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길 CEO칼럼] <獻辭> 우정(牛汀) 이 동찬 회장 탄신 100주년을 맞아
[전대길 CEO칼럼] <獻辭> 우정(牛汀) 이 동찬 회장 탄신 100주년을 맞아
  • 편집국
  • 승인 2022.03.31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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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대     길
(주)동양EMS 대표이사, 국제PEN한국본부 이사(인권위원회 부위원장), 
한국경총 前.고급인력정보센터 소장, 前.노사대책, 연수담당 이사 

2022년 4월 1일, 대한민국 경제영웅 중 한 분이신 한국경총 회장과 코오롱그룹 회장으로 일하신 故. 이 동찬(李東燦) 회장님의 탄신(誕辰) 100주년을 맞는 날이다. 

故. 우정 이 동찬 경총 회장, 코오롱그룹 명예회장은 대한민국 섬유산업의 큰 별이자 대부(代父)로 불린다. 그 분은 1982년부터 무려 14년간 격동의 시기에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회장으로 재임했다. 

<노사는 공동 운명체로 대립이 아닌 공존공영(共存共榮)을 위한 협력관계>란 ‘노사불이론(勞使不二論)’을 주창한 노사관계의 진정한 대부(代父)다. 

산이 너무 높이 치솟아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고산준령(高山峻嶺)이 아니라 우정 회장은 친숙한 고향의 뒷산 봉우리처럼 포근하다. 그런데도 그 아우라는 강렬하게 느껴진다. 

그 분의 삶 속에는 <가정과 가난, 그리고 조국>이란 3가지 결핍이 응어리져 있다.
이들은 결핍이기도 했지만 또한 설움이자 자산이었다. 단란한 가정에서 자라지 못한 설움, 찢어지게 가난했던 설움, 나라 잃은 설움이 그 분의 성장기를 관통하는 자물쇠이자 열쇠다. 

우정 이 동찬 회장은 어느 누구보다 가정의 소중함을 잘 알았다. 가정은 지극히 소박하고 화목했다. 가족 간에는 다정다감했다. 그 분은 굉장히 단정한 삶을 살았다. 

“기업의 핵심은 바로 사람이다. 직장은 제2의 가정이다. 노사가 서로 한 가족이라는 공동 운명체 의식으로 보람의 일터를 만들자”고 늘 힘주어 말했다. 

일제강점기에 가족을 남겨두고 일본으로 떠난 아버지를 둔 그 분의 어린 시절에 가난은 운명처럼 닥아 왔다. 어머니는 호구지책(糊口之策)으로 삯바느질로 자식들을 키웠다. 어릴 적에 보통학교만 세 곳을 옮겨 다녔다. 

보통학교 졸업 후에는 포항에 있는 일본인의 점방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성실하고 정직한 소년 이 동찬을 눈여겨 본 일본인 주인이 좀 더 열심히 일하면 따로 가게를 차려주겠노라고 했다. 그 시점에 일본으로 건너가 사업을 하는 아버지(이 원만)로부터 일본으로 오라는 편지가 왔다. 

일본으로 건너간 이 동찬 소년은 아버지 공장에서 주경야독(晝耕夜讀)하여 일본의 명문 와세다 대학교(早稻田大學校)에 입학했다. 훗날, 필자가 우정 이 동찬 회장께 “회장님, 그 어렵다는 와세다 대학교에 어떻게 단번에 합격하셨습니까?“라고 당돌하게 여쭈어 보았다. 

그러자 우정 회장은 ”아버지께서 6개월 동안 공부할 기회를 단 한번 줄 테니 합격하면 대학 보내 주고 그렇지 못하면 포기하라“고 했다. 그리고 나서 ”동경만(東京灣) 바닷가 고구마 주산지인 마을에 들어가서 6개월간 고구마를 주식으로 먹으며 오직 책과 씨름했다. 맨 처음 공부방에 들어가서는 6개월간 문밖으로 나와 본 적이 없다. 목숨 걸고 공부해서 와세다 대학교(早稻田大學校) 입학시험에 단번에 합격했다“고 옛날을 떠 올리며 말씀했다.   

