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길의 CEO칼럼] 조자룡과 제갈공명 후손 
[전대길의 CEO칼럼] 조자룡과 제갈공명 후손 
  • 편집국
  • 승인 2020.10.14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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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대   길(주)동양EMS 대표이사, 수필가/국제PEN한국본부 이사  
전   대   길
(주)동양EMS 대표이사, 수필가/국제PEN한국본부 이사  

한중국교수립 9년전인 1983년 5월 5일, 서울거리에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렸다. 승무원 9명을 포함한 승객 105명이 탄 중국 민항기가 선양에서 상하이로 가던 중 납치범들에 의해 공중에서 피랍돼 춘천 캠프페이지에 불시착했다. 

자칫 잘못하면 국가 간 외교 문제가 불거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중국 민항기가 불시착하자 조중훈 회장이 춘천으로 향했다. 당시 한중 대표단은 협상은 시작했지만 서로 외교적인 대화를 나눈 적 없어 서명자의 직위와 자격 문제 등을 놓고 신경전을 벌였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던 조중훈 회장은 양국 대표단과 피랍기 승무원들을 호텔로 초청, 오찬장에서 건배를 제의하며 ‘삼국지’ 이야기를 꺼냈다. 

“저는 기업을 경영해서 돈을 버는 사람입니다. 나라와 경제에 보탬이 된다면 언제든지 온 몸을 바쳐 일하는 조자룡 같은 사람이지요. 여기에 계신 한국 대표단장인 공로명 외무부장관(수석대표)은 제갈공명 같은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제는 조자룡이 책임지고, 국가 간의 외교는 제갈공명이 적격이지요. 제갈공명과 조자룡이 머리를 맞대면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어디 있겠습니까?”라고 건배사를 했다. 

조자룡과 조중훈, 제갈공명과 공노명을 연결시키면서 한중 협상대표들을 치켜세웠다. 미묘한 긴장감에 휩싸여 있던 오찬장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다음날, 양측 대표단은 피랍기 승객들과 승무원 송환에 관한 합의각서를 교환하는데 성공했다. 

[1983년 中 민항기 불시착. 1983년 5월 5일 중국민항 소속 트라이던트 비행기가 강원 춘천 미군기지에 불시착한 뒤 활주로를 벗어나 멈춰서 있다. 공중 납치된 이 비행기와 승객의 송환을 위해 한국과 중국은 첫 당국 간 협상을 시작했고 상호 만족스러운 합의에 이르렀다.]
[1983년 中 민항기 불시착. 1983년 5월 5일 중국민항 소속 트라이던트 비행기가 강원 춘천 미군기지에 불시착한 뒤 활주로를 벗어나 멈춰서 있다. 공중 납치된 이 비행기와 승객의 송환을 위해 한국과 중국은 첫 당국 간 협상을 시작했고 상호 만족스러운 합의에 이르렀다.]

조중훈 회장은 중국 대표단이 떠난 후에도 불시착한 민항기의 랜딩 기어와 엔진을 꼼꼼하게 점검하고 비행기 부품을 신품으로 교체해주는 등 항공정비에도 성의를 다해 돌봐 주었다. 

그 후 피랍기 송환 과정에서 맺은 인연을 계기로 1989년 중국 정부로부터 대한항공 국적기의 전세기 운항과 베이징과 톈진, 선양에 정기 항공 노선을 허가받아 취항했다. 조중훈 회장의 각고의 노력 끝에 이루어진 것이다. 

어떤 불특정 사고나 사건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지만 우연히 일어난 사건을 전화위복(轉禍爲福)의 전기(轉機)로 삼았던 최고경영자가 故,조중훈 대한항공 회장이다. 

조중훈 회장은 “사업은 예술이다(Business is Art)"란 경영철학으로 KAL, 한진, 한진해운, 한진중공업, 한국공항, 인하학원, 정석학원, 제주 제동목장, 정석기업 등으로 이루어진 한진그룹을 경영했다. 

“하늘로, 육지로, 푸른 바다”를 향한 <KAL-MAN, 한진 MAN>이 지녀야 할 <창의와 신념>, <성의와 실천>, <책임과 봉사>란 경영이념을 제시했다. 

1997년 필자가 기획했던 경영자 세미나인 경총 최고경영자연찬회(신라호텔 다이너스티 홀)에서 조중훈 회장은 전국 400여 명 CEO에게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외부특강을 했다. 

K상무를 통해서 강연료를 드렸더니 “경총 세미나를 준비한 담당자들이 한번 식사나 하라”면서 돌려보냈다. 이에 세미나를 총괄 진행했던 필자의 사비를 보태서 “사업은 예술이다”란 근사한 기념패를 은(銀)접시에 칠보로 만들어 전달했다. 

조중훈 회장은 이 강연 기념패를 책상 위에 놓고 집무 중에 운명했다. 그리고 경총 연찬회를 통해 이동찬 경총회장과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 간에 친분이 없었는데 새롭게 교류를 튼 계기(契機)가 되었다. 

끝으로 필자가 대한항공, 한진해운에서 일할 때 있었던 이야기다.  
KAL 비행기 꼬리의 선명하게  빛나는 ‘대한항공 태극문양 Logo’는 필자 옆자리에서 함께 일하던 ‘김영구 KAL 객실부 Designer’의 작품이다.  

대한항공 비행기 

필자의 손 글씨로 쓴 품의서(稟議書)에 조중훈 회장의 재가(裁可)를 받아 KAL 국내선 고객에 대한 ‘해태 캔디 서비스’와  ‘커피 서비스’가 1974년 상반기부터 이루어졌다. 

한진그룹 사가(社歌)도 필자가 맨 처음 만들자고 제안했으며 KAL 보급부 이치훈 사원의 작곡과 유명 시인의 작사로 만들어졌다. 

1970년대에는 은행 전산화가 되어 있지 않아서 지금처럼 은행 계좌 입금이 되지 않고 임금이나 물품대금 등 모든 게 현금으로 거래되었다. 

객실승무원 월급봉투를 교육장 탁자 위에 쭉~ 깔아 놓고 봉투에 돈을 담아 종이로 된 기내용 Baby-Box에 담아서 캐비닛 위에 보관하곤 했다. 그래도 단 돈 1원도 틀리지 않았다. 조흥은행 김포공항지점에서 객실부 사무실로 거액이 든 돈 자루를 옮길 적엔 권총을 찬 남승무원들이 필자를 Escort해 주곤 했다. 
 
그런데 조흥은행 김포공항지점의 협조로 KAL 객실승무원들의 월급과 비행수당을 필자가 수기(手記)로 작성해서 개인별 계좌로 입금해 주는 ‘은행 계좌 입금 서비스’를 1974년에 우리나라 최초로 시행했다. 어떻게 보면 은행업무 전산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시대의 천지개벽(天地開闢)이다. 

그 당시에는 10만 원 짜리 자기앞 수표와 10,000원, 5,000원, 1,000원 지폐 등 현금으로 본인에게 임금을 직접 지급했다. 승무원들 월급을 일일이 타자를 쳐서 입금하려면 밤새 야간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은행원들의 일손이 달려서 객실승무원 개인별 계좌 입금을 못해주겠다”고 끝까지 버티던 조흥은행 K지점장이 지금도 생각난다. 

우리가 대한민국에서 은행 계좌로 임금을 최초로 지급한 주인공임에 자긍심을 느낀다.   

전   대   길
(주)동양EMS 대표이사, 수필가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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