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익 컨설턴트의 소소한 일상이야기148] 심심한 천국에서 재밌는 지옥으로
[한상익 컨설턴트의 소소한 일상이야기148] 심심한 천국에서 재밌는 지옥으로
  • 김민수 기자
  • 승인 2023.10.31 07: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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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익
•푸른소나무 life plan consulting 대표
•수필가 •재취업지원 컨설턴트 
•한국생애설계사(CLP)
•뉴질랜드 변호사

한 달 보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뉴질랜드를 방문한 후 귀국했다. 귀국 비행기는 평일 출발이라 그런지 만석이 아니라 자리가 여유로워서 편히 올 수 있었다.

우리 앞자리 칸에는 단체로 뉴질랜드를 여행하고 돌아오는 사람처럼 보이는 중년의 한국 승객들이 타고 있었다. 

눈치 빠른 남자 몇몇이 승객이 얼추 다 탔는데도 뒷자리들이 비어 있으니까 편히 가기 위해 미리 자리 잡으려고 얼른 빈 자리에 가서 앉았다가 승무원이 좌석 체크를 하면서 본인 자리로 돌아가라고 하니 쑥스러워하면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비행기 문이 닫히고 이륙 준비를 하자 더 이상 들어올 사람이 없다고 판단한 이들이 다시 자리를 옮기려고 하자 이번에는 다른 외국 승무원이 와서 이륙하기 전까지는 자기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주의를 주며 제자리로 돌려보냈다.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기회를 노리며 얍삽하게 행동했을 거 같은 모습이 그려지면서 다른 외국 승객들 보기에 민망했다. 이륙하여 비행기가 본 괘도에 이르기까지는 자기 좌석에 앉도록 하는 것은 혹시라도 사고가 날 경우 좌석을 통해 신원 파악을 하기 위한 조치일 것이다.

결국 비행기가 이륙하고 안정적으로 비행을 하면서 안전벨트를 풀어도 된다는 사인이 뜨자 앞자리 남자 승객들이 부랴부랴 자리를 옮기는 데 가만히 보니 그런 융통성을 부리는 사람은 한국 승객뿐이었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세 좌석으로 되어 있는 우리 열의 통로 쪽 좌석에 한국 승객이 타고 있어서 은근히 자리를 편하게 옮겨도 된다는 사인을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옮길 생각을 하지 않아서 결국 가운데 타고 있던 내가 비어 있는 뒷좌석으로 옮겼다. 

내가 재빨리 자리를 잡는 바람에 집사람이 누워서 올 수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편부터 눈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사실 한국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심심한 일상에서 재밌는 일상으로 복귀지만, 그동안 단순하게 흐르던 시간 속에서 살다가 복잡하고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은 시간으로 돌아감을 뜻한다.

신경 써야 할 일은 공교롭게도 떠나기 전날부터 시작되었다. 아내의 작은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들었기 때문이다. 장인어른의 바로 아래 동생 부인으로 80대 후반의 연세라서 호상(好喪)으로 볼 수도 있지만, 걷는 데 어려움은 있어도 건강하신 편이셨기에 갑작스러운 죽음 소식은 충격이었다. 

우리가 한국에 도착하는 날 장례를 치르고 형제분들이 아산에 있는 제일 호텔에  묵고 계신다고 하셔서 자정 무렵에 도착하여 피곤했지만, 다음 날 아침 일찍 호텔에 찾아뵈는 일로 귀국 일정이 시작되었다.

서울, 부산 그리고 제주도에 각각 떨어져 사시는 장인어른의 형제분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여쭙고 환송을 마친 후 집에 돌아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펼쳐보지도 못하고 널브러져 있는 여행 가방을 정리하고 있었더니, 이번에는 부산에 사는 처남이 세상을 떠났다는 믿기지 않는 부고를 받았다.

아내의 이종사촌 동생으로 아내와는 어렸을 때 함께 살았던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나이가 든 지금도 가깝게 지내며 자주 안부를 묻는 사이였다. 몇 년 전에는 역시 부산에 사는 사촌 처형을 포함하여 우리 부부와 함께 넷이 봄 벚꽃놀이를 다녀왔었다. 

한국에 돌아와 부모님 모시느라 제대로 바깥나들이도 못하고 있는 우리 부부를 위해 유명 관광지를 비롯하여 이름난 맛집에 관한 정보를 세심하게 준비하여 아무 불편 없이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꼼꼼하게 여행 계획을 했던 배려 많은 처남이었다. 

함께한 시간이 너무 즐겁고 좋았기 때문에 다음엔 가을 단풍놀이를 함께 가자고 했는데, 처형도 올 초에 세상을 떠났고 처남도 가버려서 이젠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어 버렸다.

비록 요양원에 계시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 부모님이 살아계신 데 자식이 먼저 앞섰다고 장모님은 “몹쓸 놈, 불효한 놈”이라고 하시며 처남의 죽음을 애도하고, 어릴 때 함께한 추억이 많은 아내는 얼마 전까지도 통화했었는데 믿을 수가 없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처남의 죽음을 받아들이기가 힘든 모양이다.

우리 부부의 숙제도 안고 왔는데, 갑작스러운 연 이은 비보(悲報)로 정신 차리기가 어렵다. 우리 부부가 귀국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큰 일들이 터지는 바람에 대처하느라 정신이 없다. 마치 한적한 시골길을 평온하게 다니다 갑자기 도심 한복판으로 들어선 기분이다. 다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뉴질랜드에 살 때 주변 사람들이 한국과 뉴질랜드의 삶을 비교하면서 “뉴질랜드는 심심한 천국이고, 한국은 재밌는 지옥”이란 표현을 썼었다. 두 나라가 ‘천국’과 ‘지옥’이라는 극단적인 한 단어로 정의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따분함’과 ‘재미’로 나타내고 싶은 상징성은 충분히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따분하고 심심하지만, 천국과 같은 평온함을 느끼며 살 것인가 아니면 변화무쌍하고 흥미롭고 재밌지만, 지옥 같은 번민 속에 살 것인가는 각자가 선택할 몫이다.

난 이미 시끄럽고 번잡한 ‘지옥’ 속으로 돌아왔으니, ‘재미’라도 찾지 못하면 진짜 지옥을 맛볼지도 모르겠다. 

한상익
•푸른소나무 life plan consulting 대표
•수필가 •재취업지원 컨설턴트 
•한국생애설계사(CLP)
•뉴질랜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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