1985년 4월부터 1998년 2월까지 약 13년간 필자는 한국경영자총협회에서 우정 이 동찬 회장을 가까이서 모시면서 총무, 비서 업무와 노사대책, CEO 교육, 고급인력정보센터와 인재은행 운영 책임자로서 일했다. 

<코오롱그룹 명예 회장실에서 우정 이 동찬 회장과 필자(2010년 4월1일)>

1998년 2월, 경총을 떠나서도 2014년 까지 해마다 생신(4월 1일) 날이면 종로구 통의동에 있는 코오롱그룹 명예회장실을 축하 화분을 들고 찾아뵙곤 했다.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며 우정 이 동찬 회장과의 소박한 인간미가 넘쳐나는 숨겨진 비화(秘話)를 기록으로 남긴다. 

2014년 7월21일 아침에 “점심 한 끼 함께 하자”라는 연락을 받고 우정 회장님을 모시고 종로 체부동에 있는 ‘보리밥과 수제비 집’에서 오찬을 했다. 

“회장님께서 오랫동안 맛있는 밥을 사 주셨는데 오늘은 제가 회장님께 점심식사를 대접할 기회를 주십시요”라고 말씀드렸다. “왜 자네가 점심을 사려고 하는가? 오늘이 무슨 날인가?”라고 되물으셨다. 

“예! 7월21일, 오늘은 제 월급날입니다”라고 말씀드리고 점심식사를 대접했다. 30년 동안 필자와의 정(情)을 때려고 마지막으로 내게 기회를 주신 것 같다.

수제비 집 여자 주인이 고객 방명록에 우정 회장의 친필 사인을 받으려 하자 ‘자네가 내 대신 쓰라’는 눈빛을 보내셨다. 그래서 필자가 “우정 회장님을 뫼시고 맛있는 외미(畏味)를 즐기리라”고 붓으로 써서 보여드렸더니 이를 보시고는 빙긋이 웃으셨다. 

“저는 이 세상에서 존경하는 분이 세 분 계십니다.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어머니와 도산 안창호 선생 그리고 경제영웅, 우정 이동찬 회장님을 존경합니다”라고 결재를 맡으면서 말씀드렸다. 

그러자 “내가 왜 유(You=자네)의 존경을 받아야 하나?”라고 되묻기에 “그 건 제 마음에서 우러난 존경심 때문입니다”라고 힘주어 말씀드렸다. 

어느 날, 우정 회장을 수행하던 중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습니까?”라고 여쭈어 보았다. “그냥 가르쳐 줄 순 없지만 특별히 알려 주겠다. 자기 주머니에 한번 들어 온 돈은 단 돈 1원이라도 명분(名分)없이는 쓰지 않는 것이다”라고 알려주셨다. 

1992년 여름, 스페인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황 영조 마라톤 선수(Kolon 소속)가 죽음의 몬주익(Montjuic) 언덕(해발 213M)을 숨 가쁘게 넘어서 손 기정 선수 이후 56년 만에 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막판에 스퍼트하는 황 선수를 지켜보면서 “아~! 소년기에 일본 Osaka 극장 화면 속에서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뛴 손기정 선수의 못 이룬 꿈(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을 땀)을 드디어 이루는구나!”라며 뜨거운 눈물을 펑펑 흘리셨다. 

나라 없는 고통과 슬픔을 날려버리고 마라톤 한국의 DNA를 되찾기 위해서 황 영조, 이 봉주 선수를 주축으로 한 코오롱그룹 마라톤 팀을 창단한 것이 그 꽃이 활짝 피고 탐스런 열매를 맺은 것이다.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마라톤 응원을 위해 날아 온 우정 회장은 대회 전 날 밤에 황영조 선수가 금메달을 목에 거는 꿈을 꾸었다. 황 영조 선수가 대회 전 날 밤에 숙면을 취하도록 일본인 친구가 구해 준 귀한 비상약을 꺼내지 않아도 황영조 선수는 밤잠을 잘 잤다. 

