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익 컨설턴트의 소소한 일상이야기113] 영웅을 기다리며
[한상익 컨설턴트의 소소한 일상이야기113] 영웅을 기다리며
  • 김민수 기자
  • 승인 2023.02.28 08: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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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익
•푸른소나무 life plan consulting 대표
•수필가 •재취업지원 컨설턴트 
•한국생애설계사(CLP)
•뉴질랜드 변호사

영웅을 기다린다고 하면 아마도 회원 수가 18만여 명에 이르는 가수 임영웅 팬클럽인 ‘영웅시대’ 회원들이나 요즘 ‘불타는 트롯맨’이란 트로트 경연 프로그램에서 제일 핫한 황영웅(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이름이 같다)의 팬들은 귀가 솔깃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영웅’은 사람 이름이 아니라 명사 영웅(英雄)으로 ‘히어로’(Hero)를 뜻한다. 어렸을 때 유달리 좋아하던 만화 영화 주인공은 정의를 구현하며 악당을 통쾌하게 물리치는 ‘마징가 제트’나 ‘로버트 태권 브이’ 같은 슈퍼 히어로들이었다. 이 이름이 낯선 젊은이들은 할리우드에서 제작한 마블 시리즈의 영웅들을 떠올리면 된다.
 
1년 넘게 여전히 진행 중인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터에 초능력을 지닌 마징가 제트 같은 영웅이 출몰하여 전쟁을 끝낼 수 있다면 하는 공상을 해본다. 

또한 지진으로 아직도 수많은 사람의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하고 있는 튀르키예에도 로버트 태권 브이가 가서 엄청난 괴력으로 지진 잔해들을 가볍게 걷어내며 인명구조를 하는 영화 같은 장면도 그려본다. 

요즘 유행하는 챗GPT에다 ‘한국의 영웅’이 누구인지 물었더니, 예상대로 이순신 장군, 안중근 의사, 윤봉길 열사 등의 이름을 열거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오늘날의 영웅’은 누구인지 물었더니, 놀랍게도 방송인 유재석의 이름이 제일 먼저 등장했다. 그런 다음 스포츠 스타인 김연아, 박찬호, 박태환 등의 이름을 거론했다. 

무슨 근거로 이들을 영웅으로 선정했는지 궁금하여 챗GPT가 생각하는 영웅의 정의를 물었더니, 영웅은 “자신의 목숨을 바치거나, 그들의 행동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구조되거나 위로받았거나...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했을 경우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과 격려해주고... 사회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고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존재”라고 답변했다. 

지금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까지 희생하는 영웅이 필요한 시대는 아니다. 오히려 위로와 격려와 영감을 줄 수 있고,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영웅이 필요한 시대이다. 그런 의미에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스포츠 스타나 연예인들이 오늘날의 영웅이 될 수 있다.

작년에 미국 사는 지인이 다녀갔다. 아내와는 언니 동생하고 나에게는 형부라고 부를 정도로 자별한 사이였다. 자녀들을 여섯이나 데리고 늦은 나이에 미국으로 이민 간 후 연락이 끊겨서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믿으며 지냈는데 SNS를 통해 다시 연결되었다. 

얼마 후 요양원에 계신 어머님을 뵙기 위해 한국에 왔다고 연락이 왔다.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뀔 정도의 시간이 지나 만난 그녀의 얼굴에는 이민 생활의 고단함과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묻어났다. 

그녀의 이민 생활은 짐작했던 것보다 더 힘들어서 듣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 가정을 돌보지 않는 남편 때문에 밤낮으로 온갖 궂은일을 하며 고만고만한 다섯 아이와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막내까지 돌봐야 했기 때문에 하루도 편히 쉴 날이 없었다고 했다. 

남편이 경제적으로 가장 역할을 하지 않은 것뿐만 아니라 잦은 폭력으로 자녀들까지 나서서 강하게 이혼을 권유하는 바람에 결국 이혼하고 막내를 데리고 혼자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도 다행히 다른 자녀들은 잘 성장해서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고생하며 키워준 어머니를 위해 생활비 보조를 해주고 있다고 했다.

그녀가 귀국 전에 털어놓은 사실에는 반전이 있었다. 주위 사람들에게는 요양원에 계신 어머님을 뵙기 위해서 왔다고 했지만, 실질적인 목적은 임영웅 콘서트를 보기 위해서 왔다고 했다. 그래서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 지방을 순회하며 공연하는 임영웅 콘서트마다 쫓아다니며 공연을 보았다고 했다. 

중년을 넘긴 나이에 트로트 가수의 팬이 되어 생전 처음으로 덕질을 해보며 인생에서 활력을 찾고 행복해하는 팬들의 이야기는 종종 들어보았지만, 외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와 콘서트를 볼 정도의 열성 팬이 내 가까운 지인 중에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가슴앓이하며,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힘들었던 이민 생활의 어려움과 고난 그리고 슬픔의 시간을 임영웅의 노래를 들으면서 견딜 수 있었다고 했다. 그의 노래가 큰 위안을 주고 다시 일어서고 버틸  힘을 주기에 그녀에겐 임영웅이 말 그대로 ‘영웅’이다. 

갈릴레이는 “영웅을 필요로 하는 나라는 불행하다”고 했는데 어렵고 힘들게 살고 있는 나라의 사람들일수록 간절히 영웅의 출현을 바라기 때문이라고 했다. 

요즘 영웅들의 활약을 그린 모바일 웹툰이나 판타지 소설이 인기를 끌고 있다. 그만큼 마음속으로 영웅을 응원하며 원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이기도 하고, 달리 말하면 이 시대의 살림살이가 녹녹지 않고 팍팍하고 힘들다는 방증이기도 한 듯하여 한편으론 씁쓸하지만, 나만 영웅을 기다리는 게 아닌 것 같아 위안받는다.

한상익
•푸른소나무 life plan consulting 대표
•수필가 •재취업지원 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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