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세혜택 고소득층에…미래투자 서둘러야
감세혜택 고소득층에…미래투자 서둘러야
  • 승인 2005.10.10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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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변양균 예산처장관]

듣기에만 솔깃한 9조원 감세주장

지난 10월 3일, 한나라당은 9조원 규모의 감세정책을 발표하였다. 이에 대해 정치권과 언론은 물론, 국민들 사이에서도 열띤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감세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한나라당은 “소비 진작을 꾀하려면 국민의 세금 부담을 줄여 가처분 소득을 늘리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다”며, “서민 부담을 늘리는 정부의 증세정책에 분명히 반대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아마 세금이 늘어나는 것을 좋아할 국민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국민들 입장에서 보면, 세금을 깎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의 손을 들어주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감세정책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며, 어떤 효과가 있는지에 대해 정확히 알고 나면 국민들의 생각도 달라질 것이라 믿는다.

누구를 위한 감세인가?

무엇보다도 감세정책의 가장 큰 허점은 그 혜택이 서민이 아닌 고소득층에게 돌아간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조세체계는 선진국들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선진국의 경우 근로소득자의 80% 이상이 세금을 내고 있는 반면, 우리나라는 근로자와 자영업자의 절반 정도만이 소득세를 납부하고 있다. 감세를 주장하는 이들은 서민 부담을 줄여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들이 내세우고 있는 대부분의 서민들은 세금을 내지 않고 있는 계층인 것이다.

따라서 세금을 줄일 경우 기존에 세금을 내지 않던 서민들에게는 아무런 영향이 없고, 오히려 고소득층이 납부해왔던 세금만 줄어들게 된다. 감세 혜택이 부유층에 집중됨으로써 조세의 형평성이 심각하게 훼손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예를 들어 소득세율을 2% 포인트 인하할 경우 연간 1000만원 이하 근로소득자는 4만3000원의 감세혜택을 보는 반면, 연간 8000만원을 초과하는 고소득자는 302만원의 혜택을 보게 된다. 4인 가족 기준으로 볼 때에도 근로자의 면세점이 1600만원 수준이기 때문에 저소득자의 혜택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지난해 감세조치로 세수결손만 커져

감세의 또 한가지 문제점은 의도대로 소비나 투자가 활성화되지 않을 경우 고스란히 세수만 감소된다는 점이다.

지난해 한나라당 주장으로 소득세율을 1% 포인트 내렸고, 이로 인한 세수 감소효과가 총 1조5천억원에 달한다. 최근 외견상으로는 소비가 늘어나는 추세이지만, 해외소비의 증가폭이 훨씬 크다는 것이 문제이다. 2분기중 민간소비가 전년보다 2.7% 증가하였지만, 그중 국내소비는 1.8% 증가한 데 그친 반면, 해외소비는 무려 29.8%나 증가하였다. 고소득자들이 해외 골프, 관광, 의료 등으로 해외에서 지출을 늘렸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감세로 인한 고소득자들의 소득 증가가 국내경기 진작에는 별로 기여를 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법인세도 비슷한 결과를 낳았다. 법인세율을 2% 포인트 내렸고, 이로 인해 세수 감소효과가 총 2조3000억원이나 예상된다. 그런데도 기업의 투자는 별로 늘지 않았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투자를 망설이는 것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에 기인하고 있다. 낮은 금리와 풍부한 유동성으로 인해 기업들의 자금사정이 좋은 상황이고 그만큼 투자여력도 갖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감세가 투자로 연결되기 어렵다. 감세로 인해 재정은 대규모 세수결손 뿐만 아니라 세수기반이 잠식되어 앞으로 몇 년간 국채를 발행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감세 이론의 한계