행사 당일 아침 일찍이 올림픽 주경기장을 둘러보던 우정 회장은 경기장 내 기념품 매장에서 금/은/동 메달 중에서 단 한 개만 남은 금메달이 눈에 띄었다. 얼른 그 금메달을 사서 우정 회장의 Y셔츠 속의 목에 걸었다. 

“이젠 되었다!”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는 <마라톤 사랑 이야기>를 필자에게 해주신 것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분의 얼굴엔 소년처럼 홍조 띤 함박웃음이 넘쳐났으며 무척이나 신나 하셨다. 

1992년 가을에 <코오롱그룹 보람의 일터 대행진>이 2,000여명 코오롱 임직원들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1991년 강원도 고성에서 열린 세계잼버리(Jamboree)대회를 김주성 코오롱그룹 비서실장, 김 남수 전무가 벤치마킹, 기획했다. 

그 후에 행사에 참가한 소감을 우정 회장께서 경총 간부들에게 물었다. 이구동성으로 행사에 관한 이야기는 제쳐 두고 ‘비가 많이 와서~?’라며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필자 차례에 “<비가 억수로 퍼 붓던 첫 날 밤은 코오롱의 과거(Past)이며 다음 날 아침에 햇빛이 쨍쨍 비추일 땐 코오롱그룹의 미래(Future)>라고 생각합니다”. 

행사가 끝난 직후 화장실에서 코오롱그룹 직원들 간의 대화를 우연히 들은 내용을 가감 없이 말씀드렸다. 한 참을 눈을 감고 계시던 우정 회장께서 ‘다시 말해 보라‘고 해서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 

1996년 5월6일(월) 아침 10시, <경총고급인력정보센터 운영계획(안)> 결재를 맡으려고 이동찬 코오롱 명예회장실 문을 노크하고 들어 선 필자에게 “뭐 하러 왔노? 바쁜데 전화나 팩스로 하지!”라며 우정 회장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예, 긴급하고 중요한 TV광고에 관한 내용이라 직접 결재를 맡으려고 왔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럼 설명해 보라!”고 했다. 

“회장님! 지난 토요일 오후에 안해와 함께 공주 갑사(甲寺)의 부처님께 108배를 올리고 계룡산을 넘어서 하룻밤을 보내고 오늘 새벽 4시에 동학사(東鶴寺) 부처님께 108배 기도를 하고 지금 왔습니다”라고 말씀드리니 “그래서? 본론을 말하라. 왜 갑자기 절(卍)과 108배 이야기를 꺼내느냐?”고 짜증을 내셨다.

"우정 회장께서는 고급인력을 위한 재취업센터를 운영하라고 제게 특별지시를 하시면서 '어려울 때 한번은 도와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지난 경총 간부회의에서 TV광고 모델(무료)을 회장님께 서달라고 제가 말씀드렸더니 '이 나이에 무슨 TV광고 모델이냐', '내가 미쳤냐?'라고 단호하게 거절하셨습니다. 

그래서 불자인 회장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유일한 방법은 부처님 월력뿐이라는 생각으로 공주 갑사와 동학사 부처님께 안해와 함께 간절하게 기도드리고 왔습니다. 일배(一拜) 절을 할 때마다 부처님 얼굴을 보면서 ‘부처님, 월력을 발휘해서 우정 회장께서 TV광고 모델을 꼭 서게 해 주세요’라고 간절하게 기도드렸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남아일언 중천금(男兒一言 重千金)이라는데 약속을 꼭 지켜주십시요”라고 말씀드렸다. 우정 회장께서는 참으로 난감(難堪)한 표정을 지으셨다. 이 때다 싶어서 “부처님! 우정 회장께서 마음이 움직일 듯 말 듯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부처님의 월력(越力)을 펼쳐 주소서!”라며 두 손을 합장하니 우정 회장의 두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알았다! 그래, 내가 한 약속을 지키마! 어찌 해야 하노?”라고 말씀하시기에 부처님께 감사하며 필자도 감사의 눈물을 따라 흘렸다. 동그라미 여러 개로 이루어진 재가(裁可) Sign을 하시고는 개인 일정 수첩을 펼치며 “내일 밖에 시간이 없다, 언제, 어디서 찍나?”라고 물으셨다. 

