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재산 원장의 아름다운 뒤태] 망우리 화원의 추억
[가재산 원장의 아름다운 뒤태] 망우리 화원의 추억
  • 편집국
  • 승인 2022.01.28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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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곳에 새로운 길이 있다."
"인생에 은퇴는 없지, 시작만 있을 뿐이야!"
가재산ㆍ한류경영연구원 원장ㆍ피플스그룹 대표
가재산ㆍ한류경영연구원 원장ㆍ피플스그룹 대표

10여 년 전 겨울날 서초동 한식집에서 부부 동반으로 송년회가 열렸다. 삼성그룹 입사 30주년 기념과 송년회를 겸한 자리였다. 2백여 명의 동기생 중 그때까지 현직에 근무하는 사람은 단 두 명뿐이었다. 같이 몸담았던 조직에서 뿔뿔이 흩어졌다가 오랜만에 만난 모습들은 아주 다양했다. 그간 경험을 살려 자영업을 하는 사람, 해오던 일과 전혀 다른 중소기업으로 직장을 옮겨 근무하는 사람, 명함은 있지만 소일 삼아 친구 사무실에 드나드는 사람. 그래도 무소속이 가장 많았다.

외모를 보니 아랫배는 불룩하게 나오고, 머리숱이 숭숭 빠진 모습, 염색은 했다고 하지만 백발이 성성한 머리들을 하고 있었다. 앞만 보고 달려온 계급장이요 자화상이 아닌가?

저녁 식사를 마치고 한 사람씩 돌아가며 자기 근황을 이야기하는 순서가 되었다. 팔불출이라 자칭하면서 아들, 며느리 자랑하는 친구, 돈 내고 해야 한다는 손주 자랑을 신나게 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래도 대부분이 힘든 여정을 걸어왔으니 이제 삶의 쉼표라고나 할까, 좀 쉬기도 하면서 건강하게 오래 사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들이 공통의 화젯거리였다.

맨 마지막으로 전자계열사에서 부장으로 근무하다 그만둔 친구의 차례가 왔다. 머리가 다 빠져 숱이 거의 없었고, 내성적인 성격에 평소 말이 없었던 이춘계라는 친구가 마이크를 잡았다.

"나는 서울에서 가장 친절한 택시기사요, 참으로 행복한 사내입니다."라고 입을 열더니 5개월 전부터 영업용 택시기사로 전혀 예기치 못한 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순간 동기들 사이에 "오우!" 하는 동정인지 감탄인지 모를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남들 같으면 어떻게든 운전수라는 사실을 감출 법도 한데 그 친구는 자신감 있는 말투로 먼저 왜 이 어렵다는 택시 운전을 시작했는지 그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그러고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살인의 추억〉이라는 영화를 보았냐는 질문을 했다. 절반쯤은 손을 들었는데, 마침 나도 수년 전 그 영화를 본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화성의 연쇄살인 사건을 봉준호 감독이 영화화한 것으로 송강호가 열연을 펼쳤지만, 영화가 끝난 뒤 무언가 꺼림칙했던 뒷맛을 지금도 지울 수가 없는 영화였다.

이 친구가 들려준 이야기는 ‘화원의 추억’이었다. 1년 전에 돌아가신 장모님 산소에 한번 가보자는 아내 제안에 백수인 주제에 이 일 저 일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었다. 처가에 소홀히 했던 죄책감도 있고 하루 꼬박 세 끼를 집에서 먹는 ‘3식이’요, 특별히 하는 일도 없는지라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같이 차를 몰고 망우리 쪽을 향했다. 그런데 도로가에 예쁜 관상수와 꽃을 파는 화원들이 나란히 보였다. 그중 한 가게 앞에 아내가 차를 갑자기 세우라고 말했다. 모처럼 같이 산소에 가는 길이니 꽃이라도 몇 송이 사 들고 가자는 이야기였다.

그 친구는 꽃에 대해 잘 모르는지라 알아서 사겠거니 하고 안에는 들어가지 않고 가게 문 앞에서 기다렸다. 아내가 꽃을 고르면서 주인과 이야기하는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이 꽃을 어디에 가지고 가시려구요?"
"예, 저의 친정엄마 산소에 가는 길입니다."
"아! 그러세요? 그러면 저 문 가에 서 계신 분은 친정아버님이세요?"
순간 친구는 망치로 뒤통수를 두들겨 맞은 듯 어안이 벙벙했다. 아니 이 아주머니가 나이 60도 안 된 시퍼런 남편인 나보고 친정아버님이라고 하다니!

화가 잔뜩 치밀어 당장 쫓아가 말조심하라고 따져보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았다.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내 지금의 모습이 그 주인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닐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머리숱은 어느새 다 빠지고, 아랫배도 나오고, 균형 잡힌 곳이라곤 거의 없는 꼬락서니가 한몫했으리라.

게다가 그동안 반년 이상 집에서 빈둥거리니 기력도 빠지고 풀이 죽어 활기까지 없어진 내 몰골로 인해 그 꽃집 주인은 물론 아내에게도 똑같이 비치고 있는 것이 분명하리라 생각하니 오히려 부끄러웠다.

이 충격적인 사건을 두고 그 친구는 '화원의 추억'으로 이야기한 것이다. 그 친구는 이후 무언가 꼭 해야겠다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부지런히 일자리를 찾아보았다. 처음엔 삼성이라는 이력과 서울공대 출신이란 생각에 쉽게 생각했다. 그러나 50대 중반이 넘은 나이에 자신 있는 일이란 고작 그동안 해왔던 컴퓨터 관련 일이 전부인지라 여기저기 이력서를 내보고, 선후배를 찾아가 알아봤지만 뾰족한 수가 보이질 않았다.

