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길 CEO칼럼] 신사(Gentleman), 기술자(Engineer), 프리랜서(Freelancer)
[전대길 CEO칼럼] 신사(Gentleman), 기술자(Engineer), 프리랜서(Freelancer)
  • 김민수 기자
  • 승인 2024.04.24 05: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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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대   길
(주)동양EMS 대표이사, 수필가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신사(紳士/Gentleman)와 기술자(技術者/Engineer)란 말은 언제 생겨났을까?
‘신사(紳士·Gentleman)’란 말은 15C 영국에서 처음 생겨났다. 1455~1485년, 영국 붉은 장미 문양의 ‘랭커스터(Lancaster)家’와 흰 장미 문양의 ‘요크(York)家’ 간에 일어난 왕위 쟁탈(王位 爭奪)을 위한 장미전쟁(薔薇戰爭/Wars of Roses) 때문에 귀족의 숫자가 크게 줄었다. 

영주권(領主權)이 없는 부농(富農)들이 명문가 계층(階層/Gentry)에 편입되어서 젠틀맨(Gentleman)이라고 불리었다. 그리고 산업혁명 후에는 자본가를 포함해 상류층 전반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신사협정(Gentleman’s Agreement)’이란 말은 19C 영국 의회 기록에 등장했다. 20C 초에 미국에서도 ‘물가 통제를 지향하는 신사들 간의 합의’란 문구가 나타났다.        

엘리아 카잔(Elia Kazan/1909~2003)
                      엘리아 카잔(Elia Kazan/1909~2003)

‘신사(紳士/Gentleman)’란 말은 1947년 ‘엘리아 카잔(Elia Kazan/1909~2003) 감독’의 영화 <젠틀맨 어그리먼트(Gentleman’s Agreement)>가 큰 반향(反響)을 일으키면서 태동(胎動)했다. 그는 영화 ‘에덴의 동쪽(East of Eden)’의 감독이기도 하다. 

영화 속의 신사협정은 반유대인(反猶太人) 감정을 당연시하는 사회 저변 무언(無言)의 합의를 뜻한다. 외교, 법률관계 등에서 통용되는 신사협정은 성명, 선언 등 문서화하지만 법적 구속력이 없고 조약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상호 간 신뢰를 바탕으로 법적 강제성은 없다.             

기욤 드 노르망디 공작  
기욤 드 노르망디 공작  

‘엔지니어(Engineer)'란 기술자를 처음 고용한 사람은 프랑스 로베르(robert) 1세인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의 귀족, ‘기욤 드 노르망디 공작(AD1000~1035)‘이다. 

왕이 되려는 야망을 불태웠던 그는 영국이 혼란에 빠진 틈을 노렸다. 영국을 급습(急襲)해서 전투를 벌여 영국에 이겼다. 그 후 노르망디 공작은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를 통치하는 왕이 되었다. ‘정복자 윌리엄'이라고 불리며 유럽 역사에 길이 남았다. 

그러나 당시 영국인들은 프랑스에서 나고 자랐으며 영어를 제대로 모르는 윌리엄 왕을 영국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이방인(異邦人) 취급을 했다.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윌리엄 왕은 자신이 데리고 온 소수의 프랑스 기사들에게 공을 들였다. 

영국인들의 일으킬 반란에 대한 대책으로 목공(木工), 석공(石工) 중에서 머리가 좋고 손재주가 뛰어난 사람들을 모아 싱크 탱크(Think-Tank)를 만들었다. 

정복자 윌리엄이 영국을 공격한 300년 후에는 아예 엔지니어들이 나라 흥망의 열쇠를 쥐고 있었다. 화려한 언변으로 사람들을 잘 속이거나 꾀가 많아서 특별한 일을 손쉽게 해내는 사람을 보면 우리는 “타고났다"고 한다. 

‘Genius’란 라틴어는 '타고난 사람'이란 뜻이다. '머릿속에 꾀가 잔뜩 든 천재(天才) 기질이 있는 사람'이란 의미로 영국인은 정복자 윌리엄의 싱크탱크를 '엔지니어(in geniu-lor)'라고 불렀는데 점차 발음이 변화, ‘엔지니어(Engineer)’가 된 것이다. 

자동차 내연기관인 엔진(Engine)을 다루는 기술자로부터 ‘엔지니어(Engineer)‘란 말이 유래했을 것이란 필자의 지레짐작은 틀렸음을 나중에 알았다. 

1453년 튀르키예 황제는 로마제국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침략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은 엔지니어링(Engineering)의 최고봉이었다. 

삼중으로 설계된 성벽은 적군이 절대로 뚫고 침입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장치를 만들었다. 건축공법도 탁월해서 적군이 함부로 넘어올 수 없었다. 그 당시 엔지니어로 가장 많이 고용된 사람들은 예술가(藝術家)였다.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공책(空冊)에는 기발한 발명품이 많이 그려져 있다. 하늘을 날 수 있는 기계, 장갑차 등 수많은 무기들이 말이다.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밀라노에서 실제 엔지니어로 일했음을 알 수 있다. 

자유직업자(自由職業者) 프리랜서(Freelancer)는 언제 어떻게 생겨났을까?
옛날 중세 시대에는 왕이나 귀족은 용병단과 계약해서 전쟁을 벌였다. 이들 중에는 용병단과 떨어져 전장에서 전투를 벌이는 병사들이 있었다. 

당시에는 창기병(槍騎兵/Lancer)이 보병(步兵)이나 궁병(弓兵)을 데리고 있는 형태가 많아서 용병과 계약할 때 창(槍)의 개수가 하나의 전투단위로 계산되었다. 

그런데 프리랜서(Freelancer)란 적(敵)과 계약하지 않은(free) 전투단위(lance)로서 어떤 영주에게도 소속되지 않은 장창병 혹은 창기병을 말한다. 

석궁병과 중기마병, 경기마병으로 이루어진 용병단에 장창병이 500명이면 전투 병력이 2,000명이나 되는 엄청난 용병단(傭兵團)이었다. 1960년대 퇴계로 극장에서의 ‘부러진 창(槍/Broken Lance)'이란 서양 영화를 보았던 기억이 새롭다.    

유럽의 중세 말에는 영주나 국왕의 군대만으론 영토를 지키는 게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지리에 밝은 자들이 모여 용병회사를 만들었으며 용병회사는 전문적인 용병을 고용했다. 최고급 용병인 석궁병과 장창병이 가장 큰 인기를 끌었다. 

특수목적 용병군으로 투르크인으로 구성된 대포를 조작하는 기술 용병도 생겨났다. 장창병만으로 이루어진 스위스 용병단을 포함하여 장창병 또는 창기병만으로 이루어진 용병단을 최고급 용병단으로 꼽았다.    

   창기병(槍騎兵)
                           창기병(槍騎兵)

창기병(槍騎兵)이나 장창병(長槍兵)에서 유래된 프리랜서 역사를 잘 이해 못하면 용병을 돈에 이끌려 다니는 살인마(殺人魔)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용병은 그 당시 기사만큼이나 존경받는 직업이었다. 

참고로 창기병을 기사와 혼동하는 경우가 있었다. 기사는 기사도를 신성시하는 무장들이며 대부분 귀족으로 구성된 엘리트 집단이다. 

창기병은 수많은 전투에서 척후병이나 후방의 방어 임무를 맡았던 귀족이 아닌 직업적으로 무장(武裝)한 일반 병사였다.

       전   대   길
(주)동양EMS 대표이사, 수필가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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