“내일 오전에 이 곳 회장실에서 찍겠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 모두 보는 TV광고입니다. 라디오, TV광고비 일체는 노동부 예산(2,000만원)으로 지원됩니다”
 
다음 날인 5월7일, 오전 10시~오후 4시까지(6시간) 코오롱그룹 회장실에서 차르르르~ 돌아가는 매경TV 카메라 앞에 선 74세의 우정 회장께서는 회장실 안을 거닐며 필자가 준비한 대사(臺詞)를 셀 수도 없이 반복하며 촬영했다. 

“고급인력 여러분! 새로운 일자리를 원하십니까? 경총 고급인력정보센터로 오십시오. 여러분의 일자리를 구해드리겠습니다”라고. 그 때 필자는 회장실 출입문 뒤에 숨어서 광고 촬영 현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문틈으로 지켜보았다. 우정 회장님께 무한한 감사함과 죄송함을 느꼈다.

 필자는 1985년 4월부터 1998년 2월까지 한국경영자총협회에서 우정 이 동찬 회장을 가까이서 모시면서 총무, 비서 업무와 노사대책, CEO 교육, 고급인력정보센터 책임자로서 일했다. 

1998년 경총을 떠나서도 2014년 까지 해마다 생신(4월 1일) 날이면 청와대 인근 통의동의 코오롱그룹 명예회장실을 찾아 인사드렸다. 이런 일화도 있다.  

1998년 2월, 필자가 경총을 사직하고 매일경제신문 인력개발원 대표이사 부원장으로 그리고  (주)동양EMS의 대표이사로 일하면서 우정 회장님 생신(4월1일) 때마다 “회장님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KOLON그룹 大吉”이란 리본을 단 예쁜 축분을 회장실로 보내고 인사드렸다. 

“왜 코오롱 대길인가?”라고 해마다 물으시곤 했다. “예, 코오롱그룹이 계속 성장 발전하려면 대길(大吉)이란 제 이름이 붙어야만 합니다”라고 말씀드리면 빙그레 웃으셨다. 

그리고 1998년부터 2014년 11월 우정 회장님이 서거하실 때 까지 일본판 ‘문예춘추(文藝春秋)’ 월간 잡지를 빠짐없이 회장실로 달마다 보내드렸다. 

2014년 4월1일, 생신 축하인사를 드리려고 우정 이 동찬 회장님을 찾아뵈었다.
“내가 대한민국의 큰 죄인이다. 1982년부터 14년간 경총회장으로 일했다. 그 전의 부회장 8년까지 합하면 총 22년간 경총의 수장(首長)으로 노사관계 일을 했는데 그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루어 논 게 없다. 봄철이 오면 노조의 임금인상 춘투(春鬪)가 해마다 열리는데 노사가 머리 맞대고 마음을 열고 물가인상과 생산성을 자동적으로 반영한 <임금조정 공식(방정식)>이라도 사회적 합의로 제대로 마련했어야 하는데 안타깝다!”면서 후회하셨다.

이에 “이 모든 것은 회장님을 경총 간부들이 잘못 보필한 때문입니다. 멍석에 두 무릎을 꿇고 국민께 석고대죄(席藁待罪)할 중죄인(重罪人)은 우정 회장님이 아니라 바로 저를 포함한 경총 간부들입니다”라며 그분께 머리를 숙여 용서를 빌었다. 

우정 이 동찬 회장은 정직하고 겸손하며 올바른 일에 열정(熱情)을 다 바친 경제영웅이다. S그룹, D그룹처럼 힘들어 하는 기업들을 향해서 “기업의 인수합병(M&A)으로 몸집을 키우는 경영방식은 옳지가 않다. 처음부터 땅에다 말뚝을 박고 공장을 세운 제조업이 바람직하다”는 기업 경영철학을 실천하셨다. 

