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길의 CEO칼럼] 경주 서봉총(瑞鳳冢)과 웁살라(Uppsala) 고분(古墳)
[전대길의 CEO칼럼] 경주 서봉총(瑞鳳冢)과 웁살라(Uppsala) 고분(古墳)
  • 편집국
  • 승인 2020.07.08 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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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대   길
(주)동양EMS 대표이사, 월남전 참전용사, 
국제PEN 한국본부 이사,  수필가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1871~1922)’가 말했다.
“여행(旅行)이란 새로운 풍경을 주마간산(走馬看山)으로 보는 게 아니다.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라고. 그래서 나는 새로운 눈을 갖기 위해 세계를 여행하며 우리 것을 더 알고자 힘쓴다. 

그래서 “몸은 ‘밖’에 있어도 마음은 ‘내 안’에 있다”고 다짐하며 넓은 세상을 바라보며 짬날 때마다 발걸음을 옮기곤 한다. KAL-MAN 출신인 나는 해외 보다는 국내 명승지나 명산대찰(名山大刹)을 둘러보길 좋아한다. 

2015년, 어느 날 서점을 찾았다. 1970년대 세계적인 여행가, 김 찬삼 교수와 견줄만한 세계적인 자전거 여행가인 차 백성 경찰대학 교수의 <American Road>, <Japan Road>, <Europe Road>란 ‘자전거 여행기 3종 Set’에 눈길이 꽂혀서 즉석에서 3권의 책을 구입했다. 

그러고 나서 차 백성 교수의 책을 손에 잡자마자 3일 만에 독파(讀破)한 적이 있다. 최근 발틱(3국), 스칸디나비아(3국)과 러시아 등 7개국을 여행한 차 백성 교수가 <North-Europe Road>을 4번째로 펴 낼 예정이다. 

곧 출시할 신간 내용 중 한국인이 꼭 알아야 할 내용을 차 백성 교수(Daegila와 義弟)의 사전 동의를 받아 아래에 담는다. 

                       - 아        래  -

북 구라파의 베니스라 불리는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은 호젓한 숲길과 거울 같은 호수, 도심을 촘촘히 얽어놓은 물 길 등이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사람들의 표정도 밝고 쾌활하며 친절하다. 그러나 스웨덴의 매력은 눈에 보이 지 않는 곳에도 있다.         

스웨덴 지도 
스웨덴 지도 

Sweden의 고도(古都) 웁살라를 향해서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보니 스톡홀름의 하늘이 잔뜩 찌푸려 있다. 비라도 내리면 금쪽같은 시간을 꼼짝없이 숙소에  갇혀있어야 한다. 이럴 땐 장소를 바꿔보면 혹시 맑은 날씨를 기대해 볼 수도 있다.         

    경주 신라왕릉을 닮은 스웨덴 웁살라 고분
    경주 신라왕릉을 닮은 스웨덴 웁살라 고분

호스텔 데스크에 문의하니 “스톡홀름 북쪽으로는 날이 개이고 있다”고 한다. “잘됐구나, 이것도 여행 운이다”하고 단출한 행장으로 북쪽으로 60km 정도 떨어진 웁살라(Uppsala)를 향해 페달을 돌렸다. 예상은 적중했다. 북으로 올라갈수록 서서히 맑은 하늘을 드러나고 있었다. 웁살라는 인구 20만 정도의 옛 향취 그윽한 도시다. 과거에는 정치와 종교, 문화의 중심지였다. 현재는 스웨덴의 네 번째로 큰 도시이다. 근래에 들어 현대식 건물이 많이 생겨났지만 옛 거리도 잘 보존되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랜드 마크 격 건물인 웁살라 대성당이 우뚝 솟아 있다. 신 고딕 양식으로 첨탑의 높이는 무려 118.7m,  어디서나 잘 보여 웁살라에서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75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북유럽 최대 규모의 성당이다. 

