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훈 소장의 세상사는 이야기] 강감찬 장군의 지략(智略)과 품격(品格)
 [최승훈 소장의 세상사는 이야기] 강감찬 장군의 지략(智略)과 품격(品格)
  • 김민수 기자
  • 승인 2023.11.23 07: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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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훈
•한국능률협회 전문위원
•연세대학교 외래교수
•한국생애설계포럼 대표

우리나라 전쟁사에서 3대 명장을 꼽으라면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 고려의 ’강감찬‘ 장군, 조선의 ’이순신‘ 장군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최근 KBS에서 방영 중인 대하드라마에서는 ‘고려 거란전쟁’의 주인공인 ‘강감찬’ 장군(948.12.22~1031.9.15.)의 뛰어난 활약상을 볼 수 있다.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은 고려 역사의 한 획을 그을만한 쾌거였다.            

강감찬 장군 초상화(Daum 참조)
강감찬 장군 초상화(Daum 참조)

‘강감찬’ 장군은 고려 시대 금주에서 태어났다. 현재의 주소 기준으로 한다면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곳에 낙성대(落星垈)가 있다. 

‘강감찬’ 장군은 무관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나 비교적 늦은 나이인 36세에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문관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60세 전까지는 지방 관리 등으로 활동했으나, ‘현종(992.8.1~1031.6.16.)’ 즉위 후 예부시랑으로 발탁되는 대기만성형 인물이다. 

그는 어지러운 고려조정 소통의 난장(亂場)을 통합으로 이끌었고 거란과의 전쟁에서 항복하자는 신료들의 주청을 막아 고려가 거란을 대파하는 승리의 주역이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지략에 능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문관 출신으로 정식 무관직에 오른 적이 없는 조정에서 무관 출신보다 뛰어난 탁월한 전략과 리더십으로, 거란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나중에 문하시중(영의정)까지 오른 불세출의 영웅이었다. 

당시 요나라인 거란은 동아시아에서 최고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전성기를 누리던 강대국이었다. 993년 고려와 거란과의 친선 관계가 틀어졌는데 거란은 고구려의 옛 영토를 자신들의 땅이라고 우기면서 고려를 침공하기도 했지만, ‘서희’ 장군의 담판으로 강동 6주를 획득하기도 했다.
 
그후 1차 거란의 침공이 수습되기는 했으나 다시 거란의 2차 침공이 발생하였고 고려는 크게 패배하고 말았다. 

1009년 ‘강조(중대사?~1010)의 정변으로 ‘목종(980.7.5~1009.3.2.)’이 폐위(廢位)되고, ‘현종’이 즉위하자 이를 빌미로 1018년에 거란은 다시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 침략을 강행하자 거란군과 비교하여, 중과부적(衆寡不適)이라 생각하던 중신들은 항복을 주장하였으나 ‘강감찬’ 장군은 결사 항전을 주장하며 이에 강력하게 대응하였다. 

그는 고려군 총사령관으로 거란과의 전쟁에서 가장 큰 전투 성과를 올리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패배 후 도망가는 거란군을 대파한 것이 귀주대첩이다. 

당시 거란군은 세계 최강의 군대였으며, 서역에서부터 만주까지 그들을 당해 낼 군대는 없었기에 고려의 승리는 더욱 짜릿하고 감격스러운 전투였으며, 최강이라는 거란의 대군을 맞이하여 고려군이 정면 대결하여, 승리를 쟁취한 것이었다. 

거란군은 겨우 천 수명만 살아갔을 정도로 크게 패퇴하고 돌아갔다. 귀주대첩은 거란족이 다시는 고려를 침략할 수 없게끔 만든 전투이기도 하다. 귀주대첩은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 조선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대첩과 함께 한국사 3대 대첩이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귀주대첩에서 승리한 ‘강감찬’ 장군을 ‘현종’이 직접 마중을 나가 맞이하였으며, 강감찬의 손을 잡고, 금으로 만든 8가지 꽃을 강감찬 머리에 직접 꽂아 주기도 했다고 한다.

