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길의 CEO칼럼] 서울/부산/대전/대구/광주/울산/인천/제주 지명 유래
[전대길의 CEO칼럼] 서울/부산/대전/대구/광주/울산/인천/제주 지명 유래
  • 편집국
  • 승인 2020.04.29 0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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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대   길
(주)동양EMS 대표이사, 수필가
국제PEN 한국본부 이사

성철스님이 “山은 山이고 물은 물이다”라고 외칠 즈음 이야기다. 
근로기준법의 대가(大家)로 평가받는 김 형배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교수가 “노동관계법은 성립→존속→소멸”한다고 가르쳤다. 지당한 말씀이다. 

인간도 “생로병사(生老病死)”란 ‘인간의 굴레(Human Bandage)’를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은 태어나서 늙고 병들며 사멸(死滅)한다”는 게 진리다. 

우리나라 지리, 역사, 문화의 변화에 따라 ‘땅 이름(地名)’도 변천해 왔다. 대도시 지명(地名)에 관한 유래(Origin)와 의미(Meaning)를 살펴보았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Seoul)’이란 지명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서울’이라는 이름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서벌(徐伐), 서나벌(徐那伐), 서라벌(徐羅伐)’에서 변천된 것이다. 신라 도읍(都邑)의 이름인 동시에 국명(國名)이다.

‘서(徐), 서나(徐那), 서라(徐羅)’는 ‘높고〔高〕 신령(神靈)’하다는 우리말 ‘수리’, ‘솔’, ‘솟’의 음사(音寫)다. ‘벌(伐)’은 ‘들판’을 의미하는 우리말 ‘벌’의 음사(音寫)다. 따라서 서벌, 서나벌, 서라벌은 상읍(上邑) 혹은 수도(首都)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1770년(조선 영조46년)에 편찬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신라를 서라벌 또는 서벌이라고 했다”란 기록이 있다. 서울은 신라시대에 ‘서라벌(徐羅伐)’, ‘서나벌(徐那伐)’로 불렀으며 조선시대에는 ‘셔블, 서벌’이란 기록이 나온다. 

옛날 우리 조상들이 사용하던 말 중에 ‘슬’과 ‘불’이 있다. 이는 ‘높고 크고 넓은 땅’을 일컫는다. ‘슬(Sur)’은 우리말 ‘산기슭’의 ‘슭’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그리고 ‘슬’과 ‘슭’은 발음상 쉽게 넘나들었다. 

‘불(Bur)’은 우리말 ‘벌판, 갯벌’의 ‘벌’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넓고 큰 땅을 ‘벌(불)’이라고 불렀다. ‘불’과 ‘벌’ 발음도 쉽게 넘나들었다. 

‘슬(Sur)+불(Bur)’이 합쳐진 ‘슬+불’은 ‘큰 것’이 중첩된 말이다. 매우 넓고 큰 곳이 ‘슬불’이며 ‘슬불’에서 ‘ㄹ’음 소리가 약화된 게 ‘스블’이다. 따라서 한글 창제 이전에는 ‘스불’이라는 순우리말을 표기할 고유한 우리의 문자가 없어서 한자(漢字)로 우리말을 표기해야만 했다. 그런데 그 표기방법이 여러 가지였다.

신라를 ‘서벌(徐伐)’이라고 했다. 백제 수도가 있던 곳은 ‘소부리(所夫里)’라고 했으며 상주(尙州)는 ‘사벌(沙伐)’이라고 했다. 현재 서울 서초동(瑞草洞)의 ‘서초(瑞草)’는 ‘서풀(서불)’이었다. 해마다 서초구에서 열리는 ‘서풀 축제’와 연관이 있다. 이들은 모두 ‘슬불, 스불’을 다른 방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스불’에서 ‘ㅂ’음의 묵음화로 ‘스울’을 거쳐 ‘서울’이란 이름이 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서울을 한강의 북쪽이란 뜻의 ‘한양(漢陽)’이라고 불렀으며 구한말에는 한성(漢城)이라고 했다. 일제강점기(1910~1945)에는 ‘경성(京城)‘이라고 했으며 1945년8월15일 광복 후에 ‘서울’이란 이름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밖에도 신라말기 승려이며 풍수설의 대사인 ‘도선국사(道詵國師...827~898년)’의 이야기도 재미있다. 도읍을 정할 땅을 둘러보던 중 큰 눈이 내렸다. 

