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위부터 시작되는 복지, 중소·영세기업 노동자 '복지사각지대' 시름
[취재수첩] 위부터 시작되는 복지, 중소·영세기업 노동자 '복지사각지대' 시름
  • 이윤희 기자
  • 승인 2020.01.06 13: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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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52시간제, 재취업지원서비스법 등 각종 제도 대기업부터 도입
대기업-중소기업간 복지 불평등, 일자리 미스매치 원인

[아웃소싱타임스 이윤희 기자] 지난 주말이었다. 여느 날처럼 친구들과의 모임을 갖는데, 친구 녀석 중 한 명이 매일 야근을 밥 먹듯 하더니, 약속 날에도 결국 야근으로 불참 소식을 알려왔다.

"주 52시간 근무제 몰라? 너 왜 이렇게 야근이 많냐, 야근 수당은 받고 있는 거야?" 친구들의 질타가 쏟아지자 그 녀석이 한마디 내뱉었다. "우리 같은 작은 기업에 그런 게 어딨냐"

한숨 섞인 그 한마디가 뼈아프게 시려왔다. 슬프지만 현실이었다. 업무 과다로 심심하면 야근을 하면서도 별다른 야근 수당은 받지 못하는 이 친구는 5인 미만 영세기업에 재직 중인 노동자였다. 주52시간제도의 보장을 받지 못하는 영세기업.

친구의 모습을 바라보며, 노동자에 대한 우리나라의 복지제도를 돌아봤다. 기업을 대상으로 한 우리나라 복지는 그야말로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가장 정점에 있는 대기업부터 영세기업의 순으로 내려오는 방식이다. 위에는 복지라는 물이 쏟아져 내리는데, 정작 아래는 가뭄에 시달린다.

무슨 말이냐고? 노동자의 권익을 보장하자며 만든 각종 제도를 지켜야할 의무가 영세한 기업에는 없다는 뜻이다. 의무가 없기 때문에 마련된 제도를 그림의 떡처럼 바라보며,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일해야만 하는 노동자가 다수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임금격차는 여전히 간극을 좁히지 못하고 있다. 국내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임금 격차는 지난해 9월 기준 254만원 수준이다. 소폭으로 오르고 내리고를 반복할 뿐 해가 갈수록 임금격차가 완화됐다고 볼만한 지표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와중에 복지 격차까지 겹치며 중소기업 노동자들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은 커져만 간다.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2018 회계연도 기업체 노동비용 조사' 결과에 따르면 300인 미만 기업에서 법정 외 복지 비용에 사용되는 비용은 1인당 월평균 13만 7400원 수준인 반면 300인 이상 기업은 31만 9800원에 달했다. 아마 그 대상을 집계조차 되지 않는 5인 미만 영세기업까지 확대하면 대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 간 복지 격차는 더 확대될 것이 자명하다.
 
더 큰 문제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미 충분한 복지 혜택을 받고 있을 일정 규모 이상의 노동자에 정부의 복지마저 집중되고 있다는 것이다.

주 52시간, 최저임금 인상, 육아휴직 보장, 고령자 고용 촉진을 위한 법과 재취업 지원 서비스 법.. 우리나라에서 노동자의 복지 증진을 위해 보장하고 있는, 또는 기업에 보장 의무를 부여한 제도의 '일부'다.

하지만 정작 영세기업 노동자가 직접 체감할 수 있는 제도는 많지 않다. 중소기업, 영세기업으로 갈수록 기업에 의무성이 없기 때문에 사업주의 소관에 따라 보장 여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복지의 흐름은 주 52시간 제도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해당 제도의 시행 단계는 대기업에서 중견기업 순으로 도입됐고, 올해에 들어서야 50인 이상 299인 이하 기업으로 대상 규모가 확대됐다. 그나마도 유예기간을 부여하며, 당분간은 감시 대상에서 벗어나게 됐다.

정부가 기업에 의무성을 부여하는 어떤 제도를 도입할 때, 도입 기준을 대기업 수준부터 시작하는 명분은 분명하다.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면 중소기업이나 영세기업은 이를 시행하기 위한 기반이 없고 비용 부담이 따르므로, 작은 기업엔 계도 기간을 부여하고 당장 시행이 가능한 기업부터 시행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 말이 자꾸만 '제도 시행 성과를 낼 수 있는 기업부터 시작하자'로 들리는 걸까. 규모가 작은 기업은 제아무리 도입 기간을 늦춘다 하더라도 달라진 제도를 도입하거나 근무환경을 바꾸는데 부담이 따른다. 그 부분은 쏙 빠지고 기간을 부여해줬으니 기업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라고 말한다.

그 사이 가장 복지와 지원이 절실한 영세기업·중소기업 노동자들이 정작 제도 도입 이후 가장 늦게 제도의 이점을 누리게 된다. 내지는 끝까지 그 이점을 경험하지 못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일이 반복될수록 대기업과 중소기업 노동자의 격차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간다. 이와 같은 복지 불평등은 결국 중소기업과 대기업 노동자 간 격차를 가중시키고, 구직자로 하여금 중소기업을 기피하게끔 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생각해보자. 대기업은 높은 임금을 받으면서도 주 52시간제도를 착실히 보장받는다. 일이 많지만, 일한 만큼 보상이 뒤따를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업무 생산성도 확대된다. 잉여 시간을 활용해 자기개발을 하거나 내지는 투잡으로 소득 증대를 도모할 수도 있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기업과 정부 제도가 이를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기업의 노동자는 여전히 저임금을 받으며 야근에 시달리고 있다. 근로기준법에 따라 노동자가 본인의 권익을 찾으려 해도 매 항목마다 '00인 이상 기업의 경우'라는 단서 조건이 뒤따른다.

과연 누가 나서서 중소기업에 취업하려 할까? 오늘날 구직자는 취업 시 고려하는 요소로 안정성과 복리후생을 0순위, 1순위로 여기는데 중소기업은 이를 보장해줄 것이란 확신이 들지 않는 판국이다. 구직자들이 대기업과 공기업, 공무원에만 목을 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5월 1일부터 시행되는 재취업지원서비스법도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복지 격차를 유발하는 원인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재취업지원서비스법은 기업에 비자발적 고령 퇴직자에 대한 재취업 지원의 의무성을 부여하는 것인데, 그 도입 규모가 1000인 이상 기업에 한정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국내에서 상용근로자가 1000인 이상인 기업은 소위 말하는 '대기업'이다. 하지만 대기업에서는 이미 비자발적 퇴직자를 대상으로 한 각종 교육 및 서비스가 지원되는 곳들이 있으며, 퇴직자 스스로 재취업 준비를 위한 비용 투자도 영세·중소기업 퇴직자의 그것보다 높다. 노후자금 마련 또한 그렇다.

때문에 정작 비자발적 퇴직으로 인해 경제적 위기에 놓일 영세기업·중소기업 근로자들이 재취업지원서비스법으로 적절한 혜택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제기되고 있지만 정부는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기업을 지원하기 위한 정부의 정책은 각종 연구개발 지원, 규제완화, 세제 지원 등 다양하다. 하지만 그중 단 하나, 적어도 노동자를 위한 복지와 관련된 제도만큼은 대기업이 아닌 영세한 기업부터 도입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지원이 마련돼야 하지 않을까. 정부의 눈이 기업의 규모가 아닌, 기업 속에 있는 노동자의 환경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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