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만의 우리가 몰랐던 역사 이야기] 광한루에 얽힌 역사적 진실
[황규만의 우리가 몰랐던 역사 이야기] 광한루에 얽힌 역사적 진실
  • 김민수 기자
  • 승인 2022.10.19 08: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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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컨택센터산업협회 황규만 부회장

오래된 이야기지만 고려시대에는 숭문천무(崇文賤武) 정책에 따라 문신들은 무신들을 멸시하고 무시 했었죠. 그래서 군인들은 전투와 노역에 시달릴 뿐만 아니라 녹봉도 제대로 받지 못해 생활이 어렵다 보니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도저히 참지 못하고 1170년 정중부를 포함한 무인들이 무신정변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때 난을 피해 종3품 전중감(殿中監)이었던 황공유가 고향인 장수로 내려 왔다가 그곳에서 40여km 떨어진 남원으로 가족을 데리고 이주해 대대로 살게 되죠. 

그리고 황공유의 후손 중 학문에 뛰어나 “동국명현록(東國名賢錄)”에 기록되기도 했던 일재 황감평이 요천강변에 조그만 서재를 짓고 생활하게 되는데 이 서재 터가 지금의 광한루입니다. 이해가 안되시죠? 여러분 황희 정승 잘 아시죠? 

황희 정승은 고려 공민왕 12년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다 고려 말에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1390년 정9품 성균관 학록에 제수되었지만 1392년 고려가 멸망하자 관직을 내려놓고 은거하게 됩니다. 

하지만 조선 건국 후 인재가 필요했던 조정은 황희를 찾아가 일해달라고 제안을 하죠. 황희는 고민을 하다가 나라의 이름은 바뀌었을 지 언정 하늘 아래 같은 백성이 살고 있다는 소신으로 미래의 조선을 선택하게 됩니다. 

하지만 워낙 강직했던 그는 태조 때에는 파직을 여러 번 당하고 맙니다. 하지만 태종이 집권한 이후 당시 知申事(조선 전기 왕명의 출납을 맡아 보던 정3품 벼슬, 비서실장)였던 박석명이 황희를 왕에게 추천하면서부터 황희는 정치적으로 성공가도를 달리게 됩니다. 

그러나 큰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세자였던 양녕대군이 큰 사고를 쳐 태종이 폐세자하려고 하나 황희는 적장자(嫡長子)가 왕이 되어야 한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혼자서 버팁니다. 그러자 다른 뜻이 없음을 알지만 화가 난 태종은 신하들의 뜻을 받아들여 파주로 유배를 보냅니다. 

그러자 신하들이 한양에서 너무 가깝다며 멀리 귀양 보낼 것을 상소하자 태종은 황희가 어머니를 모시고 살 수 있도록 친인척이 살고 있던 전라도 남원으로 유배를 보내게 됩니다. 남원에 유배를 와 요천강변에 있던 6대조 황감평 할아버지가 지어 놓았던 조그만 서재 터에 “광통루’라는 누락을 짓습니다. 

황희는 이곳에서 4년 정도 지내다 세종대왕의 부름을 받고 한양으로 올라가게 되죠. 그런데 세종 26년에 당대의 지식인이었던 정인지가 남원이 있는 전라도 관찰사로 내려오게 되는데 황희가 지어놓은 광통루 주변 경관의 빼어남을 보고 ‘달나라의 옥황상제가 살고 있는 광한루허부(廣寒淸虛府)가 이곳이 아니던가!’라고 감탄하며 광한루로 고쳐 부르게 됩니다. 

그 후 세조7년 부사 장의국이 광한루 바로 옆에 흐르는 요천강의 맑은 물을 끌어다가 은하수를 상징하는 호수를 만들고, 조선 중기 시가 문학의 대가인 송강 정철이 전라관찰사로 부임해 3개의 인공 섬을 지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이렇듯 광한루는 황희 정승과 정인지 그리고 송강 정철의 합작품인 것이죠. 이런 광한루가 춘향이와 이몽룡의 애틋한 사랑으로 유명해진 ‘춘향전’의 무대가 되어 세상에 드러나게 됩니다. 

광한루는 밀양의 영남루, 진주의 촉석루, 평양의 부벽루와 더불어 우리나라 4대 누각의 하나로 조선시대의 정원을 대표하며, 최근에는 인기리에 끝난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 촬영지로 유명세를 더하고 있죠. 

지금도 광한루 후문 쪽에는 황희 정승 유배 당시 생활 모습을 재현한 초당이 있습니다. 그 앞에는 누렁 소와 검은 소에 얽힌 이야기가 적혀있습니다. 

횡희 정승이 젊은 시절 논두렁을 지나다 누렁 소와 검은 소가 일하고 있는 것을 보고 농부에게 “어떤 소가 일을 잘하는가”라고 큰 소리로 물어봅니다. 그러자 농부는 황희 정승에게 다가와 귀엣말로 “누렁 소가 일을 잘 하는데 검은 소가 들으면 서운해 하니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고 일러 준다. 

이때 황희 정승은 소 같은 미물도 제 험담하는 소리는 알아 듣는다는 것을 깨닫고 한 평생 그 마음을 실천하며 청백리로 이름을 남기게 됩니다. 

황희 정승은 60여년간 6조 판서를 두루 거친 후 삼정승을 24년간, 영의정으로 18년간 재임하게 되는데 세종9년 황희는 맹사성과 함께 세종대왕을 보필해 태평성대를 엽니다. 

북방 여진족을 정벌해 국경이 탄탄 해지자 정치가 안정되고, 민심이 왕을 따르자 세종대왕은 문화 창달에 힘써 우리나라 말인 훈민정음을 창제하셨고, 아악을 정비하였으며, 관노였던 천재 과학자 장영실을 발탁해 천문학의 새로운 지평도 열었죠. 

황희 정승은 태종과 세종의 신임이 두터워 세종대왕 승하 1년 전인 87세에야 조정을 떠나 파주 반구정으로 돌아와 갈매기 벗 삼아 3년을 지내다 90세에 돌아가셨습니다.

황규만
(사)한국컨택센터산업협회 부회장
(사)푸른아시아(기후위기 대응 NGO 환경단체) 이사
(사)한국액티브시니어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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