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익 컨설턴트의 소소한 일상이야기92] 시월
[한상익 컨설턴트의 소소한 일상이야기92] 시월
  • 김민수 기자
  • 승인 2022.10.04 08: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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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익
•푸른소나무 life plan consulting 대표
•수필가 •재취업지원 컨설턴트 
•한국생애설계사(CLP)

달력이 세 장 밖에 남지 않았다.
거실 벽 한쪽 구석에 걸려 있는 큼지막한 달력은 월 단위로 되어 있어 달이 바뀌면 한 장씩 떼어내게 되어 있다. 우리 가족이 단골로 다니는 약국에서 발행한 것으로 달력 하단에는 약국 이름과 주소 그리고 전화번호가 선명하게 인쇄되어 있다. 

그림도 없이 날짜만 박혀 있는 볼품없는 달력이지만, 숫자가 큼지막하여 읽기 쉽고 음력이 크게 명기되어 있으며 칸이 넉넉하여 필요한 메모를 하기 좋아 거실에 걸어놓고 오며 가며 보고 있다.

매월 한 장씩 뜯게 되어 있는 달력을 달이 바뀌어 한 장씩 떼어낼 때마다 시간이 흘러가고 있음을 직관적으로 느끼게 된다. 그리고 달력을 매달 한 장씩 떼어내어 몇 장 남지 않게 되면 올해의 끝도 얼마 남지 않음이 실감 난다.

일 년 중 어느 달이 덜 중요하고 어느 달이 더 가치 있다고 할 수 없겠지만,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되는 달은 좀 특별한 감정을 담게 된다. 예를 들면, 봄을 느끼게 되는 3월이라든지, 본격적인 여름에 접어드는 8월, 가을을 일깨워주는 10월 그리고 겨울을 실감 나게 해주는 12월을 들 수 있다.

그중에서도 10월은 북반구와 남반구 두 곳 모두 살아본 나에게 복잡 미묘한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달이다. 두 지역은 계절이 정반대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0월이 되면 본격적으로 단풍이 물들면서 가을이 확연히 우리 곁에 왔음을 알게 해준다. 높고 청명한 하늘과 아침저녁으로 느끼는 선선함은 우리 마음마저 명징하게 해준다.

그래서 당나라 문호인 한유도 아들에게 책 읽기를 권하면서 가을의 서늘한 기운이 처음 느껴질 때 등불 밑에서 글 읽기가 좋다는 뜻으로 ‘신량등화’(新凉燈火)란 표현을 썼다. 

하지만 우리가 즐길 수 있는 가을의 수명은 갈수록 짧아지는 듯하다. 가을의 시간이 짧아진다는 얘기는 우리가 가을을 맘껏 즐기기도 전에 겨울이 오고 있다는 말이다. 

중년을 넘어선 나는 가을을 맞이할 때마다 곧 꼬리를 물고 닥칠 추운 겨울을 미리 염려하게 된다. 그래서 어느 때부터인지 남자의 계절이라고 하는 가을이 달갑게 여겨지지 않는다. 가을이 깊어갈수록 겨울의 잔영이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반구에 속한 뉴질랜드의 10월은 봄의 끝자락이자 키위들이 가장 기다리는 여름의 시작이기 때문에 누구나가 손을 벌려 환영한다. 기온도 따뜻해지고 데이라이트세이빙(Daylight savings- 한국의 서머타임제)으로 낮도 길어져서 야외에서 머무는 시간이 많아진다. 

뉴질랜드 여름은 습도가 높지 않기 때문에 끈적끈적하고 습한 무더위가 없고, 한국 가을처럼 청량하면서도 기온은 따뜻해서 좋다. 한여름이라도 그늘로 들어가면 선선한 느낌마저 들어 처음 뉴질랜드에서 여름을 맞이했을 때는 꼭 긴소매 옷을 갖고 다녔다.

뉴질랜드에서 10월을 맞이할 때마다 여름으로 계절이 옮겨가는 것은 좋았지만,  10월 하면 떠오르는 한국 가을의 오색 창연한 단풍이 그리웠다. 젊었을 때 오르던 산의 울긋불긋한 단풍을 그려보며 추억에 젖어 10월을 보내기도 했다.

이제 한국에 돌아와 여러 해 10월을 맞이했지만, 예기치도 못한 코로나 때문에 가을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올해는 야외 마스크 착용이 해제되었으니 모처럼 가을 단풍을 마음껏 즐길 수 있을 거 같다. 10월 하면 단풍이 먼저 연상되지만, 황금빛 넘실대는 들녘으로 상징되는 풍요로운 결실과 수확의 시간이기도 하다.

10월을 맞아 아름다운 단풍을 감상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는 것도 좋지만, 결실과 수확의 계절이니만큼 이제까지 살아온 나 자신이 어떤 열매를 맺고 무엇을 거두고 있는지도 돌아보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 자연의 10월은 똑같이 반복되지만, 내 인생의 10월은 매번 다르기 때문이다.

시인 이채는 ‘중년의 가슴에 10월이 오면’이란 시에서 인생의 10월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내 인생에도 곧 10월이 오겠지
그때 나는 어떤 모습일까
드높은 하늘처럼
황금빛 들녘처럼
나 그렇게 평화롭고 넉넉할 수 있을까 
(중략) 

내 인생에도 곧 10월이 오겠지
그때 나는 어떤 빛깔일까 
빨간 단풍잎일까
노란 은행잎일까
이 가을처럼 나 아름다울 수 있을까

거실 벽에서 10월임을 보여주는 달력이 이제 세 장 밖에 남지 않았다고 알려준다. 
올해가 얼마 남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도 있지만, 올해를 잘 마무리 지을 수 있는 시간이 아직 석 달이나 남아 있음에 위안받는 10월이다.

한상익(myhappylifeplan@gmail.com)
•푸른소나무 life plan consulting 대표
•수필가
•재취업지원 컨설턴트
•한국생애설계사(CLP)/생애설계 전문강사 
•뉴질랜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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