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재산 원장의 아름다운 뒤태] 종이비행기도 접어야 난다
[가재산 원장의 아름다운 뒤태] 종이비행기도 접어야 난다
  • 편집국
  • 승인 2022.01.1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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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이후 부부 사이의 상황 악화는 시점 문제일 뿐 언젠간 틀어질 문제
‘삼식(三食)이 증후군’, ‘남편 재택 스트레스 증후군’ 해법은 배려와 이해
노년기 되면 서로에 대한 욕심이나 기대에 뺄셈 시작한는 습관 필요
세상사 남 탓해보니 영원히 답이 없더라. 답은 다 제 마음속에 있는 것
가재산ㆍ한류경영연구원 원장ㆍ피플스그룹 대표
가재산ㆍ한류경영연구원 원장ㆍ피플스그룹 대표

최근 고향의 지인 중에 남편과 1년간 별거를 선언하며 원룸에서 혼자 생활하는 분을 만났다. 요즘 용어로 졸혼(卒婚)이라고나 할까. 처음에는 환갑 나이도 넘은 그녀가 좀처럼 납득이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누가 봐도 부러워할 정도로 잘나가는 엘리트 집안인 데다 남편은 고위직 공무원 출신이었다. 연금만 해도 3백만 원 이상을 탄다. 큰아들은 변호사이고 며느리는 잘나가는 은행 지점장이었다. 작은아들도 의사이고 며느리도 대기업 간부로 재직 중이었기 때문이다.

한때 그녀는 황혼이혼도 생각해보았다. 변호사인 아들에게 그것에 대해 물어보니 단순히 남편이 보기 싫다는 이유만으로는 이혼 사유가 되지 않아 결국 남편과의 합의하에 이 길을 택했다고 했다. 오래된 이야기지만 폭발적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에서 엄마 김혜자가 남편의 허락 아래 1년간 안식휴가라는 명목으로 원룸을 얻어 자유를 구가하는 장면과 닮은 꼴이다.

그분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본즉 놀랍게도 남편이 싫어진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고위 공무원인 데다 정말 착실했던 남편이 2년 전 정년퇴직 후부터 행동이 달라졌다. 그동안 아내한테 소홀히 했던 점을 만회하기 위해 집안일과 온갖 서비스를 마음먹고 시작했다. 예를 들면 그동안 도와주지 못한 빨래를 한다며 속옷까지 빨며, 밥도 짓고, 시장을 봐 반찬도 직접 만들어 바치고, 이른 아침부터 먼지 하나 없을 정도로 집안 청소를 깔끔하게 해놓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정말 좋았고 대한민국 최고의 남편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자식이나 남편 자랑을 하면 팔불출이라고 했거늘 아줌마의 입이 간질거려 못 참고 친구들한테 자랑질까지 하고 다니기도 했다. 그런데 3개월이 지나면서 무언가를 하나씩 남편한테 빼앗기고 있다는 상실감이 가슴 한구석에 똬리를 틀기 시작했다. 남편 정년 이후 그녀는 갑자기 그녀의 공간과 자유를 송두리째 빼앗겼다는 박탈감이 송곳처럼 뾰족하게 마음 한켠에 솟아올랐다.

집콕하며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남편만 생각하면 온몸에서 식은땀이 나면서 가슴이 답답해지고 삶이 무기력해지며, 소화도 되지 않았다. 남편한테 물리적 공간을 빼앗겼다는 생각과 함께 자아를 잃어버렸다는 마음에 우울증까지 찾아왔다. 급기야 이 상태로는 도저히 같이 살 수 없다는 결심에 극단적인 이혼까지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반면 남편의 생각은 그녀와 전혀 딴판이었다. 그동안 가족을 위해 일만 하다가 모처럼 자신이 집에 있을 뿐인데 왜 그렇게까지 사태가 심각해지는지 도통 이해하지 못했다. 게다가 자신이 마누라와 바쁜 가족들을 위해 온갖 집안일들을 해가며 나름 희생하고 있는데 칭찬은커녕 불만 타령을 한다는 게 좀처럼 납득되지 않았다.

일본은 우리보다 20여 년 고령화가 먼저 진행된 나라다. 내가 40여 년 전 일본에 살 때 많이 들어본 이야기가 있다. 퇴직 전 무능해지는 사람들을 창가족(窓際族)이라고 불렀다. 퇴직 후 늙고 무능한 남편을 지칭하는 속어로 젖은 낙엽처럼 비로 쓸어도 땅에서 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누레 오치바(ぬれ落葉)’, 혹은 냉장고 같은 대형 쓰레기는 돈 주고 버려야 한다는 ‘소다이 고미(粗大ごみ)’라는 식으로 효능이 다 되어 처치 곤란한 남자들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직장을 그만둔 남편과 아내가 가정이라는 한 공간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오랜 시간 잠복되어있던 갈등이 한꺼번에 표출돼 결국 이혼에 이르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 특히 남편의 퇴직 후 아내들이 겪는 '퇴직남편 증후군'은 화병으로 이어져 우울증과 불안증, 불면증, 소화불량, 위염, 두드러기를 비롯한 피부 발진 등을 일으켜 졸혼이나 황혼이혼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남자는 정년이라도 있지, 여자는 평생 남자 뒤치다꺼리를 해야 해요. 퇴직한 뒤부터 가계부 써라, 또 어딜 가냐며 사사건건 간섭합니다. 게다가 물 한 잔까지 갖다 바쳐야 하니…. 나도 이제 행복할 권리가 있잖아요?" 여자들의 공통된 하소연이다. 반면 남편들은, "내가 평생 밥 벌어 먹여 살리다 이제 와서는 돈을 못 번다고 그렇게 괄시할 수가 없어요. 내가 일할 때 아내는 헬스클럽이다 동창회다 다니고선 같이 놀기 싫답니다. 억울한 생각만 들어요."

