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익 컨설턴트의 소소한 일상이야기78] 낙동강 단상(斷想)
[한상익 컨설턴트의 소소한 일상이야기78] 낙동강 단상(斷想)
  • 김민수 기자
  • 승인 2022.06.28 06: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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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익
•푸른소나무 life plan consulting 대표
•수필가 •재취업지원 컨설턴트 
•한국생애설계사(CLP)

6월은 호국 보훈의 달이다.
6.25 전쟁에 직접 참전하셨던 장인어른에게 6월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달이다. 목숨 걸고 나라를 지킨 공훈을 인정 받아 정문에 걸어놓은 국가유공자 명패는 집에 들어설 때마다 자긍심을 갖게 해준다.

6.25 전쟁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낙동강이 떠오른다. 대한민국을 지켜준 마지막 보루로 가장 치열하게 전쟁을 치르며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던 곳이기도 하고 낙동강이란 이름과 얽힌 여러 표현 때문이기도 하다.

낙동강(洛東江) 하면 ‘낙동강 오리알이 됐다’라는 표현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무리에서 떨어져 있거나 홀로 뒤처져서 처량하게 남게 된 신세를 뜻하는 ‘낙동강 오리알이 됐다’라는 표현의 유래가 낙동강 전투와 연관이 있다고 전해진다. 

한국 전쟁 당시 마지막 방어선이었던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적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때, 연합군의 폭격이 빗발치듯 북한군에게 떨어지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라든지 또는 연합군의 폭격으로 북한군이 낙동강에 추풍낙엽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고, ‘낙동강에 오리알이 떨어진다’고 외친 것에서 전해졌다고도 한다. 

또 다른 일설에는 낙동강 변에 서식하는 청둥오리가 강변 갈대숲에 알을 낳았는데 장마로 갑자기 물이 불게 되자 갈대숲에 있던 오리알들이 불어난 물에 떠내려가는 모습을 보고 이야기한 것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이처럼 전해 오는 이야기들의 사실 여부를 가리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이미 ‘낙동강 오리알’이라는 표현은 유래가 어떻든지 간에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고, 그 의미가 우리 삶 속에 살아 움직이기 때문이다.

‘낙동강 오리알이 됐다’는 표현은 낙동강과 함께 쓸 때 특별한 생명력이 있다. ‘한강 오리알’ 또는 ‘남강 오리알’ 등 어느 강 이름을 붙여도 제맛이 나질 않는다. 이는 한국 전쟁 시 최후의 보루로 남겨진 낙동강 전선의 슬픈 역사와 맞물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는 낙동강(洛東江)이란 이름이 가야의 낙양 동쪽에 흐르는 강이란 이름에서 나왔지만 떨어질 낙(落)자와 발음이 같기 때문에 떨어지거나 홀로 뒤처져 있음을 뜻하는 ‘낙동강 오리알’이라는 표현과 잘 어울리는 데서 오는 어감상의 조화일 수도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술 한잔 걸치면 즐겨 부르는 처녀 뱃사공이란 노래도 낙동강이 품고 있는 슬픈 역사가 있기에 생명력을 갖는다. 

‘낙동강 강 바람이 치마폭을 스치면 군인 간 오라버니 소식이 오네’라고 시작하는 이 노래를 부르면서 우리는 군에 간 오빠를 대신해서 늙으신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처녀의 몸으로 낙동강을 건너는 배의 노를 저어야만 했던 지난(至難)한 삶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고, 우리 민족의 애잔했던 역사의 단면을 마주하게 된다. 

그러기에 노래가 더 구슬퍼지고 마음에 와닿는다. 여기에서도 낙동강이란 말에서 조국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다 숨진 젊은 영혼을 품은 낙동강 전선이 떠오른다. 

그러한 전쟁의 상흔이 느껴지기에, 군인 간 오라버니란 말과 어울리고 늙으신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노를 짓는 처녀 뱃사공의 애절함이 배가(倍加)된다. 낙동강이기에 이 노래가 살아난다.

압록강, 두만강, 대동강, 노들강(한강) 그리고 낙동강을 노래한 옛 노래 ‘오대 강’에서 낙동강을 ‘남쪽은 낙동강 곡식 실러 가는 물, 이 쌀을 실어다가 님께 드리리’라고 노래하고 있듯이 낙동강은 김해평야를 살리는 젖줄이기도 하고, 곡식을 나르는 생명줄이기도 했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슬픈 가족사의 이야기가 숨어 있는 강이기도 하다. 

김해가 고향이셨던 장인어른에게 낙동강은 슬프고 고달픈 삶을 남겨준 강이었다. 정미소를 운영하셨던 아버지 덕에 남 부러울 것 없이 풍족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낙동강이 홍수로 인해 범람하여 김해평야를 덮치면서 삶이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하루아침에 집과 삶의 터전을 잃게 된 가족들은 호구지책(糊口之策)을 위해 만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게 되었고, 낯선 외국 땅에서 맨주먹으로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 게 되셨기 때문이다. 

성인이 되어 돌아온 조국에서 한국 전쟁에 참전하게 되고, 또다시 맞이하게 된 낙동강은 조국의 운명이 걸려 있고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치열한 생존의 장(場)이었다. 장인어른의 삶에서 낙동강은 이토록 아프고 슬프고 간절했던 역사의 공간으로 남아 있다.

낙동강은 이제 우리 겨레의 아픔과 슬픔의 역사를 품은 채 오늘도 묵묵히 흐르고 있다. 모진 역사와 도전을 이겨내고 모든 것을 감싸 안으며 변함없이 흘러가는 낙동강에서 우리는 어떤 시련과 역경이 닥치더라도 이겨내고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본다. 

겨레의 영산인 태백산에서 발원하여 남으로 칠백 리 국토를 아우르며 남해로 흘러드는 낙동강은 더는 슬프고 지나간 역사 속의 강이 아니라, 우리 겨레의 젖줄로서 우리 삶에 꿈을 심어 주는 희망의 강으로 오늘도 흐르고 있다. 

한상익(myhappylifeplan@gmail.com)
•푸른소나무 life plan consulting 대표
•수필가
•재취업지원 컨설턴트
•한국생애설계사(CLP)/생애설계 전문강사 
•뉴질랜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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