그런데 지금의 서울(수도가 될  중심)만 눈이 녹아있어 ‘설(雪)울(눈 울타리)’를 쳤다고 했다. 그 후 설의 ㄹ음이 묵음화(黙音化)되어 ‘서울’이 되었다는 믿거나 말거나한 전설도 있다.  

부산직할시의 ‘부산(釜山)’이란 지명은 어떻게 유래했을까?
1402년(조선 태종2년) 1월28일 <태종실록>에는 ‘부할 부(富)’자의 “부산(富山)”이란 지명이 나온다. <세종실록지리지(1454)>에는 “동래 부산포”라는 기록이 있다. 1471년에 편찬된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에는 ‘동래현 부산포’란 기록이 있다. 

지금은 ‘부산직할시 동래구’이나 조선시대의 부산은 동래지역 보다 작은 포구(浦口)였다. 현재는 부산의 ‘부’자를 ‘큰 솥’이란 ‘가마 부(釜)’자를 쓰지만 620년 전의 ‘부산포(富山浦)’란 지명은 ‘부할 부(富)’ 자를 썼음을 알 수 있다.
               

부산 당감동 지역 전경...멀리 가마솥(?) 같은 산이 보인다
부산 당감동 지역 전경...멀리 가마솥(?) 같은 산이 보인다

1470년(성종1년) <성종실록>에는 ‘부산(釜山)’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다. 1481년(성종12)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부산(釜山)은 동평현(현재 당감동 지역)에 있다. 가마솥과 같은 산 아래가 부산포(釜山浦)“란 기록이 있다. 

<동국여지승람(1481)> 이전에는 ‘부할 부(富)’자의 ‘부산(富山)’으로 쓰다가 그 후에 ‘가마 부(釜)’자의 ‘부산(釜山)’으로 그 지명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대전(大田) 직할시 지명은 어떻게 왔을까? 
‘넓고 큰 밭’이란 ‘한 밭’이란 대전(大田)은 삼한시대 마한의 북변지의 신국(臣國)이었다. 백제·신라·고구려가 삼국통일의 패권을 다툴 즈음에는 대전은 백제 땅이었다. 고려 현종(1017년) 때에는 공주 관하에 속했다. 조선 태종13년(1413년)에 회덕군과 진잠군으로 개칭했는데 ‘태전(太田)’이라고도 불렀다. 

고종 42년(1905년) 1월에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일본인들이 이곳으로 이전해 왔다. 한일병합조약(1910년) 이후 일제의 식민정책에 따라 1914년에 회덕군·진잠군과 공주군 일부를 통합해서 대전군(大田郡)이 되었다. 

그 후 대전군(大田郡)은 외남면의 중심지역(지금의 인동·원동·중동·정동·삼성동 5.71㎢)에 대전면(大田面)을 설치하고 회덕읍에 있었던 군청을 원동으로 이전했다. 경부선에 이어 대전을 기점으로 호남선이 개통(1914년)되자 1904년 당시 수십 가구의 외진 마을이었던 한밭은 급속히 발전했다. 

1931년4월1일, 읍·면제의 규정에 따라 대전읍(大田邑)으로 승격했다. 1932년10월1일 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하자 충청남도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1935년 10월1일 부제의 실시로 대전부(大田府)로 승격되었다. 1949년8월15일, ‘대전시(大田市)’란 이름이 탄생했다. 1989년 행정구역이 확장되어 대덕군 전역을 편입해서 대전직할시로 승격했다가 1995년 3월, 대전광역시(大田廣域市)가 되었다.  

