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만의 우리가 몰랐던 역사 이야기] 임진왜란과 진주성 2차 전투의 황진 장군
[황규만의 우리가 몰랐던 역사 이야기] 임진왜란과 진주성 2차 전투의 황진 장군
  • 김민수 기자
  • 승인 2022.11.08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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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컨택센터산업협회 황규만 부회장

전쟁은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무고한 생명들이 희생되는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 전쟁이 유사이래 지금까지 끝없이 이어져 오고 있다. 지금 현재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250일 넘게 전쟁 중으로 무고한 생명들이 목숨을 잃거나 힘든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530년전인 임진년(1592년)에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다. 이를 우리 역사에서는 임진왜란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당시 조선은 연산군 이후 명종대에 이르는 4대士禍와 훈구와 사림 세력 간에 계속된 정쟁으로 나라가 분열되어 있었고, 군사적으로도 조선 초기에 설치된 국방 체제가 붕괴된 데다 율곡 이이가 십만양병설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실정이었다. 

이러할 즈음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인물이 등장하여 혼란기를 수습하고 일본 전역을 장악하였지만 목숨을 받쳐 충성한 신하와 무사들에게 나누어 줄 영지가 없었다. 따라서 해외 영토를 정복하여 이를 영주들과 무사들에게 나눠주려 했으며, 또한 군사력을 해외로 돌리면서 국내의 안정을 꾀하고 전쟁의 선봉에 자신을 반대하던 무사들을 세운다. 

이유야 어떻든 ‘정명가도(征明假道), 明으로 가는 길을 빌려 달라’며 지속적으로 조선에 사람을 보내 통신사를 파견해달라고 요청을 하자 통신사를 파견하여 일본의 실정과 도요토미의 저의를 탐지하기로 하고 1590년 3월에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성, 무사 황진 일행을 일본에  파견한다. 

1591년 3월 귀국 보고하는 자리에서 正使 황윤길(西人)은 왜가 반드시 침략할 것이라고 한 데 반해 副使 김성일(東人)은 왜가 침범할 기미가 없다는 상반된 보고를 하자 조정은 결국 부사 김성일의 의견을 쫓아 각 도에 명하여 성을 쌓는 등 방비를 서두르던 것마저 중지시켰다. 

하지만 황진 장군은 통신사 호위무사로서 지금의 일본군들은 조선의 해안가에서 노략질이나 일삼던 도둑 떼가 아니라, 전국시대 100년 전쟁을 통해 탄생한 막강한 군인들 임을 알 수 있었고, 특히 일본의 조총 기술과 왜적의 동태를 살핀 결과 전쟁이 곧 임박했음을 알고 있었기에 동복현감으로 부임하자마자 일본 침략에 대비해 철옹산성을 보수하고 군사들을 조련하며 왜침에 대비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마침내 발발하자, 동복현감이던 황진은 자신이 훈련시킨 부대원들을 데리고 참전한다. 7월, 전주성 인근의 안덕원에서 6000여명 규모의 일본군을 기습해 타격을 입혔고, 이어서 이치전투에선 2000여명의 조선 군을 이끌고 1만5000명 규모의 일본군의 공격을 물리쳐 호남지역을 지켜내는 공을 세웠다. 

이듬해 3월에는 일본군의 주요 보급로 상에 위치한 경기도 안성의 죽주산성을 지략을 써서 빼앗아 일본군 보급에 타격을 가하기도 했다. 

수적인 열세로 패배할 수밖에 없어 보이던 전투에서 기적 같은 승리를 하나씩 쟁취해 나갔던 황진 장군은 최고의 무예 실력을 갖춘 용맹한 전사였으며 수적 열세인 상황에서 두려움에 무기를 팽개치고 도망가는 병사들의 방패가 되어 싸워주고 적의 목을 베는 리더였다. 

