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만의 우리가 몰랐던 역사 이야기] 의자왕의 억울한 누명을 이제는 벗겨주자
[황규만의 우리가 몰랐던 역사 이야기] 의자왕의 억울한 누명을 이제는 벗겨주자
  • 김민수 기자
  • 승인 2023.12.11 08: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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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한국액티브시니어협회 황규만 회장
(사)한국액티브시니어협회 황규만 회장

의자왕은 누구일까요? 
맞습니다. 백제의 마지막 왕이지요. 그리고 낙화암에서 떨어진 3천 궁녀로 더 유명한 왕이지요. 그는 정말 백제를 멸망으로 이끈 무능한 왕이었을까요? 하나씩 알아봅시다.

원래 왕들은 사후 후대 왕에 의해 시호가 주어진다. 세종대왕(본명 이도)과 광개토대왕(본명 고담덕)이 그 좋은 예이다. 하지만 의자왕(義慈王)은 백제의 마지막 왕이었기에 사후 시호가 없다. 그래서 의자왕은 그의 원래 이름이다. 즉 성이 ‘부여’씨이므로 본명은 부여의자인 것이다. 

의자왕(義慈王)은 이름처럼 의롭고 자애로웠다고 한다. 젊었을 때 어버이를 잘 섬기고, 형제 사이에 우애가 돈독해 당시 사람들이 공자의 제자 중 효성을 상징하는 인물인 증자를 빗대어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불릴 정도였다. 

의자왕은 태자 융(615~682)의 묘지에 기록된 나이로 유추했을 때 595년 전후에 출생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늦은 나이인 37세(632년)에 태자로 책봉되고, 46세(641년)에 왕위에 오른다. 

의자왕은 40대 중반의 나이에 즉위하자마자 전국을 순회하면서 백성들을 살폈고, 죄수들 중 죽을 죄를 진 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방면하면서 민심을 회복하였다. 

또한 정권을 잡고 있던 귀족들을 밀어내고 신흥귀족을 발굴해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그럼으로써 귀족의 힘이 약해져 서민의 삶이 좋아졌다고 한다. 

그리고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해 40여개의 성을 함락시켰고, 경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전략요충지인 대야성도 차지하면서 19년의 재위 기간 중 15년간이나 신라를 불안에 떨게 했던 정복 군주였다. 

그렇게 강성했던 백제가 왜 멸망하게 되었을까?
결국 당시 강대국이었던 당과의 사이가 틀어지면서 사단이 난다. 백제는 의자왕의 아버지 무왕 때부터 당과 친선관계를 유지해왔으며, 의자왕이 즉위했을 때 당 태종이 책봉 교서를 보내 정통성을 인정해줄 정도였다. 

그런데 백제의 지속적인 공격으로 궁지에 몰린 신라가 당과의 관계에 국운을 걸고 신라의 휘장과 복식을 중국의 예에 따르기 시작했고, 진덕여왕이 직접 당을 칭송하는 시(태평송)를 지어 바치는 등 당에 대한 사대 외교정책을 전면에 내세웠다. 

당 태종의 뒤를 이은 고종이 벡제 의자왕에게 신라에게서 뺏은 성을 돌려주라고 하자 즉위 12년 당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운 국제관계 모색하게 된다. 

이에 660년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대군과 신라군 5만의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침략하고 사비성으로 진격해온다. 

계백장군이 황산벌에서 5천의 군사로 신라군 5만을 상대로 선전하지만 결국 뚫려 사비성을 함락되고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도피한다. 그런데 당의 공격이 없었음에도 연합군에 의자왕이 항복한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중국 북망산에서 발견된 예식진이라는 자의 묘지명을 통해 그 날의 진실이 밝혀진다. 

그 자는 백제에서 할아버지때부터 좌평 벼슬을 한 집안으로 그 당시 의자왕이 피신한 웅진성의 성주였는데 의자왕을 잡아 당에 항복해 당 고종으로부터 좌위위대장군(정3품)이라는 큰 벼슬을 하사 받게 된다. 결국 백제는 웅진성주의 반역으로 망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삼천 궁녀는 어떻게 된 것인가? 
당시 백제의 수도인 사비의 인구수는 5만명 정도였는데, 그 중 여성을 절반인 2만5천으로 보고, 거기에서 아이와 노인을 빼면 젊은 여성은 1만5천정도다. 그 중 20%인 3천명이 궁녀였다는 얘기다. 

실제로 고종실록에는 언급된 것처럼 조선의 궁녀가 500~600명 인 것을 감안하면 백제에 궁녀가 3천명이었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다. 

3천이라는 것은 조선 초 성종 때 문신 김흔의 ‘낙화암’이라는 시에 처음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당시 유행했던 당나라 백거이의 싯구절에 있는 “아름다운 후궁 삼천명이 있었는데~”를 참고해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인 듯 하다. 

‘삼천’이라는 숫자는 ‘많다’는 의미로 중국에서 흔히 사용되는 시적 표현이라고 한다.

강국 백제를 이끌었던 의자왕은 당으로 끌려간 지 1300년 만인 2000년 9월에 그가 묻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중국 북망산 지역의 흙을 가져와 백제 왕실 묘역에 그의 넋을 모시는 영토봉안식이 거행되었다. 

700여년의 오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이룩했던 강성했던 나라 백제가 결국 당의 실리에 따른 선택과 배신자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나라를 잃은 군주로서 의자왕은 백제 멸망의 책임을 져야겠지만 그에게 씌워졌던 잘못된 누명만큼은 이제 벗어줘야 되지 않을까.

황규만
(사)한국액티브시니어협회 회장
(사)한국컨택센터산업협회 부회장
(사)푸른아시아(기후위기 대응 NGO 환경단체)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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