감세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공급경제학’을 자신들의 이론적 근거로 활용하고 있다. 공급경제학은 세율이 높을 때 세금을 낮추어야 성장률이 높아지고, 세수도 늘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래 그림은 ‘래퍼곡선’을 나타낸 것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래퍼곡선에서는 현재의 세율이 높은 상태에 있을 때 이를 낮추면 조세수입이 높아질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현재의 세율이 래퍼곡선상의 어디에 위치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며, 이 점이 래퍼곡선 이론의 취약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미국의 레이건 정부가 이러한 이론에 근거하여 1980년대에 과감한 감세정책을 실시한 바 있으나 결국 단년도 통합재정수지 적자가 GDP 대비 2%대에서 6% 수준까지 확대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부시 정부가 실시한 감세조치도 1998년 이후 클린턴 정부가 이룩한 흑자 기조를 적자로 전환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우리나라는 법인세, 소득세 등의 세율이 낮은 국가에 속하고, 조세부담률 역시 주변 경쟁국이나 OECD 평균보다 높지 않은 수준이다. 내년도 우리나라의 조세부담률은 19.7%로 OECD 평균 27% 수준에 비해 낮고, 재정규모도 27%로 OECD 국가 평균 41% 수준에 비하면 크게 낮은 수준이다. 공급경제학 이론을 따른다 하더라도 우리나라는 래퍼곡선의 좌측 영역에 위치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오히려 세수의 감소가 예상된다.

감세로 기본적인 공공서비스가 줄어들 우려

이번에는 정부의 역할이나 기능과 관련해서 감세문제를 살펴 보자. 재정은 시장경제가 발전해 가더라도 본연의 역할이 있다. 민간부문이 하기 힘들거나 공공의 이익을 위해 재정이 해야 할 영역이 존재한다. 저출산, 보육, 노인문제, 교육, 기초과학기술투자 등이 대표적인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는데도 정부는 비효율적이니까 감세를 해서 그 역할을 축소하라고 한다면 이는 본말이 바뀐 결과를 낳고 만다.

감세를 적자국채로 메우지 않는다면 이러한 분야의 지출을 줄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서민, 중산층에게 지원되는 공공서비스의 혜택이 줄어들 수 밖에 없게 된다. 민간이 하기 힘든 분야의 투자가 줄면 결국 성장이 발목을 잡혀서 그 부담이 민간부문으로 부메랑처럼 돌아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정부의 비효율성 문제와 재정의 역할 문제는 별개로 다루어져야 할 사안이다. 정부가 세금을 성과 있게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나라는 선진국 클럽인 OECD에 가입한지 얼마 안 된 국가이다. 선진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이고 쫓아가기에도 바쁜 나라이다. 일반적으로 선진국들은 복지·교육·의료 등의 공공서비스를 정부에서 상당부분 제공하고 있으며, 이에 상응하여 국민들이 많은 부담을 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복지지출이 막 늘어나는 단계이다. 우리나라의 복지지출 비중은 재정의 27%로 OECD 국가 평균인 52%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복지지출이 외환위기 이후에 본격적으로 추진되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재정지출의 증가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아직은 재정규모를 줄일 단계가 아니다. 현재와 같이 지출소요가 증가하는 시점에서 감세정책을 추진하는 것은 재정적자만 확대시킬 가능성이 매우 크다.

국채를 발행하지 않으면 9조원을 어디에서 삭감하나?

9조원을 감세하자고 하면서 정부가 스스로 지출을 줄여오라고 하는 것은 정치공세에 불과하다. 현재 국가재정운용계획상 지출소요 충당을 위해서는 향후 5년간 43조원의 적자국채를 발행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러한 지출계획은 잠재성장률을 유지하기 위한 것으로, 성장 동력 확충과 복지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는 수준이다.

