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훈 소장의 세상사는 이야기] 현대판 우공이산 "마운틴 맨”
[최승훈 소장의 세상사는 이야기] 현대판 우공이산 "마운틴 맨”
  • 김민수 기자
  • 승인 2023.05.11 0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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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훈
•한국생애설계포럼 대표
•한국생애설계연구소장

중국 춘추 시대의 사상가 열자(列子)의 문인들이 열자의 철학 사상을 기술한 열자 탕문편(湯問篇)에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나이가 이미 90세가 다 된 우공이라는 사람은 이 두 산이 마주 보이는 곳에 살았다. 

하지만 두 산이 북쪽을 가로막은 탓에 길을 오가려면 돌아가야 해서 몹시 불편하니, 산을 옮겨 불편을 없애겠다고 다짐했다. 

“앞날이 얼마 남지 않은 내가 죽더라도 자식이 남아있어 그 자식이 손자를 낳고 손자가 또 자식을 낳으며 그 자식은 또 자식을 낳아서 자자손손 끊이질 않을 것이다. 산이 아무리 커도 더 늘어나지 않으니 언젠가 산이 깎여 평지가 될 날이 올 것이다."

우공이 ”일을 시작하면 언젠가는 산이 없어지게 마련이다.“라는 말을 듣고 있던 산신령들이 머물 곳이 없어지니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산신령들이 옥황상제에게 하소연했다. 옥황상제는 그 말을 듣고 우공의 정성에 감동하여 하늘나라에서 가장 힘센 두 신에게 산을 등에 지게 해 하나는 삭동 땅으로, 다른 하나는 옹남 땅으로 옮겨 놓았다. 그 후부터 그곳 주위에는 낮은 언덕조차 보이지 않았다. 

우공이 옥황상제를 감동시켜 끝내 산을 옮겼듯 무슨 일이든 우직하고 뚝심 있게 밀고 나가면 못할 게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전설적인 이야기이지만 현대판 ‘우공이산’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인도 북부에 고원 지역에 있는 비하르(Bihar)주 가야(Gaya) 지역 ‘겔라우르(Gehlaur)’라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오지마을로 1,000여 명의 주민들이 외부로부터 철저히 고립된 채 전기나 수도 시설도 없이 자급자족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곳 작은 산골 마을에서 아내와 함께 살던 농부 ‘다시라스 만지히(Dashrath Manjhi 1934)’는 이 마을에서 태어난 후 단 한 번도 마을을 떠난 적 없이 그곳에서 사랑하는 아내 ‘파군니 데비(Phaguni Devi)’와 결혼해 자녀를 낳고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그가 안타까운 이유로 사랑하는 아내 ‘파군니’를 먼저 하늘로 보내고 말았다. 

1959년 8월 매일 일터로 점심 도시락을 가져다주던 아내 ‘파군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아내 ‘파군니’는 남편에게 가던 중 발을 헛딛어 그만 낭떨어지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아내를 찾아 나선 ‘만지히’는 다친 채 쓰러져 있는 아내 ‘파군니’를 발견했고, 곧바로 그녀를 들어 업고 병원이 있는 시내로 정신없이 달려갔다. 

‘겔라우르’ 마을에서 병원이 있는 시내까지 직선거리는 3km에 불과했지만, 그사이를 돌산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산 주변을 무려 55km를 돌아가야 했다. 이는 성인 남성 걸음으로도 10시간 이상 소요되는 먼 거리였다. 

오지마을인 겔라우르는 자전거나 자동차 같은 교통수단이 전혀 없어 도보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시간이 지체되면서 아내 ‘파군니’는 남편 ‘만지히’의 품속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병원 치료 한 번 받지 못하고 허망하게 사랑하는 아내를 떠나보낸 ‘만지히’는 슬픔에 잠겨있는 대신 길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곧바로 자신의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염소 세 마리를 팔아 정(釘)과 망치를 구입한 뒤 시내와 마을을 가로막고 있는 돌산을 깍기로 굳게 다짐했다. 

왜소한 체구를 가진 ‘만지히’가 정말 길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만지히’의 머릿속에는 사랑하는 아내 ‘파군니’가 있었고 “어떻게든 길을 만들어야 한다“는 일념뿐 이었다. 그는 하루도 망치질을 멈추지 않았고 그렇게 시간은 점점 흘러갔다. 그리고 마침내 돌산을 뚫어 길을 완성하게 되었다. 

