • 편집국
  • 승인 2020.09.09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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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대   길
(주)동양EMS 대표이사, 수필가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우리 선조는 거처하는 사람의 신분과 집의 규모에 따라 궁궐(宮闕)부터 시작해서 작은 정자까지 건물 크기별로 8등급으로 나누어 ‘전당합각제헌루정(殿堂閤閣齋軒樓亭)’으로 구분했다. 

예를 들어 경복궁 정전(正殿)인 근정전(勤政殿)은 임금(王)이 신하들과 조회하며 나랏일을 논하던 집무실(執務室)이 있는 가장 큰 건물이다. 신하들이 왕에게 고(告)하는 “전하(殿下)~!”는 ‘근정전(勤政殿) 아래에서 임금께 고(告)한다’는 존칭어 외침이다. 

T.V 역사극에서 자주 나오는 ‘폐하(陛下/Majesty)’란 말은 한자를 그대로 풀이하면 '섬돌(陛) 아래'란 뜻이다. 궁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전(大殿)으로 오르는 층계 아래를 가리킨다. 어원을 따지자면 ‘폐하(陛下)’란 말은 황제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층계 아래에 서서 신하가 “제 말씀을 들어 주십시오!”라고 왕에게 아뢰는 외침이다. 

그러나 계속 쓰이다 보니 이것이 황제나 황후를 가리키는 일종의 존칭으로 명사화한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도 대통령에게 ’집 각(閣)+아래 하(下)‘자의 ’각하(閣下)‘라고 불렀는데 같은 맥락이다. 

대원군 이 하응에게 “합하(閤下)~!”라는 외침은 정일품 벼슬아치를 부름이다. 여기에서 ‘합문 합((閤)’은 ‘궁궐의 쪽 문’, ‘집 각(閣)’은 ‘궁궐의 문설주’를 가리킨다. 경치가 좋은 곳의 놀거나 쉬는 ‘정자(亭子)’는 가장 작은 크기의 건물이다. 

지난 7월8일 발표한 <경주 서봉총과 웁살라 고분>이란 Daegila칼럼을 본 독자들이 “왜 무덤마다 부르는 이름이 각기 다르냐?”며 물어 왔다. 그래서 좀 더 조사해 보았다. 

우리 선조들은 죽은 사람(死者)의 무덤을 ‘능(陵)·원(園)·묘(墓)·총(塚)·분(墳)’등 5가지로 구별했음을 알았다. 

‘살필 성(省)+무덤 묘(墓)’자의 ‘성묘(省墓)’란 말 그대로 ‘조상의 무덤을 살핀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조상님 산소에 ‘무덤 묘(墓)’자를 쓰는가? 이밖에 천마총, 무용총, 무령왕릉 등 무덤마다 부르는 이름이 다른 이유가 무엇일까? 

‘무덤 능(陵)’은 ‘왕과 왕비(후비)의 무덤’이다. 그 예로 ‘영릉(英陵)’은 세종대왕과 소헌 왕후 심씨의 무덤이다. 경기도 화성시의 ‘융릉’은 장조(사도세자)와 헌경왕후(혜경궁 洪씨)의 무덤이다. ‘건릉’은 정조와 효의선 왕후(金씨)의 합장 무덤이다. 융릉과 건릉을 합쳐 ‘융건릉’이라고 부른다. 

서울 성북구 ‘정능(貞陵)’은 이 방번, 이 방석 두 왕자와 경순공주를 낳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정비, 신덕왕후 무덤이다. 경기도 구리시의 59만평 넓이의 ‘동구릉(東九陵)’은 조선 왕조 7명의 왕과 10명의 왕비와 후비의 무덤이다. 

서울 강남구 ‘선정릉(宣靖陵)’은 조선 9대왕인 성종과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尹氏)의 무덤인 선릉(宣陵)과 두 사람의 아들인 중종의 무덤인 정릉(靖陵)을 말한다. 1970년 선정릉은 사적 199호로 지정되었다. 지하철 분당선 선릉역(宣陵驛)과 선정릉역(宣靖陵驛) 이름도 선정릉에서 따왔다.              

선릉
선릉

서울 은평구의 ‘서오릉(西五陵)은 ‘경릉(敬陵), 창릉(昌陵), 익릉(翼陵), 명릉(明陵), 홍릉(弘陵)’ 등 5개의 능(陵)을 일컫는다. 성종의 요절한 아들, 의경세자인 덕종과 소혜왕후의 무덤이 경릉(敬陵)이다. 

조선 8대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韓氏)의 무덤이 창릉(昌陵)이며 숙종의 원비인 인경왕후(金氏)의 무덤이 익릉(翼陵)이다. 조선 19대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와 계비 인원왕후의 무덤이 명릉(明陵)이다. 그런데 장 희빈의 무덤인 대빈묘도 서오릉 내부에 있다.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徐氏)의 무덤이 홍릉(弘陵)이다. 

