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익 컨설턴트의 소소한 일상이야기138] 마지막 여행
[한상익 컨설턴트의 소소한 일상이야기138] 마지막 여행
  • 김민수 기자
  • 승인 2023.08.22 0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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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익
•푸른소나무 life plan consulting 대표
•수필가 •재취업지원 컨설턴트 
•한국생애설계사(CLP)
•뉴질랜드 변호사

장모님이 부산으로 여행을 떠나셨다. 딱히 무슨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문득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드신 듯하다. 특별히 작정한 목적이 없으니 돌아올 날짜 기약도 없이 부산으로 향하셨다. 그곳 사정과 장모님의 마음 상태에 따라 돌아올 날짜가 결정될 것이다.

부산은 장인어른과 장모님의 고향이기 때문에 친정 동생과 시누이들이 살고 있다. 친정 동생이 여러 해 전에 치매가 와서 요양 병원에 입원 중이고, 제부 또한 병으로 입원해 있기 때문에 사촌 시누이 집으로 거처를 정하셨다. 

사촌이지만, 젊었을 때 같이 지낸 시간도 있고 홀로 계시기 때문에 다른 시누이들보다는 마음이 편하신 모양이다. 

친동생이 치매에 걸리기 전에는 장인어른과 함께 일 년에 한두 번 부산에 내려가 동생 집에 머물면서 맛있는 음식도 먹으러 다니시고, 붙으면 늘 아옹다옹하면서 열을 올리는 국민 오락인 고스톱도 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셨다. 이번 여행길에는 더 이상 그런 기대를 할 수 없다. 모두 이젠 기억 속에만 남아 있는 시간이다. 

요양 병원에 있는 동생 얼굴이라도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지만, 면회가 허락되더라도 언니를 기억이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바꿔준 전화로 몇 번이나 언니를 상기시키려고 애쓰시는 통화 내용을 어깨너머로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장모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동생 얼굴을 보고 싶어 하신다. 그래서 90이 넘은 연세에도 떨쳐 일어나 여행길에 오르셨다. 

70이 넘어서도 친구가 있으면 자랑거리고, 80이 넘어서도 이가 있으면 자랑거리고, 90이 넘어서도 대소변을 가릴 수 있으면 자랑거리라고 했는데, 90이 넘으신 장모님이 아직 혼자 힘으로 화장실을 이용하시고, 더 나아가 동행도 없이 부산 여행길에 오르셨으니 자랑할 만하고 대단하시다고 할 수밖에 없다. 

조금이라도 걸을 수 있을 때 마지막 여행을 하고 싶다는 절박함이 장모님을 일으켜 세운 것 같다. 기차역까지 모셔다드릴 때 “이제 마지막 여행이다.”란 말씀을 거듭하셨다. 

근력이 빠져서 오래 걷지 못하는 몸으로 부산행 결심을 하신 배경에는 ‘마지막’이 되리라는 생각의 힘이 컸다. 부산이 고향이신 장모님의 경우 눈에 보이는 길거리, 하루 세끼 먹는 고향 음식, 만나는 사람 등등 모든 순간이 생전에 마지막 행보가 될 것이다. 그렇게 장모님은 마지막 여행길에 오르셨다.

연세가 90이 넘으신 장모님만의 경우가 아니다. 고희가 코 앞에 있는 나도 하루하루 행보가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되풀이되는 일상들은 예외가 되겠지만, 조금이라도 먼 길을 떠나면 아마도 마지막 여행이 될 가능성이 크다.

얼마 전 강릉 친구의 초대로 몇몇 고등학교 동창들이 설악산 오색 약수터 근처 콘도를 빌려서 주전골 산행을 하고 탄산 온천욕도 하며 함께 1박 2일을 보낸 적이 있다. 

친구들과 함께 주전골 산행을 하면서 누군가 “우리 이곳에 다시 올 기회가 있을까?”라고 물었다. 모임을 준비한 친구는 “다시 오면 되지.”라고 쉽게 말했지만, 나머지 친구들은 “현실적으로 언제 우리가 또다시 이곳에 모일 수 있겠어? 여긴 마지막이지” 하면서 회의적이었다. 

그 말속에는 시간, 나이, 건강 등에 대한 물음표가 담겨 있다. 물론 친구들과는 다른 장소에서 만나게 되겠지만, 또다시 설악산 주전골을 산행하는 일은 아마도 어려울 것이다. 

우리가 걷는 길, 보는 풍경, 함께 보내는 시간 등 모든 것이 마지막이란 생각이 들자, 모든 게 소중하게 여겨졌고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그만큼 ‘마지막’이란 말에는 절박함이 묻어 나온다. 그날의 모임은 내 기억 속에 친구들과의 ‘마지막 설악 여행’으로 저장되어 있다.

며칠간의 여행이 지나고 보면 짧게 느껴지듯이, 강산이 변한다는 세월을 살았던 뉴질랜드에서의 시간도 인생 전체로 보면 짧은 여행인 듯 여겨진다. 

따지고 보면 인생 자체가 여행길이다. 기독교 원리에 의하면 우리는 본향(本鄕)에서 살다가 이 지상에 오게 되었고, 지상 생활을 마치게 되면 다시 본향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 길이만 다른 여행길이다. 그래서 인생 여로(旅路)라고 하지 않는가.

천상병 시인은 이 지상 생활을 ‘소풍’이란 말로 표현했다. 참으로 정감 가는 말이다. 많은 사람이 애송하는 시 귀천(歸天)에서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고 적고 있다.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심한 옥고와 고문 후유증으로 죽을 때까지 고통스러웠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 세상살이가 소풍이고, 소풍이 아름다웠다고 말하겠다는 그의 시를 볼 때마다 나도 이 세상 소풍을 마치게 될 때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숙연한 마음이 든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말이 있다.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 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자신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분명히 인지하고, 그래서 행하는 모든 일이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산다면 우리 인생 여정에서 내딛는 발걸음마다 진중해지고 새롭게 여겨질 것이다. 

나는 오늘도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여행길에 발걸음을 내디딘다.

한상익
•푸른소나무 life plan consulting 대표
•수필가 •재취업지원 컨설턴트 
•한국생애설계사(C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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