"처음 길을 뚫기 시작했을 때 많은사람 들이 저를 비웃었어요. 제게 도움을 준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비웃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동이 틀 때부터 어둠이 내릴 때까지 하루 종일 산을 깍고 또 깍았다. 심지어 생업도 포기한 채 길을 만드는 일에만 매달리면서 그의 자녀들은 끼니를 굶을 지경에 까지 이르기도 했다. 

그럼에도 길을 만드는 것을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산을 깍고 동이 트면 다른 사람의 밭에서 일하며 돈을 벌고 해가 지면 다시 새벽까지 산을 깍는 일을 매일 반복했다. 급기야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는 생활이 반복되면서 ‘만지히’의 몸이 점점 쇠약해 졌지만 그는 끝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1960년에 만들기 시작한 길이 뚫린 것은 ​1982년으로 무려 22년간이나 걸려서 완성되었다. 매일 망치와 정을 들고 돌산에 올랐던 ‘만지히’는 마침내 총 길이 100m, 폭 9.1m, 높이 7.6m의 길을 낼 수 있었다. 돌산을 깨는 작업을 마친 후에는 행정기관에 도로의 포장을 요구하는 민원을 지속적으로 제기하기도 했다.

망치와 정으로 22년간 단 하루도 쉬지 않고 길을 만들었던 그의 집념이 불가능해 보였던 꿈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길이 생기자 그의 바람대로 55km가 넘던 시내까지의 거리가 불과 3km로 단축되었다. 

주민들은 ‘만지히’를 칭송하며 그를 “마운틴 맨”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얼마 후 이 사실은 언론을 통해 인도 전역에 알려지게 되어 ‘만지히’는 집념과 끈기의 사나이로 추앙받게 되었다. “이런 일은 내가 마지막이어야 한다.” 자신이 겪은 비극을 다른 사람들이 겪지 않도록 돕고 싶었던 마음뿐이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그렇게 ‘만지히’가 만들어낸 도로 덕분에 마을 사람들은 55km가 아닌 3km 만 걸어가면 옆 마을로 갈 수 있게 되었다. “만약에 제가 이 일을 하지 않았다면 누구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 미친 사람 덕분에 이제 아이들은 학교에 갈 수 있게 되었고 어른들은 더 나은 직업을 찾아 먼 지역으로까지 다녀올 수 있게 되었다. 아픈 사람들이 의사에게 쉽게 갈 수 있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비하르 주정부 역시 ‘만지히’의 공로를 기리는 의미로 표창장과 상금을 수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그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을 뿐"이라며 이를 거부하고, 대신 사람들이 통행하기 편하도록 길을 포장해 주길 원했고, 2007년 73세에 그가 사망하고 4년이 흐른 뒤 인도 정부는 마침내 겔라우르 마을로 가는 도로를 깔끔하게 포장하여 완공했다. 

‘만지히’가 처음 돌산을 깨기 시작한 지 52년 만의 일이었다. 현재 그가 살았던 ‘겔라우르(Gehlaur)’마을은 '다시라스' 마을로 불리고 '다시라스 만지' 병원도 지어지게 되었다. 비하르 주 정부가 길 위에 도로포장 작업을 완공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만지히’가 73세 나이에 숨을 거두자 그의 장례식은 비하르주가 직접 주관을 했고 ‘겔라우르’ 마을 주민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장례식에 참석해 마운틴 맨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한다. 무려 22년 동안 돌산을 깍아 길을 만든 집념과 끈기의 사나이 ‘다시라스 만지히’, 그의 이야기는 2015년 “만지히-더 마운틴 맨”이라는 제목의 영화로 제작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이는 현대판 "우공이산(愚公移山)"이 결코 설화 속 의 ‘우공이산’이 아니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꿈 만 가지고는 성공할 수 없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과 희생이 있어야 한다. 노력과 희생이 없는 꿈은 공상에 불과하다. 

지금 많은 사람이 누리는 편의는 누군가의 노력과 희생의 산물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삶의 질과 행복이 결코 저절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수많은 시련과 노력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행동하면 행복은 가까이 다가올 것이다.

최승훈
•한국생애설계포럼 대표
•한국생애설계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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