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길의 CEO 칼럼] 유관순 열사를 추모하다
[전대길의 CEO 칼럼] 유관순 열사를 추모하다
  • 편집국
  • 승인 2018.02.28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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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을 생각하며
전   대   길
(주)동양EMS 사장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이사

1919년 3월1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온 백성이 일제에 맞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3.1운동’이 일어난 지 99년을 맞는다. 

우리들 중에는 ‘3.1절은 휴일’이라고만 생각하는 젊은 세대들이 있다.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서일까? 나라사랑 정신과 마음이 옅어져서일까? 

‘기미년 3월1일 정오~ 터지자 민물같은 대한독립만세~!’ 
3. 1절 노래가 들려온다. 3월 1일 아침, 두 손을 모아 안중근 의사, 유관순 열사를 떠 올린다. 

국가보훈처는 총이나 칼, 폭탄을 갖고 항일 독립운동을 결행한 애국지사를 ‘의사(義士)’라 하고 무기를 소지하지 않고 온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앞장 선 항일 독립 운동가를 ‘열사(烈士)’라고 정의한다. 

천안 아우네 장터에서 태극기를 들고 3.1운동에 앞장 선 유관순 열사(1902.12.16.~1920.9.28.)에 관한 7가지 진실을 알아본다.

1. 유관순 열사는 뜨개질을 좋아하고 장난기가 많던 이화학당 소녀다. 

-서대문 정동 이화여고 교정엔 유관순 열사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2. 유관순 열사의 키는 170cm에 달했다.    

-서대문형무소 기록에 따르면 5자6치, 환산하면 169.7cm다. 당시 여학생들의 평균 신장(身長)은 150cm였다.

3. 이화학당 교장선생이 만류했지만 '결사대'를 조직하고 3.1 독립만세  운동에 앞장을 서서 참가했다. 유관순 열사는 이화학당 학생인 김복순, 국현숙, 서명학, 김희자 열사 등과 함께 '결사대'를 조직해서 싸웠다. 

4. 고향 땅인 천안에서 대한독립 만세운동으로 인해서 일본군의 총칼 에 의해 눈앞에서 아버지, 어머니를 잃었다. 

-1919년 4월1일,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유관순 열사는 만세운동을 벌였다. 유관순 열사의 부모는 일본군이 휘두른 칼날에 학살되었다. 
유관순 열사는 이 때 아우내 장터에서 일본군에 의해 체포됐다.

5. 일제(日帝)의 재판을 받던 중에 일본인 검사에게 의자를 내던졌다.

-"나는 조선 사람이다. 너희들은 우리 땅에 와서 우리 동포들을 수없이 죽이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으니 죄를 지은 자들은 바로 너희들이다. 우리가 너희들에게 형벌을 줄 권리는 있어도 너희가 우리를 재판할 그 어떤 권리도 명분도 없다"고 공주재판소 법정에서 외쳤다. 일본인 검사가 "너희들 조선인이 무슨 독립이냐"고 하자 유관순 열사는 일본X 검사에게 앉아있던 의자(椅子)를 내던졌다. 

6. 옥중에서도 만세운동을 펼쳤다.

-감옥에서도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으며 그 때마다 일본X들에게 심한 고문(拷問)과 구타를 당했다. 

7. 유관순 열사는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다.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 밖에 없는 것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이다"라고. 유관순 열사는 1920년 9월28일 오전8시, 서대문형무소에서 눈을 감았다. 

나라가 없는 아픔과 슬픔을 상상해 보라. 
자유가 없는 한반도 북쪽 땅에서 태어났다고 상상해 보라. 
자유롭고 평화롭게 가족과 함께 즐겁고 편안하게 나날을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임이 얼마나 축복받은 삶인가? 
하늘에 감사하자. 나라에 감사하자

우리 후손들에게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한 ’자유 민주주의 대한민국‘을 물려주자. 애국(愛國)하는 마음, 애국심(愛國心)을 바로 세우자. 

전   대   길
(주)동양EMS 사장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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