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익 컨설턴트의 소소한 일상이야기54] 흔적
[한상익 컨설턴트의 소소한 일상이야기54] 흔적
  • 편집국
  • 승인 2022.01.11 08: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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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익
•푸른소나무 life plan consulting 대표
•수필가
•재취업지원 컨설턴트
•한국생애설계사(CLP)

나이가 드니 추운 게 싫다. 그래서 겨울이란 계절이 싫어졌다. 
뉴질랜드 살 때 팔자 좋은 사람들이 한국이 겨울철일 때 따뜻한 뉴질랜드로 와서 서너 달 지내며 겨울이 지나간 다음 다시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얘기를 듣고 뭘 그렇게까지 하나 생각했었는데, 나이를 한두 살 먹다 보니 나도 여건이 허락되면 추운 겨울엔 따뜻한 곳에 있다가 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그나마 추운 겨울을 견디게 해주는 건 겨울철의 눈이다. 눈이 없는 삭막한 겨울은 상상만 해도 싫다. 물론 젊었을 때처럼 낭만적으로 눈을 보기보다는 눈이 온 후 얼게 되면 낙상이 걱정되고, 눈이 녹아 찻길이 지저분해지면 세차 걱정이 앞서긴 하지만, 그래도 겨울엔 눈이 있어야 제맛이고 눈을 보면 마음이 푸근해져서 잠시 추위를 잊곤 한다.

눈은 낮에 내리는 눈보다 밤에 몰래 내리는 도둑눈이 좋다. 밤새 아무도 모르게 눈이 차분히 쌓여 아침에 창을 열면 눈으로 하얗게 덮인 세상을 보는 것은 경이롭다. 눈에 거슬렸던 지저분한 것들을 가려주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하얀 세상은 공평해 보이고 순백의 아름다운 세상은 지극히 평온해 보인다. 

이 경이로운 세상을 만드는 도둑눈을 이어령 교수는 자신의 인터뷰를 기록한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란 책에서 쿠데타라고 표현했다. 과격한 표현이긴 하지만 세상을 몰래 바꾸는 일이니, 적합한 말이란 생각도 든다.

눈으로 덮인 아침 길을 나서면 사방이 온통 하얗게 변해 있는 풍경을 보는 것도 즐겁지만,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을 내가 처음으로 걸으며 발자국을 남길 수 있어 설렌다. 

내 손과 발이 닿는 게 모두 처녀 짓이니 얼마나 신비롭고 신선한지 모른다. 비록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발자국으로 덮이거나 해가 뜨면 녹아 나의 자취는 없어지겠지만, 잠시라도 나의 흔적을 남길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이다.

흔적(痕迹)이란 ‘어떤 현상이나 실체가 없어졌거나 지나간 뒤에 남은 자국이나 자취’라고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와 있다. 동물들도 구애 활동이나 영토 표시 등의 이유로 본능적으로 흔적을 남기기도 하지만, 인간이 남기는 자취는 그 사람의 삶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다.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이라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호랑이는 어떻게 죽든지 상관없이 죽고 나서 남겨지는 가죽은 모두 같다. 

하지만 사람은 어떻게 살았는지에 따라 남겨지는 이름이 달라진다. 어떤 사람은 후손들이 자랑스럽게 기억하고 떠올릴 수 있는 이름을 남기는 반면, 어떤 사람은 세상에 드러나지 않게 감추고 싶은 이름을 남기기도 한다. 

우리가 어떤 이름과 흔적을 남길지는 전적으로 내 선택에 달려 있고, 내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다. 

나는 가수 오디션 프로그램을 즐겨 본다. 가능하면 늦더라도 본방사수를 하려고 할 정도로 애청자이다. 

여러 방송국에서 너나 할 것 없이 오디션 프로그램을 하다 보니 이쪽 방송국에서 도전하여 뜻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 저쪽 방송국 오디션 프로그램에 도전하는 경우도 있어 눈에 익은 도전자들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한편으론 반갑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론 여기저기 기웃거린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나름대로 사정이 있을 것이고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도전을 계속해 나가는 것도 용기라 생각된다. 

이렇게 얼굴과 이름이 낯익은 도전자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가수 지망생들이고 그들의 사연과 감춰진 기량을 알아가는 게 흥미로워서 채널을 고정하게 된다.

한 오디션 프로그램에서는 출연자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번호를 달고 경연을 펼치다가 최종 탈락하게 되면 자신의 이름을 밝히며 떠나게 되어 있다. 

또한 출연자들을 과거 경력을 바탕으로 ’OST 조’ ‘오디션 최강자 조’ ‘슈가맨 조’ ‘재야의 고수 조’ ‘홀로서기 조’ ‘무명 가수 조’ 등의 그룹으로 나누어서 경연을 벌이는 데 그중 관심이 가는 조가 ‘무명 가수 조’이다. 

무명(無名)이란 문자 그대로 보면 이름이 없다는 말로 가수가 당연히 이름이 있겠지만,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 사람들이 모르기 때문에 ‘무명’이란 타이틀을 붙인 것 같다. 

어느 참가자이든지 나름대로 사연이 있고 노래를 계속 부르고 싶다는 간절함과 절박함을 엿볼 수 있다. 이들이 가진 공통된 목표는 노래를 잘 불러 많은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알아주는, 한마디로 유명해지는 것이다. 

자신의 가수 인생에서 이름을 남기고 흔적을 남기고 싶은 것이다. 내가 이런 경연 프로그램에서 감동하는 순간은 출연한 도전자가 불러주는 감성 어린 노래가 내 마음에 닿을 때이기도 하지만, 도전자들의 절박함과 간절함이 느껴질 때이다. 

오직 노래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현실적으로 겪고 있는 온갖 어려움과 장벽들을 감수해 가며,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한 목표를 향해 외길만을 걷고 있는 그들의 간절함과 열정에 그렇지 못한 나 자신이 투영되며 숙연해지고 감동하게 된다. 

비록 중도에서 탈락하더라도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후회가 없고, 이렇게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감사하다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면 신선한 감동을 받는다. 

그런 신념과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흔들림 없이 정진한다면 언젠가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노래 인생에서 흔적을 남길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우리 매일매일의 삶은 흔적을 남기는 일이다
학위를 취득하고, 자격증을 따고, 경력을 쌓는 모든 일은 우리 삶의 흔적이다. 때론 뚜렷하고 굵게, 때론 흐리고 가늘어서 삶의 자취가 보이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매일 하는 선택과 행위로 우리는 흔적을 남기고 쌓아간다. 그리고 우리 후대는 그 흔적들로 우리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도둑눈이 내린 하얀 아침과 같은 2022년 새해에 어떤 흔적을 남길 것인가는 온전히 우리 몫이다.

한상익(myhappylifeplan@gmail.com)
•푸른소나무 life plan consulting 대표
•수필가
•재취업지원 컨설턴트
•한국생애설계사(CLP)/생애설계 전문강사 
•뉴질랜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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