서울 서초구의 헌릉(獻陵)은 조선 3대 태종과 원경왕후(민씨)의 무덤이다. 경기 화성시의 건릉(健陵)은 조선 22대 정조와 효의왕후(金氏)의 합장묘이다. 

충남 공주에 있는 백제 25대 무령왕릉은 무덤 지석에 ‘백제 사미왕, 즉 무영왕’이라고 적혀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시대를 통틀어 왕의 이름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무덤이다. 위처럼 피장인(被葬人)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알 수 있기에 왕과 왕후의 무덤에 능(陵)자를 붙인다. 

‘동산 원(園)’자의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친척 무덤’이다. 

‘피장인(被葬人)’이 누구인지 알려진 일반인의 무덤은 ‘묘(墓)’이다. 
왕이었지만 왕 대접을 못 받은 ‘연산군묘’와 ‘광해군묘’는 능(陵)이 아니라 묘(墓)이다.  

‘무덤 총(塚)’과 ‘무덤 분(墳)’자는 피장자를 알 수 없는 옛날 무덤을 말한다. 
중국 길림성 집안시의 고구려 돌무덤인 장군총(將軍冢)과 경주 황남동의 천마총(天馬冢)은 왕릉(王陵)으로 추정되지만 무덤의 피장자를 알 수가 없어 ‘00陵’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것이다.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지만 특징적인 무덤에 벽화, 금관, 호우 등이 있을 경우 ‘00총(塚)’, ‘00(墳)’으로 부른다. 

한 왕조를 이끈 왕과 왕비의 무덤이 고스란히 보존, 한꺼번에 관리되는 경우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조선 왕릉이 유일하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와 문화, 가치관을 담고 있는 ‘조선 왕릉’은 우리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문화유산이며 조선(1392~1897)과 대한제국(1897~1910)의 역대 왕(황제)과 왕비(皇后)가 묻힌 능(陵)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2009년 6월 27일 스페인 세비야에서 개최된 제33차 세계유산위원회를 통해 조선왕릉(40기)이 UNESCO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그리고 북한에 있는  2기(제릉, 후릉)와 임금에서 폐위되어 왕자의 묘가 된 연산군묘와 광해군묘는  여기에서 빠졌다. 조선 왕릉은 주로 한양 인근인 경기도에 주로 밀집해 있다.
 
그 이유는 조선의 국법인 경국대전에서 ‘능역은 도성에서 10리(약4km) 이상, 100리(40km) 이내의 구역에 만들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와 백제의 굴식 돌방무덤은 입구를 찾기 쉽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도굴이 쉬워서 대부분 도굴되었다. 고려시대 무덤들도 도굴 방지 장치가 없어서  일제강점기 때 고려청자를 발굴하려는 일본인들의 도굴로 많이 도굴되었다.

서울 노원구 화랑로에 있는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을 위한 체력단련장(골프장) 넓은 터에 머잖아 새로운 아파트 대단지를 지으려는 움직임이 있다. 사적 제201호인 ‘태릉(泰陵)’은 조선 11대 중종의 두 번째 계비 문정왕후(尹氏)의 무덤이다. 

가까운 능(陵)골에는 조선13대 명종과 인순왕후(심씨)의 무덤인 ‘강릉(康陵)’도 있다. 태릉선수촌 터는 능제(陵祭)를 준비하던 묘동마을 자리이다. 

왕의 장례나 제사에 쓰이는 궁중 요리법이 태릉을 통해서 민간에 전래되었다. 왕릉 인근에 살면서 귀한 고기 맛을 본 사람들이 알음알음 갈비요리법을 익혀서 ‘태릉갈비’가 탄생한 것이다. 

1970년대 태릉 먹골(묵동)에는 배나무 밭이 많았다. 하얀 배꽃(梨花)이 만발한 이곳으로 꽃놀이 꾼들이 몰려들었다. 배 밭에 앉아서 배를 갈아 넣은 돼지갈비를 구워먹는 게 크게 유행했다. 그 후 도시개발에 밀려 불암동과 남양주 별내 쪽으로 태릉 갈비집들이 하나 둘씩 옮겨갔는데 지금은 태릉에서 돼지 갈비집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조선 26대 고종과 명성왕후(민씨)를 합장한 경기 남양주의 ‘홍릉(洪陵)’인근에서도 ‘홍릉갈비’가 나왔다. 경자년 한가위를 맞아 조상 산소를 벌초하려고 후손들이 고향을 찾는다. 

우리 조상의 무덤 이름이 ‘능(陵)·원(園)·묘(墓)·총(塚)·분(墳)’으로 구별된다.  

전   대   길
(주)동양EMS 대표이사, 수필가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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