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연 사장의 별빛에 꿈을 담고6] 500원 들고 서울로 가다
[이수연 사장의 별빛에 꿈을 담고6] 500원 들고 서울로 가다
  • 편집국
  • 승인 2019.10.04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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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연 사장
제이앤비컨설팅 이수연 사장

주변분들의 도움과 터무니없는 나의 고집이 만든 콜라보레이션은 결국 나를 서울 여자로 만들어주었다. 이제 서울로 가는 일만 남았다. 그러나 서울로 향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순탄치 않았다. 막상 서울로 가는 것은 결정됐지만 서울에서 무얼 먹고 살아야 하는지가 문제로 남은 것이었다.

내가 앞뒤 다 재보고 결정하는 타입이었다면 그때의 서울행은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었을 게 분명하다. 그러나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의 나는 막무가내라는 말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그런 아이였다.

무엇보다 나는 지극히 긍정적인 타입의 소유자다. 말이 좋아서 긍정적인 거지 실제로는 무대포라고 해야 옳았다. 예나 지금이나 난 웬만큼 어려운 일은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이겨내곤 했다. 그때도 그랬다. 

부모님의 걱정스런 시선을 애써 무시하고 서올로 가던 날, 어머니가 나를 불러 부엌 어딘가에서 몇 년은 머물렀을 꼬깃꼬깃한 지폐를 손에 쥐어주셨다. 그때 돈으로 500원이었다. 그 돈으로 무얼 하지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거다.
사실이다. 1968년 물가로 따져봐도 500원은 그리 큰 돈이 아니었다. 아마 밥 몇끼 사먹으면 고갈될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혹시나 싶어 당시의 물가를 찾아보았다.

80킬로짜리 쌀 1가마가 3750원, 금 1돈이 3330원이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당시 500원이 정확히 와닿지 않아 조금 더 뒤져보니 쇠고기 1근(당시엔 600g)이 400원이던 시절이었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주신 용돈은 결국 쇠고기 1근을 먹고 나면 부스러기 돈이 남는 액수였던 모양이다. 앞으로 서울에서 적게는 3년을 버터야 하는 것치고는 참으로 작은 돈이었다.

그러나 그 돈을 챙겨주시는 어머니 앞에서 아마 난 눈물을 쥐어짜냈을 게 분명했다. 그 돈을 모으기 위해 얼마나 고생하셨을지를 뻔히 아는 까닭이다. 그래도 간신히 참았다. 오히려 더 명랑하게 웃으며 집을 나섰으니까. 

그렇게 내 서울 생활은 시작됐다. 단돈 500원, 그게 내가 서울에서 살면서 지닐 수 있던 내 유일한 재산이었다. 이 정도면 포기해야 옳을 일이었지만 그깟 돈 없다고 못 살까 싶은 오기가 더 나를 부추겼다. 

다행히 내 몸 하나 놓일 곳은 마련되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랄까. 물론 그 공간도 내가 마련한 것은 아니다. 일종의 더부살이였으니 말이다. 내 어린 시절 친한 벗이던 그녀가 서울에 살고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다.

두 사람이 누우면 여백이 거의 없던 그 방, 지금으로 치면 고시원 정도 크기였을까. 그렇게 내 서울살이는 시작됐다.  

이수연
-제이앤비컨설팅 대표이사(현)
-한국HR서비스산업협회 부회장(현)
-영등포구청 중소기업 창업지원센터 위원(현)
-호서대학교 벤처전문대학원 경영학 박사
-여성가족부 가족친화우수기업 표창
-고용노동부 남녀고용평등 우수기업 표창
-제45회 상공의 날 모범 상공인 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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