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만의 우리가 몰랐던 역사 이야기] 서흔남을 아시나요?
[황규만의 우리가 몰랐던 역사 이야기] 서흔남을 아시나요?
  • 김민수 기자
  • 승인 2023.12.04 09: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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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한국액티브시니어협회 황규만 회장
(사)한국액티브시니어협회 황규만 회장

예나 지금이나 강대국 사이에 낀 약소국은 처세하기가 정말 어렵다. 강대국 사이에 낀 약소국은 중립을 유지하고 싶지만 양다리 걸친 약소국을 좋아하는 강대국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다 힘이 강성해진 강대국은 내 편 아니면 모두 잠재적으로 적으로 간주한다. 

1600년대 조선 15대 왕이었던 광해군때만 해도 과거의 명성을 뒤로 하고 점점 쇠퇴해가고 있던 명나라와 신흥 강국인 후금(청)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인조반정(1623년 4월)으로 광해군이 축출되고 왕이 된 인조가 명으로부터 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친명배금을 내세우며 후금을 배척하자 이에 분개한 청이 1627년에 정묘호란을 일으킨다. 

이때 10일만에 후금이 황해도까지 내려오지만 조선 조정은 강화도로 피신해서 장기전에 돌입한다. 명나라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던 후금으로서는 시간이 많지 않아 형제의 맹약을 맺고 돌아간다.

하지만 1636년 4월 후금의 홍타이지는 몽골을 멸망시킨 후 국호를 청(淸)이라고 고치고, 스스로를 황제로 칭한 후 조선에 척화론자(명 외에는 모두 야만인으로 여기며, 명을 섬기고 청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를 보내 사과하라는 요구를 하지만 무시당하자 예고한대로 그해 12월 9일 얼어붙은 압록강을 넘어 조선을 침략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당시 조선은 몽골을 정복하고 명나라를 궁지로 몰아넣은 청의 기마군단을 상대로 싸울 여력이 없었기에 북방지역은 성문을 잠그고 산성을 지키며 방어진을 펼쳤고, 만약 도성이 위험해지면 조정은 강화도와 같은 보장지처(保障之處)로 피신한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하지만 청나라도 정묘호란 이후 조선을 전시대응 체계를 연구했고 왕이 강화도로 몽진하지 못하도록 해 전쟁의 주도권을 잡고자 최강의 기마부대 300명(팔기군)을 한양으로 급히 침투시킨다. 

큰 강만 셋(압록강, 대동강, 임진강)을 건너야 했고, 해는 짧고 날도 추운 겨울이었지만 기마부대는 밤새 말을 갈아타며 쉬지 않고 달려 5일만에 한양에 입성한다. 

빨라도 너무 빨리 온 기마부대로 인해 강화도로 피신할 수 없었던 인조는 광희문(시구문, 시체가 나가던 문)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게 된다. 하지만 날이 저물고 눈까지 내려 산길을 오르는 것을 쉽지 않았다. 

인조는 신하들의 등에 번갈아 업혀 남한산성으로 오르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남한산성을 오르는 중턱에서 더 이상 오르지 못하고 있을 때 산에서 내려오던 나무꾼을 만나게 된다. 나무꾼은 지게를 내려놓고 임금을 업고 남한산성까지 올라간다. 

산길은 험하고 잡목은 우거져 길을 찾기도 힘든데 눈마저 내려 빙판을 이루었으니 짚신을 신은 발은 선혈이 낭자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나무꾼은 무사히 임금을 남한산성까지 모시게 된다. 

인조는 나무꾼에게 고마움을 전하고자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고 임금이 입고 있던 곤룡포가 멋있어 보였는지 곤룡포를 갖고 싶다고 하자 인조는  곤룡포를 하사하셨다고 한다.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47일간 청나라에 맞서 버텼지만 강화도가 함락되어 왕실가족이 모두 인질로 잡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남한산성을 나와 청나라에 항복하고 만다. 

인조가 궁을 나와 남한산성으로 오를 때 인조를 업고 남한산성까지 오른 나무꾼이 서흔남이다. 서흔남은 남한산성 서문 밖 사노비로 대장장이, 기와장이 등의 일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인조를 업고 남한산성을 오른 데다 남한산성의 지리를 잘 아니 전국에 있는 근왕병을 불러 모으려는 왕의 격서를 적진을 통과해  전국을 다니면서 인조의 유지를 전했다고 한다. 

그 공으로 병자호란이 끝난 후 공을 인정받아 훈련주부와 가의대부 등 동지중추부사의 벼슬을 제수 받는다. 서흔남은 죽을 때 인조에게서 받았던 곤룡포를 같이 묻어주었는데 그 후 관원들은 그의 무덤 앞을 지날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고 한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영화배우 고수씨가 맡았던 날쇠가 실제 인물 서흔남이다. 죽어서 남한산성 밖인 광주시 중부면 병풍산에 묻혔으나 후일 묘비를 옮겨와 남한산성 동문 쪽 지수당 연못가에 묘비가 있고, 그가 인조를 엎으려는 모습의 동상이 서울시교육청 송파도서관 앞에 있다.

병자호란을 소재로 한 역사소설 남한산성을 집필한 김훈 작가는 “척화는 실천불가능한 정의요, 화친은 실천 가능한 치욕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다시는 우리가 이런 치욕을 겪지 않도록 정치인들이 정신 차려 주기를.

황규만
(사)한국액티브시니어협회 회장
(사)한국컨택센터산업협회 부회장
(사)푸른아시아(기후위기 대응 NGO 환경단체)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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