원래는 가톨릭교회로 지었지만 16세기에 와서 루터란 교회(Lutheran Church,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를 신봉하는 교파)로 바뀌었다. 이곳에 스웨덴 왕국의 첫 번째 왕이었던 바사 왕 부부를 비롯한 왕족, 린네 등 유명인사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 감라 웁살라에서 떠오른 경주>
웁살라에 도착하자마자 외곽지역인 ‘감라 웁살라’를 향해 페달을 밟았다. 스웨덴 말로 ‘감라’는 ‘old’란 뜻이다. 30분 정도 달렸을까,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경관이 펼쳐진다. 멀리서 보니 제주도에 널려있는 작은 ‘오름’과 같다.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니 옛 스웨덴의 고분 300여기(基)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아니, 이렇게 비슷할 수가!”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너무나도 눈에 익숙한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옛날, 옛 스웨덴과 신라가 서로 교류하며 봉분을 쌓았을 리 만무했지만 눈앞에 펼쳐진 엄연한 현실이었다. 봉분의 크기나 부드러운 곡선이 경주 왕릉과 너무나 흡사했다. 그런데, 나보다도 100여 년 전에 이런 의문을 품었던 왕위 계승을 앞둔 스웨덴 왕족 한 사람이 있었다. 
                           
<생각은 멀리 한국의 경주로 날아갔다>
정확히 말하면 노서동 고분군인 대능원 서봉총(瑞鳳塚)이다. 

   서봉총 
   서봉총 

 축조 시기는 451년(장수왕 39년)이었고, 규모는 지름36m,높이 9.6m이다. 고분의 형식은 덧널을 넣고 주위와 위를 돌로 덮은 다음 그 위에 봉토를 씌운 신라 특유의 돌무지덧널 무덤(績石木槨墳)이다. 

서봏총금관
서봏총금관

이 고분 발굴에 스웨덴의 ‘구스타프 6세 아돌프 왕세자(1882-1973, 현재 국왕 구스타프16세의 할아버지)’가 참가했던 것이다. 지금은 평지가 된 벌판위에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덩그러니 화강암 비석 하나가 놓여있다. 그 위에 음각된 비명(碑銘)이다. <서전국왕 구스타프 6세 아돌프 폐하 서봉총 발굴 기념비, In memory of the historic excavation by His Majesty King Gustaf VI Adolf of Sweden>

<고분 발굴에 참가한 스웨덴 왕세자>
왜 스웨덴 왕세자가 경주에 와서 발굴에 참가했을까? 세월의 시계를 거꾸로 돌려 보자. 일제 강점기인 1926년, 조선총독부는 경주 고분군 발굴을 시작했다. 

3대 조선 총독 사이토(薺藤 實,재임1919-1927)는 전임자의 강압무단 통치에서 형식상으로는 문화통치정책으로 방향을 바꾼 자였다. 명분은 조선 고분연구였지만 실상은 빛나는 유물을 수탈해 민족혼과 민족문화를 말살하고, 봉토를 경주역 기관차고 건설에 쓰기 위해서였다. 

이무렵 일제는 전국에 걸쳐 민족정기가 서린 곳- 산에는 쇠말뚝을 박고, 평지는 신작로(新作路)란 이름으로 길을 새로 만들었다. 일본은 조선 풍수사상에 입각해서 나라를 되찾으려는 인재 출현의 싹을 짤라 버릴 심산으로 이런 몹쓸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이때 마침 스웨덴의 왕세자 부부가 신혼여행 차 일본을 방문, 동경에 체류 중이었다. 그는 저명한 고고학자였다. 왕손이 왜 고고학을 공부했을까? 19세기 들어 스웨덴은 러시아와의 ‘북방전쟁’에서 패해 국민들의 자존감이 무너졌다. 이들은 지난 천년이 넘은 바이킹 선조들이 이루었던 업적을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그 일환으로 수 십 년에 걸쳐 이곳 감라 웁살라 왕족들의 고분 발굴을 완성, 국민의 자긍심을 되찾았다.

“그러면 서봉총으로 하겠습니다.” 일제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통해 조선을 병탄했고, 이를 발판으로 소위 ‘대륙진출’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진 유럽 나라들을 벤치마킹하려고 진력했다. 이때 마침 스웨덴 왕세자 부처가 일본여행 중 동경에 머무르고 있었다. 