<이상은 높게, 눈은 아래로>, <벌기보다 쓰기가, 죽기보다 살기가> 더 어렵고 힘들다고 늘 가르쳐 주셨다. <산을 오를 때보다 내려올 때가 더 위험하니 조심하라>‘고 일러 주셨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우정 회장의 숨겨진 흥미있는 일화(逸話)를 적는다. 
1980년대 말, 나중에 대통령이 된 두 분의 야당 대표(YS와 DJ)가 참석한 한국노총 대의원 대회장(6층)에 우정 회장을 수행하고 참석했다. 단상 정면에 VIP(정계, 경영계, 노동계 지도자들)석에 착석했다. 우정 회장이 축사를 하려고 연단에 오르려는 순간, 대회장내 이곳저곳에서 “물러가라! 이동찬~!”이란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대회장 연단에 선 우정회장께서 장내가 떠나갈 듯한 우렁찬 큰 목소리로 ‘축~사~!!!’라고 대갈일성(大喝一聲)했다. 그러자 분위기가 금방 잠잠해졌다. 처음부터 끝까지 축사를 마친 우정회장에게 참가자 모두가 그분의 용기와 담대함에 큰 박수를 보냈다. 

실제로 우정 회장은 6.25전쟁 중에 경찰에 자원입대했다. <대구경찰서 경북지역 특경대장(전투경찰대장)>으로 공비 토벌작전 대장으로 공훈을 세웠다. 그분은 6.25전쟁 참전용사로서 나라사랑을 몸소 보여주셨다. 그분께서 정의와 용감함을 보여준 사례다. 

이 때 필자는 사회자(조 용언 노총 사무차장) 뒤편에 서서 우정 회장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썼다. 우정 회장의 눈을 응시하며 <상사의 눈을 응시하는 눈 당번>에 충실했다. 

“불미스런 사고가 있으면 안 된다. 나는 우정 회장의 수행비서이며 유일한 보디가드이다”라며 마음을 다졌다. 행사가 끝나자 맨 먼저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우정 회장을 필자는 축화환 삼각대 밑으로 번개처럼 기어 나와서 자료집을 받아들고 우정 회장을 모시고 나오면서 수많은 노조 대의원들의 시선을 받았다. 

이게 바로 수행비서의 기본 책무가 아니겠는가? 행사 후 VIP들과 함께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시각이 오전 11시50분이었다. “이 근처에 적당한 오찬장소가 있는가?”라고 우정 회장이 필자에게 엘리베이터 안에서 물었다. “예! 63빌딩 56층 와꼬(和光)가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리자 VIP 모두가 잘 알고 있다며 고개를 끄덕이며 좋다는 반응을 보였다.  

여의도 한국노총 건물 6층에서 부터 계단으로 뛰어내려 온 수행비서들에게 “63빌딩 56층, 와꼬~!”라고 소리쳤다. 그 분의 승용차 앞좌석에 타자마자 평소에 외우고 있었던 전화번호(789-5751)로 전화를 거니 한강이 보이는 전망이 가장 좋은 강(江)실이 마침 비어 있단다. 

이런 게 천우신조(天佑神助)일까? 강실(江室) 예약을 하고 나니 등줄기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그분의 얼굴을 룸미러로 슬쩍 살펴보니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계셨다.  

VIP 오찬 중도에 식사비를 계산하라며 우정 회장의 골드카드가 쟁반에 받쳐 나왔다.  그렇지만 필자는 경총의 대외활동비를 쓰는 법인카드로 계산하고 그분의 카드를 쟁반에 담아서 반납했다. 

VIP 오찬간담회가 끝난 후 63빌딩 엘리베이터 안에서 우정 회장이 “해마다 발표하는 임금인상 가이드라인 때문에 경총 직원들 임금수준이 전경련, 상의보다 임금수준이 많이 낮아요. 맞는가?”라고 필자에게 물었다. “예, 사실입니다”라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함께 탄 VIP들이 “월급을 올려주고 일을 시키라”며 이구동성이었다. 이런 일이 계기가 되어서 경총 임직원의 임금수준은 우정 회장의 특별지시로 전경련, 상공회의소 등 타 경제단체 임금수준으로 파격적으로 인상된 바 있다. 

