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익 컨설턴트의 소소한 일상이야기6] 트로트에 빠지다
[한상익 컨설턴트의 소소한 일상이야기6] 트로트에 빠지다
  • 편집국
  • 승인 2021.02.09 07: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상익
푸른소나무 life plan consulting 대표
재취업지원 컨설턴트
한국생애설계사(CLP)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엔 생기가 돌았다. 요양병원 중환자실에 남편을 두고, 늘 골골하던 칠십 노인네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아내와 언니 동생 하며 지내는 김 여사는 영국 유명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대학에서 영문학과 교수를 지내다 은퇴한 남편을 둔 인텔리 여성이다. 

그런 남편이 파킨슨병에 걸려 오래 고생하다가 최근에 악화하여 요양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한 후에는 삶의 의욕을 잃고 있었다. 

그런데 다시 활기를 되찾았고, 놀랍게도 그 중심에는 트로트가 있었다. 놀랍다고 표현한 것은 평소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던 사람이 트로트에서 위안과 견딜 힘을 얻었다고 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최애(最愛) 가수를 응원하면서 삶에 목표가 생기고 활력을 되찾게 되었던 것이다. 하긴 얼마 전 모 신문사와 인터뷰를 한 이어령 전 장관도 제레미 다이아몬드나 유발 하라리 같은 지식인들이 외치는 백마디 말도 트로트 한 곡이 주는 위로를 당하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트로트(trot)라는 용어는 미국 춤곡인 폭스트롯(fox trot)에서 유래됐다고 전해진다. 트로트를 깎아내리고자 하는 사람들은 트로트라는 장르가 일본의 ‘엔카’로부터 영향을 받아 식민지 시대의 비탄 정서를 고취하기 위해 일본에 의해 보급되었다고 비판한다. 

그래서 한때 왜색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를 포함한 여러 트로트 노래가 왜색풍이란 이유로 방송 금지를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 일각에서도 ‘엔카’의 원류가 한국, 특히 영남 쪽의 민요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주장도 있기에 트로트의 기원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여간 기원이 어찌 됐든 트로트는 이제 한국의 독특한 노래 장르로 자리매김을 했다.

나도 트로트를 좋아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트로트를 좋아하게 됐다. 이 표현에는 이전에는 트로트를 안 좋아했거나, 별로였지만 지금은 마음이 변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렇게 내 마음이 변한 이유를 단지 나이 탓만은 돌릴 수는 없다. 

물론 나이를 먹게 되면, 빠른 박자의 리듬을 따라가기가 어려워지고, 빨리 부르는 가사를 이해하는 인지 능력이 감소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쿵짝, 쿵짝’으로 대변되는 트로트 음악으로 돌아가는 경향이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나의 트로트 사랑은 다분히 모 방송국 경연프로그램의 영향이 컸음을 부인할 수 없다. 
‘미스트롯’이란 이름으로 트로트란 한 장르에 국한해 여성들만 경연을 펼치는 실험적인 프로그램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대성공을 거뒀고, 그 여세를 몰아 남성들을 대상으로 한 ‘미스터트롯’ 경연 프로그램은 더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면서 종편 방송국 프로그램으로 35.7%를 찍는 최고의 시청률을 보이며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가수가 가만히 서서 부르는 것을 단지 듣기만 했던, ‘듣는 트로트’에서, 다양한 퍼포먼스를 통해 볼거리가 풍부해진 ‘보는 트로트’로의 변화가 시작되었고, 이로 인해 나이 든 사람의 전유물로만 여겨지던 트로트가 남녀노소 모두 좋아할 수 있는 트로트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에는 트로트에 대한 편견으로 아무 기대 없이 이 경연 프로그램을 보다가 점점 빠져들게 되었다. ‘미스트롯’ 경연 대회에서는 한 가수가 계속 선두를 유지하여 최종 우승 결과를 예상하기 쉬웠지만, ‘미스터트롯’에서는 다양한 개성과 매력을 지닌 가수들의 출현으로 결과를 쉽게 예상하기 어려워 끝까지 숨죽여 가며 보게 되었고, 그로 인해 점점 더 트로트의 맛을 알게 되었다.