일제는 북유럽 강국 스웨덴의 환심을 사기위해 경주 고분 발굴 참여를 제의했다. 이 방면에 조예가 깊은 세자는 이를 쾌히 수락했다. 10월9일 관부연락선으로 부산에 도착, 경주에 와 ‘경주 최부자 집’을 숙소로 정했다. 이튿날부터 구스타프 왕세자는 고분 발굴에 동참, 우리에게 친숙한 느낌의 찬란한 금관(높이 30.7Cm 지름 18.4㎝, 보물 339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을 발굴해 냈다. 

그날 저녁 최 부자의 고풍스러운 99칸 저택에서 구스타프를 위한 순 한식 만찬연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조선총독부의 발굴 책임자 고이즈미(小泉顯夫)는 “폐하의 나라인 스웨덴의 한자명인 서전국(瑞典國)의 이름을 따 이 고분의 명칭을 서전총으로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구스타프는 정색을 하며 “천년이 넘는 신라 찬란한 왕실무덤을 내 나라 이름으로 할 수는 없다. 금관에 봉황(鳳凰) 문양이 있으니 봉황대로 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말했다.

이에 머쓱해진 고이즈미는 “그러면 서전국의 ‘서(瑞)’자와 봉황의 ‘봉(鳳)’자를 따서 서봉총(瑞鳳塚)으로 하겠습니다.”고 해서 서봉총(瑞鳳塚)으로 굳어졌다. 조선총독 사이토는 귀국길에 오른 세자에게는 고려청자를, 세자빈 루이즈에게는 출토품 순금 귀고리 한 쌍을 제 마음대로 선물했다. 

<과거는 미래를 보는 거울>
“누구 맘대로? 국권 침탈도 모자라 국보급 유물을 멋대로 나눠주다니...?”
여태까지 참고 또 참아왔던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이것은 공허한 메아리일 뿐, 영혼이 없어진 강토에 일제는 무슨 짓인들 못 했겠는가? 답례품은 스웨덴 왕실에 잘 보관되어있다 하니 다행이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꼭 반환받아야만 할 우리 조상의 유산이다. 해외로 유실된 보물이 어디 이것뿐이랴 만은....? 나라 빼앗긴 못난 후손들의 아픈 역사를 지구 반대편 이역 땅 스웨덴에서 피눈물 흘리면서 절감했다. 

세상을 구석구석 여행하다보면 무심히 지나치는 곳이나 사물에서 우리의 과거를 발견하고는 전율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러나 참담했던 시대의 아픔도 세월이 흐르면 엷어지게 마련이다. 100년 전의 망국은 낡은 역사책의 한 장(章)이 아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다. 나는 이 말을 되새기며 자전거에 올랐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하루해가 짧게 느껴졌다. 석양이 비끼는 고분을 뒤로하고 북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웁살라 대학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안녕, 감라 웁살라여!

위와 같은 역사상 슬픈 이야기는 학생들이 공부하는 국사(國史) 교과서에 지체 없이 실려야 한다. 이런 슬픈 역사적 진실을 아는 한국인이 없다. 

그럴진대 우리나라 역사를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K-Pop과 K-Beauty가 어떻고 한국이 세계 10위 경제대국이라고 뽐내며 살아가는 부끄러운 못난이, 까막눈일 뿐이다. 

“한국인, 당신은 신라왕릉, ‘서봉총(瑞鳳塚)’을 제대로 아십니까?”라고 묻는다. 그리고 세계적인 자전거 여행가, 차 백성(Bike-Cha) 교수의 <North-Europe Road>를 일독하기를 강력 추천한다. 

끝으로 강원도 고성, 울산바위 아래에서 열린 '1991 세계 Jamboree 대회‘에 자원봉사자로 참가했던 필자는 VIP로 참관한 스웨덴 구스타프 국왕을 브리핑실에서 지근(至近)에서 만나 뵈었던 지난날의 기억을 떠올린다.  

전   대   길
(주)동양EMS 대표이사, 수필가 
국제PEN 한국본부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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