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익 컨설턴트의 소소한 일상이야기49]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한상익 컨설턴트의 소소한 일상이야기49] 집으로 돌아가는 길
  • 편집국
  • 승인 2021.12.07 08: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상익
•푸른소나무 life plan consulting 대표
•수필가
•재취업지원 컨설턴트
•한국생애설계사(CLP)

뉴질랜드에 살 때 가족들과 자주 여행을 다녔다.
아들만 넷을 두어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러 주고 싶은 마음도 있고, 아이들이 낯선 이국땅에 애정을 갖고 빨리 적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뉴질랜드는 한국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기가 불편한 점도 있고, 가족들이 함께 움직이기에는 대중교통보다 자가용이 나아서 주로 자가용을 이용했다.

아이들이 넷이다 보니 우리 부부를 합하면 기본이 여섯이라 일반 승용차는 탈 수 없어 늘 밴이나 6인승 이상이 탈 수 있는 SUV를 몰고 다녔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아내도 운전하지 못해 할 수 없이 내가 도맡아 운전했다. 

여행을 떠날 때는 아이들이 들뜬 기분에 CD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율동까지 곁들이며 차가 들썩들썩할 정도로 요란을 떨지만,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는 피곤하여 잠자느라 귀갓길은 늘 조용했다.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시각은 주로 해거름 무렵이 된다. 우리가 살던 도시로 안내해 주는 표지판을 따라 낯선 길을 운전하다 보면 드문드문 마을을 지나치게 된다. 

주변이 어둑어둑해지며 모여 있는 마을 집 곳곳에 불빛이 한둘씩 켜지고, 겨울철에는 벽난로를 때는 집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것을 바라보며 운전하다 보면 막연한 그리움이 차오르며 왠지 모를 애틋한 향수에 젖게 된다. 

그리고 난데에 홀로 놓여있는 생각이 들면서 외로움에 빠지게 될 때가 있다. 외국 생활을 하면서 애써 외면하며 부정하려던 고독감이 슬몃슬몃 자리를 잡는다.

그럴 때 내가 가야 할 곳이 있고 쉴 곳이 있고 돌아갈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과 평안을 주었는지 모른다. 

외국 여행을 해본 사람은 누구나 한 번쯤은 집에 대한 그리움과 고마움을 느껴보았을 것이다. 친숙하지 않은 곳에서 느끼는 신선함도 있고, 처음 대하는 것들에 대한 흥미와 재미도 있지만, 그래도 익숙한 풍경과 사람 그리고 길들여진 편안함이 그리워지고 돌아갈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것에 안도감과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된다. 
  
뉴질랜드에 살면서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마치 고향에 돌아가는 느낌이 들곤 했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고향이라는 것에 대한 향수가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외국에서 살다 보니 내가 태어나 자랐던 동네 골목길, 빨간 벽돌 이웃집, 다리를 절던 아저씨가 주인이었던 구멍가게 등 기억나는 모든 것이 그리움으로 남았다. 어릴 때 살던 조그만 집은 늘 돌아가고 싶은 고향이 되었다.

언젠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머릿속에 남아 있는 어렸을 때 동네를 찾아가 보았다.  버스가 다니던 신당동 큰길에서 조금 들어가면 중앙시장이 있었고 그 시장을 지나면 거의 100m 가량되는 오르막길이 나온다. 도둑눈이 내리고 얼면 그 비탈길은 우리들의 놀이터가 됐다. 

어른들은 치받이 구석에 연탄재를 깔고 엉금엉금 기듯이 올라가고 동네 아이들은 얼어붙은 내리받이 길에서 무릎이 깨져가며 신나게 미끄럼질을 즐겼다. 그 언덕길을 넘어가면 손수레가 다닐 만한 길이 나오고 그 길을 건너 서너 걸음 되는 오르막에 우리 집이 있었다. 

우리 집 앞에는 돌담을 쌓은 큰 집이 있었고, 뒤편에는 지금도 판매되고 있는 상표의 간장 공장이 있었다. 골목길 건너편에는 3층 건물이 있었는데 공장을 하다 망해 문을 닫고 몇 가구가 살고 있었다. 

옆집에 살던 내 또래 친구는 밤마다 집 앞에서 운동을 했고, 구멍가게를 하던 다리가 불편한 아저씨는 가끔 밤에 대금을 청승맞게 불곤 했다. 
 
아련한 기억 속 동네를 그리며 가보았지만, 남아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내가 살던 집이 없어진 것은 물론이고 옆집, 앞집 그리고 공터가 있어 아이들 놀이터였던 동사무소도 없어지고, 구멍가게도 자취를 감췄다. 동네 자체가 없어졌다. 나에겐 그나마 고향이었던 돌아가고 싶은 집이 기억 속에만 남게 되었다.

천상병 시인은 ‘귀천’이란 시에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고 표현했다.

마치 돌아갈 집이 있는 것처럼 돌아가리라고 했다. 우리 조상들이 ‘죽음’을 ‘돌아가셨다’고 표현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우리가 여행을 마치면 출발한 집으로 돌아가듯이 우리 인생 여정도 마치게 되면 어딘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온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집으로의 회귀(回歸)를 말하자면 연어의 회귀 본능을 빼놓을 수가 없다. 강에서 태어난 연어는 바다로 나가 성년이 된 다음에는 자신이 태어난 강으로 회귀하여 그곳에서 알을 낳고 생을 마감한다. 그 본능이 얼마나 강한지 어떠한 어려움과 장애가 있더라도 죽음을 불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한자 숙어에 수구초심(首丘初心)이란 말이 있다. 여우는 구릉에 굴을 파고 사는데 죽을 때도 머리를 자기가 살던 구릉 쪽에 둔다는 의미로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나 고향을 절실히 그리는 향수를 일컫는 말로 자주 사용된다.

연어가 죽을 때 자기가 태어난 강으로 그 먼 길을 죽음을 불사하고 돌아가거나 여우가 죽을 때 자기가 살던 구릉 쪽으로 머리를 두듯이 자기가 태어난 곳을 그리워하고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은 본능인 것 같다.

기독교인들은 우리가 온 곳이 하늘에 있는 본향(本鄕)이고 이생을 마치면 본향으로 돌아간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생이 나그넷길이고, 우리는 이 타향에서 사는 외국인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기에 잠시 머물다 가는 이생에 연연하지 말고, 본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잘 준비해야 한다고 가르침 받는다. 

우리가 돌아갈 집이 본향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누구나 언젠가는 돌아가야만 하는 이 여정을 마칠 때 아름다운 소풍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울 것 같다.

한상익(myhappylifeplan@gmail.com)
•푸른소나무 life plan consulting 대표
•수필가
•재취업지원 컨설턴트
•한국생애설계사(CLP)/생애설계 전문강사 
•뉴질랜드 변호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