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길 CEO칼럼] 6.25 전쟁과 가평고(加平高) 그리고 명신고(明新高)
[전대길 CEO칼럼] 6.25 전쟁과 가평고(加平高) 그리고 명신고(明新高)
  • 김민수 기자
  • 승인 2023.06.28 06: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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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대   길
(주)동양EMS 대표이사, 수필가
국제PEN 한국본부 이사 

2023년 6월 25일은 대한민국 국군 62만 명과 UN군 15만 명이 희생당한 동족상잔(同族相殘)의 6.25 전쟁이 발발한 지 73주년이 되는 날이다. 

대한민국의 영토수호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6.25전쟁에 참전한 나라는 미국, 그리스, 남아공, 노르웨이, 뉴질랜드, 룩셈부르크, 벨기에, 스웨덴, 에티오피아, 영국, 이탈리아, 인도, 콜롬비아, 태국, 튀르키예, 프랑스, 필리핀, 캐나다, 호주, 덴마크 등 16개 국가다. 전쟁 물자를 지원해 준 나라는 독일, 모나코, 에콰도르, 인도네시아, 파라과이, 브라질, 아르헨티나. 이란, 대만, 레바논, 사우디아라비아, 아이슬란드, 오스트리아, 이스라엘, 자메이카, 멕시코, 스위스 이집트, 칠레, 헝가리 등 40개 국가다.
 
캐나다는 6.25전쟁 때 2만 7,000여 명을 파병했으며 ‘가평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가평 전투’는 1951년 4월 23일부터 25일까지 캐나다, 영국, 호주, 뉴질랜드 연합군 27여단이 중공군 118사단과 가평 계곡에서 벌인 전투다. 

2대대를 담당한 캐나다군은 서울로 진격해 함락하려는 5배나 많은 중공군 병력의 공세를 필사적으로 저지했다. 만약 캐나다군이 후퇴했다면 서울은 곧바로 적화되었을 것이다. 

캐나다군은 2박 3일에 걸친 전투에서 1,000여 명의 중공군을 사살했는데 캐나다군 10명이 전사하고, 23명이 부상했다. 전쟁 흐름을 바꾸고 결과적으로 한국 역사를 바꾼 위대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전공(戰功)이었다. 

캐나다 Ontaria주 Niagara폭포 옆 무명용사 묘지에 인접한 페어뷰 묘지에 <캐나다군 6.25전쟁 전투 승전비>가 있다.             

 6.25전쟁 미군 참전용사(Milton Com,,,)들이 가평고 졸업식 참석(2014.2)
 6.25전쟁 미군 참전용사(Milton Com,,,)들이 가평고 졸업식 참석(2014.2)

그런데 6.25전쟁 중에 개교한 경기도 가평고등학교의 설립 유래(由來)를 밝힌다.  
경기도 가평고등학교(학생 582명)는 6.25전쟁에 참전했던 미군 40사단 15,000명 장병이 1952년에 세운 학교다. 

미 40사단에서는 311명이 전사했으며 1,180명이 부상을 당했다. 가평고등학교는 6.25 전쟁 중에 ‘Joseph Clelant 미 보병 40사단장(★★)’이 경기도 가평에서 전투 중에 150여 명의 학생들이 천막 안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하여서 미군 40사단 장병들의 성금을 모아서 가평고등학교를 세운 것이다. 

1952년 한국전 당시 가평에 주둔했던 미 제40사단장은 미군 장병 15,000명이 각자 U$2씩 갹출(醵出)한 U$30,000를 모아서 가평중학교를 세웠다. 71년 전의 U$2달러의 화폐 가치는 지금의 U$2 가치와는 비교할 수 없는 고귀한 성금이었다. 

미 40사단 공병(工兵)들과 가평 주민들은 밤낮으로 학교 건립공사를 해서 40여 일 만에 교실(10개)과 화장실 수위실 등 학교 건물을 완공했다. ‘Joseph Clelant 사단장’ 이름으로 학교 이름을 지으려 했으나 사단장이 이를 완강하게 거절했다. 

그래서 미 40사단 장병 중 6.25전쟁에서 최초로 전사한 ‘케네스 카이사 Kenneth Caesar 하사(19세)’ 이름을 따서 '카이사 중학교(Caesar Middle School)'로 명명했다.

가평지역 학부모들은 밤낮으로 들려오는 포성 소리에 하루에 몇 번씩 방공호로 몸을 숨겨야 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어린 학생들을 위해서 천막 학교를 세우고 수업을 이어갔다. 

못 배운 한(恨)을 품은 한국의 부모들은 자식만큼은 학교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신념으로 전쟁 중에도 천막 학교에서 아이들을 교육시켰다. 가평 마을 학부모들의 열정적인 성원도 뒤따랐다. 

1972년 학교명을 '가평 고등학교(加平 高等學校)'로 개명, 표지석(標識石)에 새겼다. “미 보병 40사단 장병들이 한국의 미래 지도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이 학교를 세웠다”고. 

1953년 휴전이 되고 미 40사단은 철수했다. 하지만 미 40사단 장병들은 1954년 첫 졸업식에 장학금을 모아 보내주었다. 그 후 해마다 U$500의 장학금을 갹출해서 보내주었다. Joseph Clelant 사단장이 사망한 1975년까지 '가평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보냈다.