경총 회원사업부장으로 일하면서 필자는 <경총 회원사 배가(倍加)운동>을 펼치며 그 재원마련을 위해 회원사들 문턱이 닳도록 방문하며 동분서주했다. 뿐만 아니라 김 주성 코오롱그룹 비서실장의 도움으로 거액의 금일봉(2억원)을 경총 사무국 임직원 복지기금으로 우정 회장의 사비로 쾌척해 주셨다. 고마운 마음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1996년 2월,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전국 최고경영자 연찬회’를 기획하고 이를 총괄 진행했던 필자는 조 중훈 한진그룹 회장의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특별강연의 사회를 보았다. 2002년 월드컵 조직위원장으로서 조직위원회 전체 회의를 연기하며 끝까지 경청하셨던 우정 회장의 따뜻한 배려에 감동했다. 

특강 후에 조 중훈 회장께 <사업은 예술이다>라는 은쟁반에 칠보를 입힌 감사패를 김 정훈 KAL 인사담당 상무를 통해 전했다. 우정 이 동찬 회장과 정석 조 중훈 회장 사이에도 친교(親交)가 트였다. 

우정 이 동찬 회장을 오랫동안 모셨던 코오롱그룹 김 주성 前부회장(비서실장, 구미공장장 역임) 안 병덕 부회장, 석 도정 前사장, 홍 성안 전무, 장재혁 상무, 류 현준 부장, 강 대주 부장과 정성들여 따뜻한 차를 끓여서 우정 회장님을 잘 모신 박 혜영 차장(여비서)의 노고가 돋보인다. 이분들의 헌신과 우정 회장 사랑은 끝이 없다.   

특별히 개인생활과 가정생활을 포기하고 지난 36년간(1978년~2014년) 우정 회장을 위해서 24시간 숙식을 함께 하며 규칙적인 생활을 하도록 분골쇄신(粉骨碎身) 보필한 우정 회장의 분신(分身)인 서 기복 이사에 대해서 우정 회장은 “가장 무서운 사람”이라고 필자에게 말했다. 

우정 회장께서 서거하신 후 서 기복 이사 부부는 코끼리 바위로 유명한 울릉도 천부에 안식처를 마련하고 낚시를 즐기며 여생을 보내고 있다. 그는 울릉도 송곳 산 아래 절에서 우정 회장을 위해 날마다 새벽 예불을 올린다. 지극정성이다.

2014년 11월 8일, 우정 회장은 고향인 경북 영일만 비학산(飛鶴山) 단풍이 곱게 물든  날, 모든 걸 다 내려놓고 93세로 극락왕생(極樂往生)하셨다. 

끝으로 정 주영 회장, 이 병철 회장 등과 함께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주역이며 경제영웅이신 우정 이 동찬 회장은 정직하고 소탈하며 인간미가 넘쳐나는 아버지 같은 어른이셨다. 등산과 낚시를 좋아하고 마라톤, 농구, 골프 운동 등 Sports를 사랑한 우정 이 동찬 회장은 경영일선에서 은퇴하신 후 서양화 화가로 활동했다. 

우정 회장께서 그린 충북 제천의 대왕송 작품과 2002 월드컵 때 서울 시청 앞 플라자호텔에서 붉은 악마 응원 광경을 그린 작품을 직접 내게 선물하셨다. 그림 속에 나오는 ‘차 두리 축구 선수의 발’이 유독 눈에 돋보인다.   

우정 이 동찬 회장님 탄신 100주년을 맞아 필자가 육필(肉筆)로 쓴 헌사(獻辭)를 하늘나라에서 영면(永眠)하시는 우정 이 동찬 회장님께 바친다. 

Daegila가 우정 이 동찬 회장님의 명복(冥福)을 빌며 두 손 모아 합장(合掌)합니다. 
“우정 이 동찬 회장님!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극락왕생(極樂往生) 하옵소서~!!!“  

전     대     길
(주)동양EMS 대표이사, 국제PEN한국본부 이사(인권위원회 부위원장), 
한국경총 前.고급인력정보센터 소장, 前.노사대책, 연수담당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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