경제활동인구는 2015년경에 정점을 이루었다가 점차 감소될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에 앞으로의 10년이 대단히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겨울이 오기 전에 먹을 것을 비축해 놓지 않으면 춥고 배고픈 생활을 해야 한다. 따라서 향후 10년이 대단히 중요한 시기이다. 10년 이내에 선진국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매년 5% 이상의 실질성장이 필요하다고 한다. 성장동력을 확충하기 위한 획기적인 대책이 시급하다. 그러나 고령화와 저출산 문제를 방치한 상태에서 잠재성장률을 확대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이러한 소요 말고도 우리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 비용이 많이 있다. 방과후 활동, 임대주택, 의료비 등과 같이 사회가 함께 부담해야 할 비용들을 개인들이 부담하고 있는 경우가 그런 것 들이다. 이러한 경비는 어려운 계층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문제를 안고 있다. 성숙한 사회에 다다른 선진국들은 대개 국가가 이러한 부담을 하고 있다. 재정의 역할이 더욱 강화되어야 할 당위성이 여기에도 있는 것이다.

최근 유가·환율 등 대외여건이 악화되면서 경기부진으로 세수가 크게 부족해지고 있다. 이에 따라 금년에는 부족한 세금을 채우는 추경예산을 편성해야만 했다. 잠재성장률이 낮아져서 향후 세수가 크게 늘어나기도 어려울 전망이다. 이러한 어려운 세입여건하에서 늘어나는 재정소요를 지원하기 위해 세출구조를 혁신하고 우선순위를 조정하여 재원을 마련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정부는 이미 금년 예산중 경상경비의 7~10%를 절감하였고 재정소요를 줄이기 위하여 BTL 등 민간자본을 활용하는 방식도 새롭게 도입하였다. 또한 2006년도 예산을 편성하면서는 4조원 이상의 세출을 구조조정하였다. 그러나 재정규모가 작은데다 채무상환 경비나 법규정에 따라 지급되는 지방교부금 등 의무적 지출 경비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획기적으로 재원을 확충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지출구조의 특성을 무시해 버리고 감세를 통해 국민부담을 줄이겠다는 것은 책임있는 정책이라고 할 수 없다. 재정의 한 축인 세입을 묶어놓고 역할을 다하라고 하면 수긍할 수가 없다. 재정의 양대 축은 세입과 세출이다. 지출을 그대로 놔두고 감세를 하려면 국채를 발행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감세정책을 제시하려면 합리적인 지출삭감 방안도 함께 제시해야 설득력을 갖게 될 것이다.

한나라당에서는 공공기금 손실 등 예산낭비를 30조원만 줄이면 증세가 필요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이 주장하는 30조원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면, 대부분이 공적자금의 국채전환에 따른 손실과 외국환평형기금의 환평가손으로 재원이 될 수 없는 것들이다. 이것은 장부상으로만 나타나는 허황된 숫자들이다.

이젠 재원조달 방식을 선택할 때이다

이와 같은 재정의 실상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결국 재정이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획기적인 세출구조 조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또 중장기적으로는 두 가지 국민부담 방식을 놓고 이 중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한다고 본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한 가지는 미국이나 일본처럼 국민부담을 낮추는 대신에 국채발행을 많이 하는 형태이다. 일본의 국민부담률은 26%대로 우리나라와 비슷한 수준이지만 국가채무비율은 GDP 대비 160% 수준으로 우리나라의 6배 이상이다.

또 한 가지는 유럽 국가들이 일반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고부담-저부채’의 형태이다. 유럽 국가들은 수준 높은 복지서비스를 공급하는 대가로 국민들의 부담을 높이는 방식으로 국가채무비율을 낮게 유지하고 있다. 노르웨이의 경우 국민부담률은 44%로 우리나라에 비해 매우 높은 반면, 국가채무비율은 GDP 대비 51%로 OECD 국가 평균에 크게 못미치고 있다.

국민들이 재정의 건전성이 유지되기를 바란다는 점은 정부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빚을 지고 사는 것을 꺼려하는 것이 우리국민들의 정서이다. 더구나 우리 국민들은 IMF 위기를 겪은 바 있기 때문에 국가가 빚을 지는 것에 대해 무척 불안해하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국가가 필요한 공공서비스를 제공하고 미래에 대비해 나가기 위한 투자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적정한 수준의 국민부담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대책 없는 9조원 감세주장은 하루 빨리 철회되어야 한다. 지금은 미래 국가발전을 위한 건전한 논의가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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