“내 연금 일부를 가평고 학생들에게 보내 달라”는 유언(遺言)에 따라 그의 아내는 2004년 사망할 때까지 꼬박꼬박 장학금을 보내왔다. 이러한 고마운 역사적 사실을 아는 한국인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참으로 안타깝다. 학생들 교과서에 마땅히 실어서 알려야 한다. 

경기도 가평고등학교처럼 감동을 주는 진주 명신고등학교(明新高等學校)도 있다. 사회로부터 받은 걸 되돌려준 김 장하 선생이 세운 진주 명신고등학교(학생 627명) 이야기다. 

김 장하 선생은 19세에 한약사 자격증을 땄다. 1963년 고향 경남 사천에서 한약방을 개업했다. 1973년 진주로 이전, <남성당 한약방>을 50년간 운영했다. 한약방을 찾는 고객이 하도 많아서 마이크로 순서를 호명할 정도였다.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 점심시간에는 빵을 나눠주었다. 전국 한약방 가운데 세금을 가장 많이 납부했다. 

  <김 장하 선생... 1944~현재 80세>
  <김 장하 선생... 1944~현재 80세>

김 장하 선생은 20대 젊은 시절부터 가난한 학생들에게 남몰래 장학금을 주기 시작하여 약 1,000명의 학생들이 혜택을 받았다. 그는 40대 나이에 100억 원(현재 약 2,000억 원)의 돈으로 1984년에 설립한 사립학교 ‘명신고등학교’를 국가에 헌납했다. 현재는 공립학교가 되었다. 

30억 원이 넘는 그의 사재(私財)도 ‘국립 경상대학교’에 기부했다. 그리고 진주의 사회, 문화, 역사, 예술, 여성, 노동, 인권 단체 등을 지원했다. 김 장하 선생은 명신고등학교를 설립한 후 학교 재단 이사장 사무실을 없애고 양호실로 쓰도록 한 점도 특이하다. 

그는 시내버스나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출근했다. 김 장하 이사장이 자전거를 타고 학교 안으로 출근하는 모습은 학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진주 명신고등학교 전경>
 <진주 명신고등학교 전경>

명신고등학교 이사장 퇴임식 때 김 장하 선생의 퇴임사 내용이다. 

"부끄러운 고백입니다마는 저는 가난 때문에 하고 싶었던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과 같은 한약업에 어린 나이부터 종사하게 되어 작으나마 이 직업에서는 다소 성공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제가 명신고등학교를 설립고자 하는 욕심을 감히 낸 것은  오직 두 가지 이유입니다. 

즉, 내가 배우지 못했던 원인이 가난이었다면 그 억울함을 다른 나의 후배들이 가져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약업에 종사하면서 내가 돈을 번다면 그것은 세상의 병든 이들, 곧 누구보다도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거둔 이윤이었기에 그것을 내 자신을 위해서 쓰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2가지 요건을 충족시키는 가장 좋은 일이 바로 장학 사업이며 또 학교의 설립이었습니다." 

김 장하 선생은 사회로부터 받은 것보다 더 많이 되돌려 준 훌륭한 대한국인이다. 명문고(名門高)인 경기 가평고등학교와 진주 명신고등학교 건립에 관한 비화(祕話)를 세상에 알린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이제야 알 게 되어 다행이다.  

언제부터인가 ‘6.25 전쟁’을 '한국 전쟁'이라는 방송사와 언론사 등이 비일비재하다. ‘6.25 전쟁’인가? '한국 전쟁'인가? 어떤 게 맞는지  헷갈려 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그래서 충남경찰청장과 울산경찰청장을 지낸 ’조 용연 수필가‘가 한국인에게 외친다. 

충남경찰청장/울산경찰청장을 역임한 조 용연 수필가(PEN 정회원)
충남경찰청장/울산경찰청장을 역임한 조 용연 수필가(PEN 정회원)

"근래 들어 <6.25전쟁>을 <한국전쟁>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늘어간다. 외국인이야 ‘Korean War’라고 부르니 '한국전쟁'이 맞는다고 치자. 그러나 우리 한국인은 '6.25전쟁'으로 불러야 마땅하다. 

<한국전쟁(Korean War)>이란 말에는 남침(南侵)인가 북침(北侵)인가란 논쟁(論爭)을 은근슬쩍 피해 가는 속셈이 숨어 있다. 객관(客觀)을 가장(假裝)한 중립적(中立的) 단어이다. 우리는 잊지 못할 날을 숫자로 기억하는 민족이다. 3.1절이 그렇고, 4.19가 그렇다. 5.18이 그렇고. 8.15가 그렇다. 

6.25전쟁 제73주년 기념행사 입장 카드(2023년 6월25일) 
6.25전쟁 제73주년 기념행사 입장 카드(2023년 6월25일) 

결론적으로 국가보훈부가 정한 국가 기념일의 공식 명칭은 <6.25전쟁>이다. <한국전쟁>이 아닌 이유다. 지금도 어떤 정치인이 <6.25전쟁>을 <한국전쟁>, <미중전쟁>이라고 떠드니  어처구니가 없다. 한심하다. 결론적으로 우리 한국인은 <한국전쟁>이 아니라 <6.25전쟁> 으로 쓰고 불러야 한다.

       전   대   길
(주)동양EMS 대표이사, 수필가
국제PEN 한국본부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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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재연 2023-06-30 16:24:46
감동의 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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