분지(盆地)인 대구(大邱) 광역시 지명에 관해서 알아본다.  
‘다벌, 달벌, 달불성, 달구벌, 달구화’는 대구의 옛 지명이다. 달(達)은 ‘원(圓), 주(周)’등 넓은 공간을 뜻한다. ‘벌’은 평지, 평야, 촌락을 뜻한다. 따라서 ‘달구화(達句火)’와 ‘대구(大邱)’는 같은 뜻이다. 

신라 경덕왕16년(757년), 당(唐)나라 문화의 영향을 받은 신라가 주, 군, 현의 지명을 중국식으로 고쳤다. 이때 ‘대구(大丘)’란 지명이 처음 등장한다. ‘달구벌(達句伐)’이 ‘대구(大丘)’로 바뀔 즈음에 벼슬 이름과 지명을 2글자의 한자(漢字)로 바꿨다. 개칭의 방법은 음을 딴 것, 뜻을 따르는 것, 아름답게 고치는 것, 글자를 줄이는 것 등 4가지 방법이었다. 달구벌이 대구(大丘)로 바뀐 것은 음을 딴 경우에 해당한다. 

조선 영조 26년(1750年)에 ‘구(丘)’자가 ‘공자(公子)의 이름’이기 때문에 다른 글자로 바꾸자는 상소가 있었다. 영조는 경망한 풍조라며 이를 신랄하게 비판했으나 영조·정조 시대에 대구(大丘)의 ‘구(丘)’자가 ‘구(邱)’자로 바뀌었다. 조선왕조실록(1779년)에는 대구(大邱)라는 지명이 처음으로 등장했다. 

그 후에도 공자 이름이라는 ’구(丘)’자와 ‘언덕 구(邱)’자가 혼용되었으나 1850년 이후 ‘대구(大丘)’를 ‘대구(大邱)’라고 고쳐 쓰게 되었다. 

빛 고을 광주(光州)직할시 지명에 관한 유래다. 
광주라는 지명은 고려 태조 23년(940)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목은 이색의 저서인 <석서정기>에 ‘광지주(光之州)’가 나온다. 이를 ‘빛 고을’로 해석한다. 빛은 곧 광명(光明)이다. 이 광명 이념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신앙이며 정신이자 기본철학이다. 한마디로 ‘광주는 태양의 도시’다. 광주시는 삼한시대에는 마한(馬韓)에 속했다. 백제(百濟) 개국(BC18) 때엔 백제3주(百濟三州)의 하나인 ‘무진주(武珍州)’였다. 

신라 경덕왕16년(757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무주(武州)’로 개칭했다. 889년(신라 진성여왕 3년)에 견훤(甄萱)이 이곳에서 독자적인 기반을 구축했던 사실(史實)도 있다. 고려 태조23년(940년)에 군현(郡縣)을 정비할 때 처음으로 ‘광주(光州)’라는 지명이 탄생했다.  

그 뒤 성종 15년(966년)에 해양현(海陽縣)이라 불렀다. 1259년(고종46년)에는  ‘기주(冀州, 冀陽州)’라고 했다가 1275년에 다시 무주(武州)로 개칭했다. 1895년(고종32년) 전국을 23부로 나눌 때 나주부(羅州府)에 속한 광주군(光州郡)이 되었다. 전라남도 도청소재지가 자리한 행정중심지다. 2005년에 전라남도 도청을 무안군으로 이전했다. 1949년 지방자치제 실시에 따라 광주시(光州市)로 개칭되었다. 1986년 11월에 광주직할시로 승격되었다가 1995년 3월에 광주광역시로 승격되었다. 