어느 날 동창회에 다녀온 아내가 화를 내자 남편이 묻기를 돈이나 행색이 다른 동창에 뒤처져서 그러냐고 하자, 아내 왈 "나만 남편이 살아 있잖아!"라고 얘기했다는 우스갯소리는 세태를 그대로 방증한다. 은퇴 이후 부부간의 관계 악화는 생각보다 심각하다. 원인이야 많겠으나 십중팔구 남편 문제로 집중된다.

은퇴 이후 부부 사이의 상황 악화는 시점 문제일 뿐 언젠간 틀어질 시간문제다. 부딪히면 폭발한다. 원인 제공은 남편이 하고, 방아쇠는 아내가 당기는 꼴이다. 돈을 벌 때는 그래도 참지만, 은퇴 이후까지 남편의 ‘꼰대질’을 받아줄 아내는 없다. 남편의 불편은 아내로선 불편을 넘어 반발을 낳는다. 요컨대 ‘부원병(夫源病)’의 본격 발발인 셈이다. 남편이 원인이 된 병이라는 신조어인데, 부원병은 의학적으로 실증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삼식(三食)이 증후군’, 일본에는 ‘남편 재택 스트레스 증후군’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남편들의 은퇴는 아내들에게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서울의대 연구 결과, 은퇴한 남편을 둔 아내가 우울증에 걸릴 위험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70%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남편은 어떤 이유로 아내가 은퇴하더라도 우울감에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남편 재택 스트레스 증후군은 부인이 한마디 말대꾸도 하지 않고 참으며 자신을 억제하는 성격인 경우 걸릴 확률이 더 높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이의 해결 방안으로 부부간의 배려와 이해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남편 입장에서는 "내가 여지껏 고생했는데 집에서 대접을 좀 받아야겠다."고 생각한다거나, 아내가 외출하는 것을 싫어하며, 꼬치꼬치 캐묻기도 하고, 부하 직원에게 대하듯 이래라저래라 집안일에 간섭하면 아내가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고 지적했다. 반면 아내 입장에서는 남편의 상황이 갑자기 변했다는 점을 이해하고, 같이 취미생활을 하거나 다른 관심사를 만들어주면 부부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충고다.

남자들이 마누라 무서워지는 것은 나이가 들면 누구나 마찬가지다. 돈이 많거나 출세를 좀 했다는 고위층은 예외인 듯싶지만 누구나 다 겪는 공통된 일이다. 퇴직했다고 해서 무턱대고 아내의 공간을 밀고 들어가거나 일방적으로 점거하는 식으로는 곤란하다. 아내의 공간을 인정해주면서 서로 하고자 하는 일에 격려와 박수가 필요하다. 노년기가 되면 서로에 대한 욕심이나 기대에 서서히 뺄셈을 시작해보는 습관을 갖는 것이 어떨까?

예를 들어 일주일쯤 마누라가 집을 비우거나, 반대로 남편이 집을 비운다 해도 서로가 "그까이꺼…." 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넘겨버리는 게 상책이다.

자그마한 종이비행기도 접어야 날지 않는가. 시인 박영희 님의 작품 중에 〈접기로 한다〉라는 시가 있다. 세상 모든 것이 접혀야 비로소 온전히 펼쳐진다는 평범한 삶의 지혜를 일러준다.

색종이도 접어야 종이배가 되어 냇물에 띄울 수 있고, 또 두 번을 더 접고 접어야 하늘을 나는 비행기가 된다. 살다 보면 이슬비도 장대비도 한순간이고, 비가 오다 햇볕이 들면 배겨나지 못하는 우산 접듯 반만 접기로 하고, 그래도 안 되면 반의반만 접어보면 어떨까 싶다. 1년 만에 졸혼 생활을 접고 돌아와 잘 살고 있다는 그녀를 10여 년 만에 만나 근황을 물었다.
"요즘은 남편과 사이좋게 잘 지낸다면서요?"
"네, 세상사 남 탓해보니 영원히 답이 없더라구요. 답은 다 제 마음속에 있는 거 같아요!"

가재산
ㆍ한류경영연구원 원장
ㆍ피플스그룹 대표
ㆍ핸드폰책쓰기코칭협회 회장
ㆍ청소년 빛과 나눔장학협회 회장
ㆍ책과 글쓰기대학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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