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만의 우리가 몰랐던 역사 이야기] 율곡 이이의 동생 이우와 고산 황기로
[황규만의 우리가 몰랐던 역사 이야기] 율곡 이이의 동생 이우와 고산 황기로
  • 김민수 기자
  • 승인 2023.01.30 08: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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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컨택센터산업협회 황규만 부회장
한국컨택센터산업협회 황규만 부회장

우리나라 동전과 지폐에는 역사적인 위인들이 등장한다. 동전에는 대부분 학이나 벼 이삭 등이 들어가 있지만 100원짜리에 유일하게 충무공 이순신 초상이 새겨져 있다. 그렇다면 지폐는 어떨까? 

지폐에 들어간 인물은 네 분 다 조선시대 사람들이다. 1천원권에는 퇴계 이황, 5천원권에는 율곡 이이, 1만원권에는 세종대왕 그리고 5만원권에는 신사임당이 인쇄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이 많을 텐데 4명의 위인 중 율곡 이이와 신사임당은 母子사이다. 즉 한 집안에서 2명이 지폐 인물로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특히 율곡 이이가 들어간 5천원권은 수험생들 지갑에 넣고 다니면 좋다는 얘기가 있는데 이유인 즉슨 율곡 이이는 남들은 한번 붙기도 어렵다는 과거에 9번이나 장원급제를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의 이름 앞에는 늘 ‘九度壯元公(9도장원공)’이란 수식어가 붙는데 이는 아홉 번(九度) 이나 장원(수석합격)을 한 분(公)이란 말이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그런 기록 보유자는 율곡 한 사람 뿐이라고 한다. 

그와 반대로 그의 아버지 이원수는 신사임당과 혼인을 해서 4남3녀를 낳았지만 나이 사십이 넘도록 과거에 급제하지 못해 결국은 음서[(蔭敍. 1~2품의 고위직을 역임한 조부(祖父) 덕에 대과 급제 없이 보임되는 것]로 관직에 나가 사헌부 감찰(정6품)직을 수행하게 된다. 

이처럼 3대에 걸쳐 고위직이 있었으면 이이의 아버지처럼 관직에 나가는 음서제가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지금 양반이라 할지라도 3대에 걸쳐 과거 급제자가 나오지 않으면 양반의 지위를 잃고 양인으로 신분이 바뀌었다고 한다. 한번 양반은 평생 양반인 줄 알았더니 그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또한 당시 과거시험에서 붙었다고 해서 모두가 관직에 나갔던 것은 아니다. 하위직인 1단계 합격자들에게는 합격증이 주어지고 성균관 입학과 고위직 응시 자격이 주어졌지만, 1단계만 합격하고 진사나 생원으로 마을에서 양반행세를 하며 사는 이들이 많았다. 

율곡 이이는 4남 3녀 중 3남으로 태어났는데 막내로 태어난 그의 동생인 옥산 이우도 엄마와 형의 그늘에 가려 크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엄마인 신사임당의 예술적인 유전자를 물려받아 거문고, 서예, 시, 그림(琴書詩畵)에 뛰어났다. 

평소에 초성이라 불리던 고산 황기로를 흠모했던 이우는 형 이이의 중매로 고산 황기로의 사위가 되어 장인의 서풍을 수용함으로써 서예에 일가를 이루게 된다. 

당시 옥산 이우의 서화를 좋아했던 선조는 정유재란에 참전했던 명나라 제독이 철군하면서 조선 선비의 서적을 구하자 “이우의 글씨는 보여줄 수 없으니 한호(한석봉)로 하여금 써서 보내라 했다”고 선조실록에 적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한석봉에 비해 이우는 인지도가 없다. 이는 한석봉이 불을 끄고 엄마와 떡 썰기와 글씨 쓰기 시합을 했던 스토리텔링과 한자를 배우는 사람들이 참고하는 천자문을 만들었기 때문이리라.

옥산 이우는 형 율곡 이이의 명성에 가려 인지도는 낮았지만 진사시에 합격해 괴산,고부 군수를 역임했고, 선정을 베풀어 후에 청백리에 올랐으며 구미 선산 사람들은 그가 시(詩) · 서(書) · 화(畵) · 금(琴)을 다 잘한다 하여 4절(四絶)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 장인 황기로는 이우의 글씨에 대해 "씩씩함은 나보다 낫지만 유려함은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조금만 공부를 더한다면 내가 미칠 바가 못된다"고 하였으며, 선조(宣祖)는 당시 이우의 서화를 즐겨 감상하여 어필서화(御筆書畵)를 상으로 내렸다고 한다. 

그는 동갑내기였던 서애 류성룡과도 학문적 교류를 했으며, 초성으로 유명했던 장인 고산 황기로와 함께 필원록(筆苑錄, 글씨로 유명하여 나라의 인정을 받음)에 올랐다.

고산 황기로는 퇴계 이황의 제자로 과거에 합격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서예에 매진했던 선비로 황기로의 작품은 당대 수많은 선비들은 물론이고 明나라에게까지 이름이 널리 알려져 수많은 이들이 칭송하고 동경에 마지않던 당대 서예 초서의 제1인자로 초성으로 불렸다. 

황기로는 용처럼 날아오르는 초서로 성리학자 김안국을 감동시켜 명나라 사절로 동행하게 되는데 자신의 초서로 명나라 대신과 학자들을 놀라게 하여 조선 학자의 위상을 높였다. 그로 인해 황기로는 초서의 대가로 당나라의 장욱을 비교하여 해동장옹(조선의 장욱)이라는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황규만
(사)한국컨택센터산업협회 부회장
(사)푸른아시아(기후위기 대응 NGO 환경단체) 이사
(사)한국액티브시니어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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