능력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자신에 대한 상심과 한탄이 물밀듯이 한없이 밀려왔다. 고민과 궁리 끝에 이제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택시회사를 찾아갔다.

사실 잘나가는 그룹사에서 30년 근무하다가 자가용도 아닌 영업용 택시를 운전한다는 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구나 하필이면 해본 경험도 없는 그 힘든 운전을 하느냐고 가족들은 펄쩍 뛰었고 친척들까지도 적극 말렸다.

어렵게 마음먹고 시작한 영업용 택시 운전이었지만 출근 첫날부터 어려움에 부닥쳤다. 하루 12시간 일하고 당시 11만 원의 사납금을 회사에 반드시 입금해야 했다. 말은 월급제라고는 하지만 사납금을 모두 채워야만 월급이 고작 백여 만 원 좀 넘게 나오는데 못 채우면 월급에서 그 금액만큼 공제했다. 그야말로 누구나 기피한다는 3D 업종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되었다.

하지만 마음을 단단히 고쳐먹고 택시 운전을 하다 보니 새로운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더럽고 힘들고 위험하다는 3D가 아니라 새로운 'New 3D'를 발견했다. 그 말을 들은 우리는 택시 운전이 힘든 직업이니 더 어렵고 힘들다는 의미로 '3D'라는 말이겠거니 했는데 막상 듣고 보니 예상 밖의 기발한 이야기였다.

첫 번째 Delight. 회사 다닐 때는 상사, 때로는 부하의 눈치도 봐야 하고 스트레스가 여러 가지로 많았는데 택시 운전을 열심히 하다 보니 그런 것에 신경을 안 써도 되었다. 그 대신 승객을 만나면 매우 반갑고 그 기쁨이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손님들은 대개 길에서 오래 기다리다 택시를 타면 이렇게 말하곤 했다.

"어디 있다 이제야 나타났느냐? 20분이나 택시 못 잡고 있었는데…."
그러면 자기도 이렇게 대꾸를 했다.
"어디 있다 이제 나타나셨소! 난 손님이 없어 30분을 헤맸는데…."

두 번째는 Dynamic. 회사 다닐 적에는 매일 같은 사무실에 출근하여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을 하다가 회의가 있더라도 사무실 근처에서만 뱅뱅 돌아야 했다. 그런데 30년 동안 한 번도 못 가봤던 청와대, 국회의사당, 남산을 비롯하여 서울 시내 구석구석까지, 그리고 근교 이곳저곳을 다 가볼 수 있었다. 젖먹이 어린애부터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까지 만날 수 있고, 동승한 손님들로부터 온갖 세상살이 얘기를 다 들을 수 있으니 저절로 역동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셋째 Developing. 회사 다닐 적에는 자기계발을 하려면 업무시간보다 더 일찍 출근하여 학원 등록하고 시작하더라도 작심삼일이 많았다. 손님이 없을 때는 테이프를 틀어놓고 영어, 일본어, 중국어를 공부할 수 있어서 낯선 외국 손님들과 대충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했다.
게다가 젊은 손님이라도 타면, 그 친구들이 내 도전 이야기를 듣고 감탄하며 자기도 반성을 하고 앞으로 공부 열심히 하겠노라고 할 때 우쭐해져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Self-Developing도 되고, 다른 사람의 개발에도 도움이 됨을 깨닫게 되었다. 게다가 좋아하는 음악도 마음껏 들을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직업이 있으면 말해보라는 자신감 넘치는 어투였다.

물론 힘든 일도 많았다고 했다. 그중 가장 힘든 경우는 술주정꾼들이었다. 어느 취객은 난데없이 서울대학을 나온 이 친구에게 "이 친구야, 넌 이런 일이나 하게 중학교나 나왔냐?" 하고 무시하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회원 모두가 자기소개를 마치고 미니 밴드를 불러 노래 몇 곡을 부르고 헤어졌다. 그날 모임에서의 장원은 단연 그 친구였다. 참으로 용기 있는 대단한 변신이요, 우리 모두를 부끄러운 마음이 들게 했다. 화려한 계급장이나 체면을 따지고, 남의 이목을 중요시했던 우리들의 삶과 의식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택시 운전을 시작하기 1년 전 그 친구가 그해 송년 모임에서 마이크를 잡더니 난데없이 조병화 시인의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사세〉라는 시 한 수를 낭송해주었던 일이 기억났다. 이미 그 친구는 자기 자신은 물론 살아왔던 세상과 헤어지는 연습을 계속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때만 해도 처음에는 다들 무슨 의미로 그 시를 낭송했는지 의아하게 생각했다.

"낯선 곳에 새로운 길이 있다."고나 할까? 인간은 원래 변화를 싫어하기 때문에 변화하려면 버리기와 빼기 연습부터 해야 한다는 생각을 그 시로 대신해 말한 것이었다. 대기업의 화려함, 잘나가던 생각, 과거의 익숙한 습관을 버리고 마음을 비워, 다가오는 100세 시대라는 낯선 변화를 의연하게 받아들이자는 귀띔으로 들렸다.

결국 이 친구는 3년간 무사고 운전을 하여 드디어 자가용 택시 운전 자격을 취득했다. 그리고 웃돈을 주기는 했지만 자기 소유의 영업용 택시를 구입하는 데 성공했다. 그해 말 송년회 때 며느리가 사회를 보는 가운데 가족들이 모여 자가용 영업 택시 발대식 장면을 찍은 유튜브 영상을 틀어주면서 예전보다 더 환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인생에 은퇴는 없지, 시작만 있을 뿐이야!"

가재산
ㆍ한류경영연구원 원장
ㆍ피플스그룹 대표
ㆍ핸드폰책쓰기코칭협회 회장
ㆍ청소년 빛과 나눔장학협회 회장
ㆍ책과 글쓰기대학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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