경상북도 대구시와 광주광역시 사이에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는다. 2013년에 대구시와 광주시는 ‘달구벌’과 ‘빛고을’ 지명 첫 글자를 딴 ‘달빛동맹’을 맺는다. 그 후 광주시와 대구시는 경제, 사회, 문화 등 다방면에서 영호남 지역감정을 초월한 교류와 협력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 코로나19 대구지역 확진환자를 광주병원으로 이송, 치료해 준 것도 달빛동맹 때문이다. 

울산(蔚山) 광역시 지명에 관한 유래다. 
울산이란 지명 발원에는 4가지 주장이 있다. 먼저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거도 장군이 영덕 일대를 정벌하고 우시산국을 세웠다는 ‘우시산국 기원설’이 있다. 

둘째는 철광석을 녹여 밤낮으로 쇠를 얻는 태화강 동천주변의 활활 타오르는 ‘울산 쇠부리’의 ‘불산’이 울산의 기원이란 주장이다. 울산의 고대 야철(野鐵)문화가 일본으로 넘어가서 일본 제철법(製鐵法)인 다다라(たたら)가 되었다. 

셋째는 몽골 기원설이다. 몽골 수도 ‘울란 바토르’는 ‘붉은 영웅’이란 뜻이다. 울산의 ‘고을 이름 울(蔚)’자는 ‘붉다’란 몽골어다. 울산은 몽골족이 한반도 동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해 온 경로 중 한 곳이다. 

넷째는 중국 땅 울주(蔚州) 기원설이다. 수나라에 의해 북주가 멸망(581년)하자 중국(울주)의 왕족과 귀족들이 신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1997년 7월15일 울산광역시로 승격했다.  

인천(仁川) 광역시 지명에 관한 유래다. 
따라서 인천의 첫 지명은 ‘미추홀’이다. 고구려 건국시조 주몽의 아들인 ‘비류(沸流)’왕자는 인천 문학산 인근에 도읍을 정하고 미추홀을 세웠다. 

삼국시대에는 ‘매소홀’, ‘소성’으로 불리었다. 고려 문종(11대)→순종(12대)→선종(13대)→헌종(14대)→숙종(15대)→예종(16대)→인종(17대) 등 고려왕조 7대에 걸쳐 인천은 왕의 외향(外鄕)이거나 왕비의 고향(故鄕)이었다. 따라서 고려 왕조의 왕비를 많이 배출한 명문지역이기 때문에 ‘7대에 걸친 왕의 고향’이라는 
의미로 ‘7대어향(七代御鄕)’이라고 백성들이 불렀다. 

조선왕조가 개창되면서 인천은 다시 인주로 강등되었다. 그러나 조선 태종13년(1413년 10월15일)에 지방제도 개편 때 군이나 현의 명칭을 산(山), 천(川)이란 두 글자 중 하나로 개정했는데 이때 ‘인천(仁川)’이란 지명이 등장한다. 지금부터 607년 전에 인천이란 이름이 처음 탄생한 것이다.  

그래서 인천직할시는 10월15일을 ‘인천시민의 날’로 정한 것이다. 여기에서 미추홀의 ‘미’나 매소홀의 ‘매’는 ‘물(水)’이란 뜻이며 ‘홀’은 ‘성(城)’이나 ‘골’로 해석된다. ‘추’나 ‘소’는 모두 사잇소리 ‘ㅅ’으로 풀이한다. 

신라 경덕왕은 신라의 제도나 관직을 중국식(中國式)으로 고쳤다. 순우리말 지명을 그 뜻에 해당하는 한자어로 바꾸었다. 고려 인종(1122~1146년)의 어머니 순덕왕후(인천이씨)의 고향이란 이유로 ‘인주(仁州)’로 개칭되었다. 

