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만의 우리가 몰랐던 역사 이야기] 백성의 臣, 방촌 황희
[황규만의 우리가 몰랐던 역사 이야기] 백성의 臣, 방촌 황희
  • 김민수 기자
  • 승인 2023.09.18 08: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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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한국액티브시니어협회 황규만 회장
(사)한국액티브시니어협회 황규만 회장

올해는 방촌 황희 탄신 660년이 되는 해이다. 1363년에 태어나 27세에 문과에 급제한 뒤 1392년에 고려가 망하자 杜門洞에 은거하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1394년(태조3년) 고려의 백성이기도 했던 백성들을 위해 조선의 조정에 나가 일하게 된다. 그리고 조선시대 태조와 정종, 태종과 세종 재위기까지 4명의 왕을 모시고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87세에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기까지 태종의 비서실장을 4년 했으며, 이조.호조.예조.형조.병조.공조 등 6조 판서직을 두루 역임하였고, 우의정 1년, 좌의정 5년, 영의정 18년으로 정승 반열에만 24년간 머물며 외교와 문물제도를 정비하고, 국방에 있어서는 4군6진을 개척했으며,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을 진흥 시킨 분이시다. 

특정 정파에 휩쓸리지 않고 여기 저기 특정 세력에 부화뇌동도 하지 않고, 오직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쳤고, 90세까지 장수하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조선의 개국공신도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반기를 들었던 인물이었으며, 게다가 태종이 세자(양녕대군)를 폐하고 세종대왕(축령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자 장자승계를 주장하며 끝까지 반대하다 결국 귀양살이까지 간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평소 황희를 아끼고 높이 평가한 태종이 세종에게 황희를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일 것을 권유하면서 재 출사했으며, 강원도 지방을 휩쓴 가뭄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하는데 누구도 손을 못쓰고 있을 때 관찰사로서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해 백성들을 구휼함으로써 세종의 신임을 얻는 계기가 된다. 

또한 방촌 황희가 영의정이 되기 전까지 만해도 삼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중 이조ㆍ호조ㆍ병조ㆍ의금부ㆍ내금위를 총괄하는 좌의정이 실세였으나 방촌 황희는 모든 실무에 밝다 보니 실무형 영의정으로써 세종대왕의 두터운 신임과 그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고불 맹사성과 함께 조선의 르네상스를 시대를 열게 된다. 

그는 강직한 인물로 주로 추진력과 결단력이 필요한 업무에 능했고, 원만한 성품의 고불 맹사성은 황희의 이런 강직함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하며 황희와 함께 조선 초기 문화를 이룩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시문에 능하고 음률에도 밝아 향악을 정리하기도 했다. 

세종대왕은 방촌과 고불을 포함한 신하들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고 말년에는 집현전에서 한글 창제에 전념했기에 지금 우리가 자랑스럽게 쓰고 있는 한글이 창제되었다고 한다. 

9월1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렸던 “백성의 신, 방촌 황희 학술대회”에서 국가교육위원회 이배용 위원장은 “세종과 황희는 가장 낮은 신분의 노비에게도 산후 100일의 휴가를 주었으며, 관비가 만삭인 채로 밭에서 일하다 출산을 하게 되면 산모의 생명이 위태로울 수 우려에서 산전 휴가로 한 달을 주었다. 

또한 남편에게까지 아이 양육을 도울 수 있도록 산후 휴가 한 달을 주는 등 동서고금에도 유래가 없는 최고의 복지정책을 펼쳤다”며 놀라움을 표했다. 어찌 600년 전에 그런 정책을 펼칠 수 있었는지 정말 놀라울 따름이다. 

그리고 한국조사사학회 오기수이사장은 “세종과 황희는 조세제도를 바로 세우고 조세의 과학화 및 선진화를 이루는 것이야 말로 ‘백성들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정책이라고 생각해 왕의 생각을 그냥 집행하는 것이 아니라 여론조사 및 25년간의 연구와 15년간 조정에서 논의 등의 과정을 거쳐 완성하였다”고 말했다. 600년 전에 17년간의 논의를 통해 정책을 입안했다는 것 또한 놀라운 일이다.

마지막으로 경제사회연구원 이한우센터장은 “세종이 볼 때 하륜이나 박은 등은 모두 직권을 남용하거나 사사롭게 일을 처리한데 반해 황희는 그런 일이 거의 없었고 대부분 공정하고 바르게 처신한다고 보았고, 공신이자 대선배인 하륜에게 당당하게 맞서는 황희의 강직함을 태종과 세종도 좋게 보아 20년 넘게 재상자리를 지켰다. 

87세에 영의정에서 물러났지만 파주 반구정에 머물게 하며 일이 있을 때마다 수시로 그를 불러 의논했다고 하니 세종대왕의 황희에 대한 신임을 짐작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백성을 위해서는 절대로 뜻을 꺾지 않고 그의 생각을 관철시켰으며, 여론조사를 통해 백성들의 생각을 읽었고, 새로운 법을 제정하는 데 있어 백성에게 꼭 필요한 법을 만들기 위해 17년간 토론을 거친 방촌 황희의 정신은 특히 작금의 시대에 정치인들에게 귀감을 된다고 생각한다. 

국민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당파만을 위해서 정치를 하는 이들에게 “백성의 臣”이었던 황희의 리더십을 배우고 익혀 지금부터라도 국민을 위한 정치를 펼쳐 주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  

황규만
(사)한국액티브시니어협회 회장
(사)한국컨택센터산업협회 부회장
(사)푸른아시아(기후위기 대응 NGO 환경단체)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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