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길 CEO칼럼] 카사노바(Casanova)와 복권(福券)
[전대길 CEO칼럼] 카사노바(Casanova)와 복권(福券)
  • 편집국
  • 승인 2021.09.29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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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대   길
(주)동양EMS 대표이사, 수필가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이탈리아 파두아 대학에서 17세에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이탈리아 문필가인 '카사노바(Casanova, Giovanni Giacomo, 1725~1798)'는 이태리어, 불어, 라틴어에 능통했다. 

그가 쓴 <<내 생애의 역사>> 회상록(12권)은 18세기 유럽의 풍속과 문화를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다.  
           
1755년, 여자를 유혹하는 기술이 ‘악마의 속삭임’이라며 마법사라는 죄명으로 종교재판에서 5년 징역형을 받고 파온비 감옥에 투옥되었다. 1년 6개월간 복역하다가 극적으로 파온비 감옥을 탈옥했다. 

  카사노바(Casanova, Giovanni Giacomo)

정력에 좋다는 굴(Oyster)인 석화(石花)를 즐겨먹었다. 세계 최초로 피임용 콘돔을 사용했다는 그는 122명의 여성과 사랑을 나누었다고 천재적인 바람둥이임을 그의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다. 

유럽 각지를 방랑하며 엽색(獵色)과 모험(冒險)을 즐긴 카사노바가 이탈리아 베네치아 사교계로 귀환했다. 화려한 언변으로 파온비 감옥의 탈옥 이야기를 하며 사교계의 스타가 된 카사노바는 인기를 바탕으로 루이15세의 애첩인 퐁파두르 부인에게 접근, 환심을 샀다. 

1757년에는 루이15세를 알현했다. 그 당시 루이 15세는 프랑스의 재정적자로 인해서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이때 카사노바는 프랑스의 국가위기를 극복할 방안을 왕에게 컨설팅 했다. 

그것은 바로 복권(福券/Lottery)이었다. 카사노바의 제안에 따라 복권을 찍어낸 루이 15세는 손쉽게 재정 적자를 해결할 수가 있었다. 첫 복권 매출이 200만 프랑, 순이익은 60만 프랑이었다. 

이를 계기로 루이 15세 왕의 신임을 얻은 카사노바는 프랑스 외무부 특사로 임명되었다. 그의 끊임없는 출세에 대한 욕망은 복권이라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실현하여 프랑스 재정적자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미국의 경우도 도로와 항만 등 상당 부분의 인프라 확충이 복권제도에 의해 이루어졌다. 콜롬비아, 뉴저지, 예일, 하버드, 프린스턴 등 세계적인 명문 대학들도 복권을 통한 기금으로 설립할 수가 있었다. 

복권의 역사는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역사학자들은 복권과 비슷한 방식의 추첨 게임이 이뤄진 유물을 근거로 고대 이집트 시대에 처음 복권이 등장한 것으로 보고 있다. 

서양에서는 고대 로마시대부터 복권이 일반화되었다.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복권 판매와 경품 추첨행사 등을 통해 로마의 복구 자금을 마련했다. 폭군으로 유명한 로마 황제 네로도 복권 형태의 추첨행사를 즐겼다. 

동양에서는 기원전 100년경 중국 진나라에서 ‘키노’라는 복권게임이 국가적으로 시행되었다. 키노를 통해 마련된 기금은 만리장성 건립과 국방비 등에 사용되었다. 

우리나라 복권의 기원은 조선 후기 유행했던 산통계(算筒契)에서 찾을 수 있다. 이름이나 숫자 등을 적은 알을 통에 넣어 흔든 뒤 밖으로 빠져나온 알에 따라 당첨을 결정하는 방식이었다. 

우리나라 최초 복권은 1947년 12월 발행한 1948 런던 올림픽 참가비용을 모으기 위해 발행한 올림픽 후원권이 처음이다. 

이때 액면가는 100원, 발행매수는 140만 매, 1등 당첨금은 100만원, 당첨자는 총 21명이었다. 이렇게 마련된 U$80,000로 런던 올림픽에 선수단이 참가했다. 

그 후 복권은 가난한 정부가 경제 개발을 위한 자금이 필요할 때 수시로 발행됐다. 1949년 이재민 구호자금을 위해 발행된 후생복표가 대표적이다. 

1950년에는 재정 자금을 만들기 위해 애국복권이 등장했다. 산업박람회 복표(1962년), 무역박람회 복표(1968년) 등 특정 행사를 지원하기 위한 복권이 뒤를 이었다.

지금처럼 정기적으로 꾸준히 발행되는 복권은 1969년 9월 한국주택은행이 발행한 주택복권이 도입되면서 등장했다. 

당시 한국주택은행은 무주택 군경 유가족과 국가유공자, 베트남전쟁 파병 장병들의 주택 마련을 위해 주택복권을 발매했다. 주택복권은 월 1회 50만 장씩 장당 100원으로 처음에는 서울에서만 판매됐다. 

서울의 집값이 약 200만 원이었던 1970년대 1등 당첨금 300만 원의 주택복권은 지금의 ‘로또복권’이나 ‘연금복권’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Lotto 복권>
 <Lotto 복권>

1990년대에는 동전으로 긁어 그 자리에서 바로 당첨 여부를 확인하는 즉석복권이 인기를 끌었다. 대전국제무역박람회 개최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1990년 9월부터 3년간 발행된 엑스포복권이 첫 즉석복권이다. 

체육복권, 기술복권, 복지복권 등이 그 뒤를 이으면서 1995년 전체 복권시장의 66%를 즉석복권이 차지했다. 

복권의 인기가 높아지자 각종 복권기관이 난립하는 가운데 판매도 되지 않고 곧바로 폐기되는 복권도 나타났다. 2000년대 초까지 사라진 복권만 체육복권(1990년) 기술복권(1993년) 복지복권(1994년) 기업복권(1995년) 자치복권(1995년) 관광복권(1995년) 녹색복권(1999년) 플러스복권(2001년) 엔젤복권(2001년) 등 9종에 달한다. 

복권의 종류가 크게 늘자 정부는 구조조정에 나서 2004년 복권 및 복권 기금법을 시행해 복권 발행기관을 복권위원회로 단일화했다. 이에 따라 현재 기획재정부 복권위원회에서는 복권발행을 관리하고 있다. 

지금부터 264년 전인 1757년, 천하의 난봉꾼, 카사노바(Casanova, Giovanni Giacomo) 법학박사가 프랑스 루이 15세에게 복권발행을 제안, 프랑스 경제난을 해결했다. 이것이 바로 복권(Lottery) 발행의 효시(嚆矢)임을 생각주머니에 담는다. 

전   대   길
(주)동양EMS 대표이사, 수필가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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