성악가 출신으로 트로트 음악에 도전하여 트바로티(트로트 + 파바로티)란 별명을 얻은 가수가 부른 ‘내 인생에 태클을 걸지 마’라는 노래를 듣는 순간, 그가 성악가라는 틀을 깨고 나왔듯이 나도 트로트에 대한 편견을 떨쳐버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음악의 길로 자신의 인생 경로를 바꿔준 선생님께 감사함을 표하기 위해 부른 ‘고맙소’라는 노래를 들으며 완전히 무장해제가 되어, 가슴이 먹먹해지더니 결국 눈시울을 적시게 되었다. 노래를 듣고 나 자신이 감동하고 공감하여 눈물을 훔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트로트란 장르의 힘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고 트로트에 빠지게 된 시작점이었다. 

그 후 나는 60이 넘은 나이에 생전 처음으로 가수 팬카페에 가입했다. 늦은 나이에 처음으로 팬카페에 가입하게 되었다고 가입 인사를 하자, 여기저기서 환영한다는 따뜻한 인사 댓글이 쏟아졌다. 

거주 지역을 보니 전국에 퍼져 있다. 내 생전 어디서 이렇게 따뜻하고 정감 어린 환영을 전국적으로 받을 수 있겠는가. 코로나로 인해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면서 소원해졌던 사람 사이의 관계가 다시 이어지는 느낌을 받았고, 소속감을 느끼며 왠지 든든한 마음이 들었다. 

앱을 깔았더니 매일 인기투표를 하라고 알림이 온다. 큰 도움은 못 되겠지만 그래도 한 표를 보탰다는 뿌듯한 마음을 갖고 하루를 시작하니 마음마저 상쾌하다. 지난해 크리스마스에는 우체국에 가서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보낼 트로트 앨범을 포장하며 오랜만에 기쁘고 설레는 마음을 느껴보았다. 

노년에는 네 가지 어려움을 겪게 된다고 한다. 나이 들어 건강상의 어려움을 겪게 되는 병고(病苦),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는 빈고(貧苦), 부부가 사별하거나 자녀들이 떠난 빈둥지 신드롬으로 외로움을 겪는 고독고(孤獨苦), 그리고 할 일이 없어 고통을 당하는 무위고(無爲苦)이다. 

트로트 가수 펜카페에 가입을 하여 10만이 넘는 팬카페의 일원이 되었으니 비록 만나지는 못하지만 댓글을 주고받으며 고독고에서 벗어날 수 있고, 가수를 응원하는 할 일도 생겼으니 자연스레 무위고에서 벗어날 수도 있게 된다. 

또한 트로트 노래를 들으면서 김 여사처럼 위안 받으며, 힘을 얻고 활력을 찾을 수 있으니 자연스럽게 병 치유 효과도 보게 된다. 그리고 노년엔 병원비 지출이 가장 많다고 하는데, 트로트 덕분에 심신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어 재정적으로도 덕을 보는 셈이니 트로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친구들에게 트로트 앨범을 나눠주며 홍보 대사 역할도 하고, 트로트 얘기만 나오면 귀가 솔깃하며 무언가 한 마디하고 싶어지고, 재방송을 봐도 되는데 굳이 밤늦게까지 기다려 졸린 눈을 비벼가며 트로트 경연 대회를 본방 사수하는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보다는 이런 열정이 어디냐며 위안으로 삼고 있는 걸 보면 나는 트로트에 빠져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한상익
•푸른소나무 life plan consulting 대표
•재취업지원 컨설턴트
•한국생애설계사(CLP)/생애설계 전문강사 
•뉴질랜드 변호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