고려 공양왕 2년(1390년)에 이르러 경원부로 개칭, 승격되었다. 조선 초기 태조원년(1392)에 인주로 환원되고 조선 태종 13년(1413)에 이르러 모든 군이나 현에 '주(州)'자가 들어 있는 고을 이름을 '산(山)'자나 '천(川)'자로 바꾸었다. 이때 ‘인주’가 물에 가깝다 하여 '인천'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인천이란 지명은 한자풀이식의 '어진 내(仁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제주(濟州) 특별자치도 지명에 관한 유래다.   
대한민국의 남쪽 바다에 위치한 제주특별자치도이다. 8개의 유인도(有人島)와 82개의 무인도(無人島)로 구성된 제주도의 동서간 거리는 73Km, 남북 간의 거리는 31Km이고 해안선 거리는 258Km이다. 제주도 면적은 6억 평이다. 

남한 면적이 300억 평이고 서울 면적은 2억 평이니 제주도는 서울 면적의 3배정도이다. 동쪽으로 대한해협을 사이에 두고 일본의 대마도 및 큐슈 지역, 서쪽으로 중국의 상하이와 마주하며, 남쪽으로 동중국해와 면하고 있다. 

한국, 일본, 중국 등 동북아시아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지정학적으로 중요하다. 고대 삼국시대에 신라로 부터 ‘즐길 탐(耽)+벌릴 라(羅)’자의 ‘탐라(耽羅)’란 국호를 받았다. 그 후 탐라국은 독자적, 또는 예속적으로 삼국과 외교관계를 맺어오다가 고려시대(1105년)에 고려의 행정구역인 탐라군으로 바뀌었다. 고려 충렬왕 때 원나라에서 총관부를 설치했다가 다시 고려에 환속되었다. 

고려 때 제주도의 지방행정구역은 고려의 지방제에 따라 구분할 수 있다. 1416년 조선시대에 제주목과 대정현·정의현을 두었다. 1895년에는 제주목을 제주부로 개편했다. 1906년 목사를 폐지하고 군수를 두었다가 1915년 도제(島制)를 실시했다. 

1946년 처음으로 도제(道制)를 시행했다. 1955년 제주읍이 제주시로 승격되었다. 1981년 서귀읍이 서귀포시로 승격되었다. 2006년 특별자치도가 출범하며 제주시와 북제주군이 제주시로 통합되고 서귀포시와 남제주군이 서귀포시로 통합되었다. 제주는 한때 전라남도 관할이기도 했었다.

그렇다면 제주(濟州)란 지명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벌릴 라(羅), 빠질 탐(耽)’자의 ‘탐라(耽羅)’가 깊고 먼 바다 넘어 있기에 고려 고종 12년(1214년)에 ‘바다 건너 고을‘이란 뜻의 ‘제주(濟州)’라는 지명이 탄생 했다. 지금부터 816년 전에 ‘건널 제(濟)+고을 주(州)’자의 ‘제주(濟州)’라는 이름이 처음 탄생한 것이다. 그동안 왜 ‘제주(濟州)’인가에 나는 무관심했었다.
 
참고로 북한의 수도인 ‘평양(平壤)’이란 이름의 유래이다. 역사적 기록은 평양을 ‘류경(柳京), 서경(西京), 서도(西都)’라고 불렀다. 평양은 ‘벌 땅, 평평한 땅(Flat-Land)'이란 뜻이다. ‘고를 평(平)’은 ‘벌’, ‘흙 양(壤)’은 ‘땅’을 가리킨다. 

끝으로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한다. 진리(眞理)를 빼곤 영원불멸(永遠不滅)한 게 없다. 내 고향 땅, 내가 살아가는 지명(地名)도 언제든지 변할 수가 있다. 

어느 지역을 찾을 때에는 그 지역 이름의 유래에 관해서 살펴보자. 
예를 들면 ‘묶을 속(束)+풀 초(草)’자의 ‘속초(束草)’ 란 지명은 경상도 ‘울산(蔚山)’ 에서 북쪽으로 떠밀려오던 ‘울산바위를 풀로 묶어서 지금의 자리에 놓았다’ 에서 유래했단다. 속초(束草)는 참으로 흥미진진(興味津津)한 이름이다.  

    전   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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