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익 컨설턴트의 소소한 일상이야기44] 운수 나쁜 날
[한상익 컨설턴트의 소소한 일상이야기44] 운수 나쁜 날
  • 편집국
  • 승인 2021.11.02 08: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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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익
•푸른소나무 life plan consulting 대표
•수필가
•재취업지원 컨설턴트
•한국생애설계사(CLP)

지난주 수요일은 정말 운수가 안 좋은 날이었다.
자주 듣고 싶지 않은 아니 안 들을수록 좋은 소식을 연이어 들은 날이기 때문이다. 

그날이 운수가 좋지 않은 날이 되리라는 불길한 조짐은 우리 집 실세인 주방장이 몸이 안 좋다고 아침부터 침대에 머물면서 시작되었다. 

95세인 장인어른과 90세인 장모님의 삼시 세끼 식사를 책임지는 아내의 영향력은 우리 집에서 거의 절대적이다. 그런 실세가 몸져누웠으니 집안 분위기가 아침부터 냉랭하고 긴장감이 흘렀다. 

딱히 꼬집어 어디가 이상이 있는 건 아니라는 데 아내는 시르죽은 모습으로 기운을 못 차린다. 주럽떨려는 듯이 침대에 누워 있으니 식구 모두 조심스럽다.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보자고 해도 조금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며 고집을 부린다. 

아침 점심도 거르며 누워만 있는 주방장이 기운을 차리고 저녁 준비를 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나는 어떻게든 챙겨 먹으면 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장인 장모님이 문제였다. 

그렇다고 90이 되신 장모님이 식사 준비하시는 걸 보고 있을 수도 없고 하니 남은 식구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밖에 없었다. 외식하든지 음식 배달을 시켜 먹는 거였다. 

아픈 아내를 혼자 두고 외식할 수 없으니 할 수 없이 가족이 모두 무난하게 먹을 수 있는 양념치킨을 주문하여 간신히 저녁을 때웠다. 계속 누워 있겠다고 하는 아내를 겨우 일으켜 세워 식탁에 앉혔지만, 결국 음식엔 손도 대지 않았다. 몸이 아프니 식욕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 아내를 다시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든 게 부산에 사는 이종사촌 동생의 입원 소식이었다. 60을 넘긴 지 얼마 되지 않는 아내의 사촌 동생이 갑자기 쓰러져서 응급실에 입원을 시켰는데 인공호흡기에 의지하여 겨우 호흡을 하는 중태라는 것이다. 

풍채도 좋고 건강하다고 생각했는데, 과거에 뇌종양으로 두 번이나 뇌 수술을 받아 늘 조심하며 정기적으로 서울에 가서 검진을 받고 있었다는 소식을 나는 처음 들었다. 

코로나 기간에 일절 바깥출입을 금하고 극도로 조심하며 지냈다고 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뇌로 바이러스가 감염되어 쓰러져 손을 쓸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아내와 함께 한국에 돌아와 이종 사촌 동생이라고 인사를 나눈 후 스스럼없이 나에게 매형이라고 부르면서 살갑게 대해주었고, 수시로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와 안부를 묻고 부산 식구들의 근황을 전해주던 처남이었다. 

아내와는 어릴 때 함께 자라서 그런지 주고 받는 말투도 친 누이 동생 같았다. 몇 해 전에는 우리 부부와 현재 암 투병 중인 아내의 다른 이종사촌 언니와 함께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보험 회사에서 오래 근무하고 퇴직해서 그런지 붙임성이 좋고 꼼꼼하여 여행 일정과 각 지역 맛집들 순례 계획을 세심하게 짰다. 그리고 직접 운전도 해가며 우리를 안내해 주어 우린 아주 편안하게 즐기기만 하면 됐었다. 

함께하는 멤버 구성이 좋다고 가을에 단풍 여행을 한 번 더 하자고 했었는데 이렇게 급작스럽게 쓰러져 생사를 걱정하고 있다니 믿어지지 않고 충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부산 처남 급보(急報)로 안타까운 마음이 진정되지도 않았는데, 저녁녘에는 우리 부부가 잘 알고 지내던 지인이 돌아가셨다는 궂긴 소식을 들었다.

돌아가신 분도 우리가 잘 알고 지냈지만, 특히 부인은 우리 장인 장모님을 친부모처럼 대하고 내 아내와 언니 동생 하며 살갑게 지내는 사이이다.

고인은 한국에서 고려 대학을 졸업하고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영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수원에 있는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다가 정년퇴직을 하고 아산으로 내려오면서 우리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한국에서 방송국 탤런트 공채에 뽑힐 정도로 준수한 외모를 지녔으며, 멋과 풍류와 예술을 아는 인텔리였다. 영국에 박사 학위 공부를 하러 가기 전에 잠시 여자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었는데, 그때 가르치던 여학생을 좋아하게 되어 큰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결혼했으니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스토리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정년 퇴직 후 부부간의 행복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더욱 한적한 온양으로 이사와 지내다가 파킨슨병에 걸리는 바람에 거동도 불편해지고 인지 능력도 점차 감소하더니 합병증으로 증세가 악화하여 요양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로 인해 병문안도 가지 못하고 면회도 금지되면서 오래 홀로 병원 생활을 해야만 했고 점점 증세가 악화하여 마침내 산소호흡기에 의지하며 연명 의료만 받고 지냈었다.  

가족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다시 회생하거나 나아질 가망도 없지만, 그래도 심장이 뛰고 산소호흡기에 의지해서라도 호흡을 하고 있으니 가족들은 쉽게 보내드릴 수 없어 거의 일 년 가까이 연명 의료만 받고 있었는데 결국 임종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생명 연명 의료만 받고 있어서 언젠가 이별하게 되리라는 것을 예견하고 준비하고 있었고, 고인이 육신의 고통에서 벗어나 편안한 안식을 취할 수 있게 됐다는 걸 알면서도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은 슬픔으로 먼저 다가온다. 

아침부터 아내가 주럽이 들어 온종일 누워있더니, 오후에 부산 처남이 갑자기 응급실에 실려 갔다는 급보를 듣고, 저녁에는 지인의 궂긴 소식으로 하루를 마감하게 되었으니 그날은 운수가 나쁜 날이라 부를 만할 것이다.  

아주 오래전 학창 시절에 읽은 현진건 작가가 쓴 ‘운수 좋은 날’이란 단편 소설이 있다. 
몸이 아프니 나가지 말라는 아내의 말을 뿌리치고 일하러 나간 김 첨지는 그날따라 인력거를 타는 손님이 많아 큰돈을 벌게 된다.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친구와 술 한잔도 하고 아내가 좋아하는 설렁탕도 사 들고 집에 가보지만, 아내는 죽어있었다는 줄거리이다. 

운수 좋은 날이란 제목과는 어울리지 않는 반전이 있다. 하지만 나의 운수 나쁜 날은 그런 반전도 없었던 그저 운수가 좋지 않은 날이었다.

한상익(myhappylifeplan@gmail.com)
•푸른소나무 life plan consulting 대표
•수필가
•재취업지원 컨설턴트
•한국생애설계사(CLP)/생애설계 전문강사 
•뉴질랜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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