병사들과 함께 흙과 돌을 들고 성곽을 보수하는 일도 함께 했고, 병사들의 만류에도 그들보다 더 앞에서 활을 쏘고 칼을 휘두르며, 안덕원, 이치, 웅치, 죽주산성 전투에서 잇달아 승리를 거두게 된다. 

1593년 6월 황진은 제2차 진주성 전투를 앞두고 운명의 진주성에 들어간다. 6개월 전 1592년 11월 진주성 1차 침공 때 김시민 장군에게 참패당한 설욕을 하고, 전라좌수영 이순신을 압박하려고 조선에 와 있던 거의 모든 일본군 10만명 정도가 참전한 상태였다. 

진주성에 있는 관군, 의병은 다 합쳐봐야 고작 6천 명. 전력 차이가 심해서 권율 장군, 의병장 곽재우도 진주성 전투에서 빠졌다. 황진은 충청도 병마사 이기에 자신의 작전지역이 아니었음에도 자원해서 진주성으로 들어간다. 

의형제 김해 부사 이종인 장군과  창의사 김천일과 더불어 공약을 하였으니 저버릴 수 없었고 진주성에 있는 ‘6만 명의 양민'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고립된 진주성에서 6000여명의 조선 병사들을 이끌고 10만의 일본군에 맞서 싸우고 또 싸웠다. 

일본군 역시 진주성 전투에서만 무려 1만 명 이상 숨지는 등 개전 이래 단일전투로는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입고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10만 대 6000명. 결국 2차 진주성 싸움 7일째인 6월28일, 황진 장군은 앞장서 1천여 명의 적을 쓰러뜨렸으나, 시체 더미 속에 숨어있던 저격병의 탄환에 머리를 맞아 전사하고 만다. 

황진 장군의 죽음은 이미 절망적이던 전투의 승패를 완전히 결정지은 것이나 진배없었다. 황진 장군의 죽음을 접하고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은 “황진이 죽었으니 나랏일이 어긋나게 됐다고 탄식했다”고 한다. 

그의 사망 후 치열한 백병전 과정에서 이종인이 전사하고, 창의사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회와 여러 장군들도 남강에 투신하여 전사한다. 조선왕조실록에 자주 보이는 삼장사(三壯士)라는 기록은 진주성 2차 전투에서 순국한 김천일, 황진, 최경회를 일컫는다. 

이들과 함께 순국한 민관군 7만 영령을 위로하기 위해 촉석루 동측에 정충단과 정충단비를 세웠고, 1987년에 임진대첩계사순의단을 세웠다. 

진주성 2차전투는 끝내 성을 점령당했다는 이유로 임진왜란 3대 대첩에 그 이름을 올리지도 못했지만 진주성 2차 전투의 경우 10만 왜적의 총공격을 최소 9일 동안 막아낸 미증유의 치열한 전투였고, 왜군 사상자만 3만 8천명 발생한, 아군과 적군 최대의 희생자가 발생한 임진왜란 최대의 격전지였다. 

임진왜란하면 우리는 남해를 지킨 이순신장군(한산도대첩)과 행주대첩의 권율 장군, 진주성 전투의 김시민장군을 떠올린다. 하지만 역사를 공부해보니 세 분 못지 않게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산화한 분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황진 장군(황희 정승 5대손)은 1590년 3월 통신사로 일본에 가게 되면서부터 1593년 6월28일 진주성에서 마지막으로 눈을 감을 때까지 3여 년간, 온몸을 던져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살신성인의 정신이 그 누구보다 강함을 알 수 있었다. 

전쟁기념관은 임진왜란 당시 큰 공을 세운 황 진(黃 進·1550~1593) 장군을 2022년 3월의 호국 인물로 선정했다. 

이 전투 이후, 일본군은 정유재란이 시작될 때까지 다시는 호남을 공격하지 못했으며, 이는 곧 이순신의 수군이 해전에만 전념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황규만
(사)한국컨택센터산업협회 부회장
(사)푸른아시아(기후위기 대응 NGO 환경단체) 이사
(사)한국액티브시니어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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