이 전쟁으로 거의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하게 된, 거란은 이후 더는 고려를 침략하지 못하게 되었다. 전쟁에 커다란 공을 세운 강감찬 장군은 나중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까지, 올라 ‘현종’의 치세에 큰 도움을 주었던 명재상이 되었다. 

전쟁으로 인해 큰 전력 손실을 입은 거란과는 다시 국교가 이루어지면서 약 120년 동안 평화와 안정을 구가하게 되었다.

‘강감찬’ 장군은 전쟁의 귀재일 뿐만, 아니라 청렴한 공직자요, ‘훌륭한 품격’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강감찬 장군이 귀주대첩으로 거란군을 대파하고 승리하여 돌아오자, 고려 ‘현종’이 친히, 마중을 나가면서, 뜨거운 포옹을 하며, 환영을 해주었다고 한다. 

또한 왕궁으로 ‘강감찬’ 장군과 함께 전쟁 승리에 크게 공을 세운, 장군들을 초청해 중신들과 더불어 주연상을 성대하게 베풀었다. 

한창 주흥(酒興)이 무르익을 무렵, 강감찬 장군은 무엇인가를 살피고 골똘히 생각하다가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현종’의 허락을 얻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리를 뜨면서 장군은 내시(內侍)를 보고 살며시, 눈짓으로 불렀다. 

시중을 들던 내시가 그의 뒤를 따라 나오자 장군은 내시를 자기 곁으로 불러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게, 내가 조금 전에 밥을 먹으려고 밥그릇을 열었더니 밥은 없고 빈 그릇뿐 이더군. 대체 어찌 된 일인가? 내가 짐작해보니, 주연을 준비하느라 경황 중에 자네 들이 그릇에 밥을 푸는 것을 잊고, 실수를 한 것 같은데, 이걸 어찌하면 좋은가?"

순간 내시는 얼굴이 사색이 되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죽을 만큼의 실수를 저지른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날의 주빈이 ‘강감찬’ 장군이고 보면 그 죄를 도저히 면할 길이 없었다. 내시는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이때 강감찬 장군이 내시에게 작은 음성으로 말하기를, "성미가 급한 상감께서 이 일을 아시면 자네 모두가 무사하지 못할 테니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떤가? 내가 화장실에 가는 구실로 일부러 자리를 떠났으니, 내가 자리에 앉거든 곁으로 와서 '진지가 식은 듯 하오니 따뜻한 것으로 바꾸어 드리겠습니다'라고 하면서 밥이 담긴 그릇을 갖다 놓도록 하시게" 

내시는 너무도 고맙고 황망(慌忙)스러우며, 감격에 겨워했다. 그와 같은 일이 발생한 이후, ‘강감찬’ 장군은 이 일에 대해 끝까지 함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인 그를 살려준 은혜를 입은 내시는 죽을 각오로 그 사실을 동료에게 실토하고 말았다. 

이 이야기가 다시 ‘현종’의 귀에까지 들어가 훗날 ‘현종’은 강감찬 장군의 인간 됨과 인격을 크게 상찬하여 모든, 백성들의 귀감(龜鑑)으로, 삼도록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아무리 지위가 높고 능력이 뛰어나고 돈이 많다 하더라도, 품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존경을 받을 수 없다. 인간의 가치는 능력과 부(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품격에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를 보면서 강감찬 장군의 지략과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정신을 기리며, 관용의 리더십과 인간으로서의 고매(高邁)한 품격에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게 된다. KBS(최근 바람직한 변화 인정)가 모처럼 잘 만든 대하드라마 ‘고려 거란전쟁’과 방송을 계속 시청하려고 한다.

최승훈 
 •한국능률협회 전문위원
 •연세대학교 외래교수
 •사이에듀 평생교육원 교수
 •한국 생애설계연구소 소장 
 •한국 생애설계포럼 대표(경영지도사, 평생교육사, 생애설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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