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익 컨설턴트의 소소한 일상이야기42] 직장 동료
[한상익 컨설턴트의 소소한 일상이야기42] 직장 동료
  • 편집국
  • 승인 2021.10.19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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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익
•푸른소나무 life plan consulting 대표
•수필가
•재취업지원 컨설턴트
•한국생애설계사(CLP)

뜻밖에 이전 직장 동료의 전화를 받았다. 1999년에 퇴사하면서 뉴질랜드에 이민을 간 후 보질 못했으니까 20년이 넘은 시간 만에 들어보는 목소리였다. 

오랜 시간이 무색하리만큼 목소리는 여전해서 반가웠다. 오래간만이라는 짧은 단어로 그동안 격조했던 시간의 공백을 메울 수 없어 우리는 ‘정말’, ‘아주’라는 부사를 덧붙여 강조하며 오랜 시간이 흘렀음을 서로에게 확인시키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 오직 한 직장에서만 근무했다. 직장은 한 곳이었지만, 번역사로 시작해서 통계과, 인사부, 자재관리부 그리고 시설부 등 다양한 직무를 경험했고 그 덕분에 직장 내 모든 직원과 교류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더 가깝게 지내던 두 부류가 있었는데, 하나는 등산 동호인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동양화(?) 동호인들이었다. 나처럼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직원들도 여럿 있었는데 그들과는 사이가 더욱 각별했다. 

동양화 동호인이란 용어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분명히 하고 넘어가야겠다. 감이 빠른 사람은 벌써 눈치챘겠지만, 내가 말하는 동양화란 많은 한국인이 즐기는 화투(고스톱)를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큰돈이 오가는 도박성 성격을 띤 것이 아니라 직장 동료들끼리 친목을 도모하며 소소하게 즐기던 모임이었기에 동양화로 미화하여 표현하였다. 

또한 정기적으로 날을 잡아 만나는 습관적이고 중독성 모임이 아니었고, 생일과 같이 축하하고 기뻐할 일이 있을 때만 만나는 비정기 모임이었다. 동호인들은 경사가 있는 집마다 돌아다니며 함께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서로 가정환경도 잘 알았다.  

그 당시 특출나게 부유했던 동료는 없었고, 사는 게 다 고만고만 했지만, 아마 우리 집 환경이 가장 열악했을 것이다. 

서까래가 튼튼해서 구입하셨다는 18평짜리 오래된 한옥에 재래식 부엌과 화장실, 그리고 코딱지만한 방이 네 개 있었는데, 안방에는 큰 장롱이 반을 차지하고 있어 성인 남자 네 명이 앉으면 옴나위할 정도였다. 

집사람이 결혼 초에 친정 식구들이 자신이 사는 곳을 보면 마음 아플까 봐 초대도 하지 못했던 그런 집에 나는 스스럼 없이 직장 동료들을 초대했으니 참 철이 없었다. 

그런 누추한 곳에서도 직장 동료들은 불편한 내색 없이 재미있게 놀다간 걸 생각해 보면 속이 깊고 배려심이 많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당시 회사는 두 곳으로 나뉘어 있었다. 번역실과 인쇄 및 생산 그리고 배부 센터 등이 포함된 자재관리부서는 청운동에 있었고, 재정, 통계 그리고 부동산, 설계, 건축, 운영관리부서가 포함된 시설부 등은 신당동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전화해준 동료는 신당동 사무실 소속이었고 나중에 청운동 사무실에 배부 센터만 남기고 모두 신당동 사무실로 옮기게 되면서 동양화 모임에 합류하게 되었다. 늦게 합류했지만, 성품이 무던하고 어울리는 걸 좋아해서 쉽게 동화되어 가깝게 지냈다.

전화한 용건은 자신이 현재 인천에 거주하고 있는데 옛 직장 상사 및 몇몇 동료들을 모시고 점심 대접을 하려고 한다는 초대였다. 

