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길 CEO칼럼] 최초의 한국인 조종사 안 창남(安昌男)
[전대길 CEO칼럼] 최초의 한국인 조종사 안 창남(安昌男)
  • 편집국
  • 승인 2022.01.12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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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대   길
(주)동양EMS 대표이사, 수필가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지금부터 100년 전에 실제 있었던 실화(實話)다. 안 창남 선생은 청소년 시절인 1917년 9월, 서울 용산에서 열린 미국인 아트 스미스의 곡예비행을 보고 그 위용에 압도되어 비행기 조종사라는 꿈을 꾼다. 

숱한 우여곡절과 피나는 노력으로 일제 강점기에 조선인이라는 차별을 극복하고 1920년 10월, 일본 도쿄 오쿠리 비행학교를 졸업했다. 1921년 5월에는 일본 민간 비행사 시험에 1등으로 합격했다. 그 해 6월에는 지바에서 열린 민간 항공대회에서 당당히 2등을 차지해서 비행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 후 1922년 동아일보가 그의 조국 방문 비행 추진을 공식 발표했다. 특히 11월 도쿄~오사카(왕복) 우편 비행대회에서 우승하자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드디어 1922년 12월10일 조종사 안 창남은 역사적인 조국 서울의 창공을 날았다. 

<한국인 최초의 비행사 안 창남 조종사>
<한국인 최초의 비행사 안 창남 조종사>

​이 때 안 창남은 영국제 1인승 뉴포트 복엽기 '금강호'를 타고 여의도 비행장을 이륙,  남산을 돌아 창덕궁 상공을 날아서 다시 여의도로 돌아오는 단독비행에 성공했다. 

대한민국 하늘을 난 최초의 한국인으로 우뚝 선 것이다. 지금으로 부터 100년 전에 있었던 감격적인 실화(實話)다. 100년 전의 서울시 인구는 300,000명, 안 창남 조종사의 첫 비행을 본 사람이 50,000여명이었다. ​

그런데 그의 비행은 단순히 개인의 영달과 부귀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조선민족을 대표하는 애국심의 발로였다. 그는 서울 상공을 비행하고 잡지 '개벽'에 <공중에서 본 경성과 인천>이라는 비행(飛行) 소감을 발표했다. 

우리는 안 창남 조종사가 100년 전에 서울 하늘의 첫 비행을 영원히 기억하면 좋겠다.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나고 일본인들이 조선인 학살을 자행하자 이에 분노한 안 창남은 1924년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천인공노할 일본과 일본인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 중국인과 한국인 비행사 양성 비행학교인 중국군 산하 산시 비행학교에서 비행교관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1930년 4월2일 그토록 원하던 조국의 독립은 보지 못하고 비행교육 중에 안타깝게 산화(散華)했다.

회사일로 여의도를 찾을 때마다 여의도 창공(蒼空)을 비행했던 안 창남 조종사를 떠올린다. 뿐만 아니라 봄이 되면 사막처럼 모래바람이 일던 공군106기지 여의도 비행장 모습도 선하다. 

1960년대 초반 여의도 샛강(노량진 수산시장~63빌딩 사이의 좁은강)에서 친구들과 맑은 물에서 멱을 감던 어릴 적 추억도 생생하다.

월남전 참전 후 공군본부에서 복무할 때 공군 여의도 유류보급창고(POL)가 있었던 곳이 지금의 63빌딩 자리다. 

끝으로 노량진 명수대 아래, 한강 백사장 위에서 펼쳐진 ‘국군의 날 Air-Show’를 본  서울 시민들의 감탄과 환호의 박수 소리가 시공(時空)을 넘어 지금도 귓전에 들린다. 전투기 폭음소리에 나도 모르게 두 손으로 귀를 막는다.  
     
전   대   길
(주)동양EMS 대표이사, 수필가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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