아산에서 인천으로 가는 것이 교통편도 그렇고 왕복 시간이 오래 걸려 망설여지긴 했지만, 나이 들수록 초대받은 곳은 꼭 가라는 말이 떠올라 가기로 했다.

인천 지리도 잘 모르고 아직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에 익숙지 않은 이유도 있었고, 알려 준 주소를 내비게이션에서 쳐보니 2시간 거리로 나와서 뉴질랜드에서 살 때 대여섯 시간 운전하는 것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때를 떠올리며 차를 가지고 가기로 했다.

평일이라 그런지 인천 가는 길은 막히지 않았고 누렇게 익은 벼와 모처럼 파란 하늘의 가을을 감상하며 옛 동료들을 만날 기대감으로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알려준 주소는 소래포구 주차장이었다. 평일이었는데도 점심시간이 되어서 그런지 이미 지상 주차장은 다 찼고 지하 주차장에 간신히 차를 대고 나오니 주차장으로 들어가려는 차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코로나로 인해 사회적 거리 두기와 비대면에 익숙해 있던 나에겐 생경한 모습이었다. 붐비는 자동차뿐만 아니라 북적거리는 인파를 보면서 마치 이곳은 코로나와 관계없는 치외법권 지역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오랜만에 생기와 활력을 느낄 수 있었다.

가끔 전화상으로 연락은 주고받았지만, 직접 얼굴을 대하는 만남은 역시 특별한 감흥을 준다. 모두 젊었을 때의 얼굴은 남아 있어도 허옇게 서리가 내린 머리는 그동안 덧없이 흘러간 세월을 보여준다.

함께 근무했던 다른 동료들의 안부도 묻고 벌써 다신 만나지 못할 곳으로 간 몇몇 동료들의 소식엔 잠시 먹먹해지기도 했다. 직장 동료들의 모임이지만, 업무에 대한 얘기는 오고 가지 않는다. 

역시 기억에 남는 건 업무 고과가 아니라 사람 사이 관계임을 알 수 있다. 점심시간에 즐기던 농구 골대 기둥 맞추기 축구 경기나 일박 이 일로 다녔던 직원 연수 그리고 지리산 종주 중 산장이 만원이라 어쩔 수 없이 한 텐트에서 혼숙을 했던 에피소드 등 이젠 아련한 추억이 되어 버린 이야기가 끝날 줄 모른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지나고 나니 이젠 모두 즐거운 이야깃거리가 된다. 일과 후 붙잡혀서 늦도록 장기를 두거나, 점심시간에 못다 한 축구 연장전을 하느라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조명 삼아 공이 안 보일 때까지 차고 집에 늦게 들어가는 바람에 아내에게 혼났다는 후일담도 그때는 못 했지만 이젠 80이 넘은 대표 앞에서 무람없이 털어놓는다. 

단호하고 엄격하여 호랑이 같던 대표님도 사람 좋은 얼굴로 웃기만 하신다. 결코 나이 탓만이 아니라 흘러간 지난 순간순간이 모두 소중한 그리움이기 때문이다.

헤어지면서 매일 보는 사람인 양 다음에 또 만나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70대, 80대에 접어든 나이에 ‘다음에 또’라는 약속의 무게를 알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말은 안 해도 다음에 꼭 다시 보고 싶다는 바람은 움켜잡은 손에서, 쳐다보는 눈빛에서 그리고 끌어안은 가슴에서 서로 느낄 수가 있었다.

싱싱한 회와 온갖 해산물로 푸짐하게 대접받은 것도 모자라 소래포구 새우젓갈까지 한 통씩 선물로 받았다. 

기분 좋은 만남에 취해 과하게 먹은 탓에 몸은 무거웠지만, 뻥 뚫린 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려온 자동차처럼 마음은 날 것 같이 가벼웠고, 행복하고 고마운 생각으로 가슴이 따뜻해졌던 만남이었다.

한상익(myhappylifeplan@gmail.com)
•푸른소나무 life plan consulting 대표
•수필가
•재취업지원 컨설턴트
•한국생애설계사(CLP)/생애설계 전문강사 
•뉴질랜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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