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훈 소장의 세상사는 이야기] ‘정관정요’와 불통과 소통
[최승훈 소장의 세상사는 이야기] ‘정관정요’와 불통과 소통
  • 김민수 기자
  • 승인 2023.06.22 08: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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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훈
•한국생애설계포럼 대표
•한국생애설계연구소장

당나라의 2대 황제인 태종 이세민은 천성이 총명하고 사려가 깊고, 무술과 병법에 뛰어났으며 결단력과 포용력도 갖추고 있었으므로, 소년 시절부터 주위 사람들의 신망이 두터웠다고 한다. 

수나라 양제(煬帝)는 남북으로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기는 했지만, 대규모 토목 공사를 일으켜 민심이 흉흉해졌고. 군신간의 불통으로 혼란해진 틈을 타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그 당시 이세민은 태원(太原) 방면의 군사령관으로 있던 아버지를 설득하여 군사를 일으켜 군웅을 평정하고 천하를 통일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20세 안팎에 불과했다. 

이렇게 당나라가 건국되었고(618년), ‘이세민’의 아버지 ‘이연’이 초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당 태조 이연은 개국에 별다른 공적이 없는 맏아들 건성(建成)을 황태자로 삼았는데, 이것이 형제간의 불화를 일으키는 발단이 되었다. 

건성은 이세민의 공적과 덕망이 나날이 높아지는 것에 강한 질투심을 느껴 동생 원길(元吉)과 함께 이세민을 제거하려고 모의를 하게 된다. 

이세민은 이 사실을 알고 건성과 원길이 조회에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현무문에서 이들을 죽여 버렸다. 이것을 현무의 난이라고 한다. 그 후 626년에 아버지로부터 양위를 받아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당시 그의 나이 29세였다.

당나라 태종 때의 정치의 요체를 밝힌 대화록인 정관정요(貞觀政要)는 오긍(吳兢 중종(中宗), 현종(玄宗) 대의 사신(史臣).663년~749)이 기록한 것으로 당 태종 대의 연호인 ‘정관(貞觀)에서 따온 것이다. 

‘정관의 치(貞觀之治)’를 이룩한 당나라의 2대 황제인 태종 이세민은 한(漢) 나라 이래 500년이 넘는 동안 혼란을 거듭하고 있던 중국을 통일하고 당나라 300년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다. 

중국 고유의 문화를 개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웅대한 제국으로서 널리 외래문화를 수용, 동화하여 국제적인 종합 문화를 형성하고 동양 제국의 문화에 광범위한 영향을 주었다. 

‘방현령(房玄領)’, ‘두여회(杜如晦)’에게 정무를 종합적으로 관장하게 하고 ‘위징(魏徵)’을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삼아 위징의 기탄없는 간언을 받아 정책에 반영한 것은 군주로서 탁월한 선택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정관(貞觀: 당태종 이세민의 연호 627년~649년) 2년, 태종이 가까이 있는 신하들에게 물었다. “현명한 군주와 어리석은 군주를 구별하는 기준은 무엇이오?” ‘

위징(魏徵)’이 대답했다. “군주가 영명한 까닭은 자신의 생각과 다른 의견을 널리 듣고 소통하기 때문이고, 군주가 어리석은 까닭은 편협되게 어떤 한 부분만을 믿기 때문입니다. 군주된 자는 여러 다른 의견을 듣고 아랫사람들의 합리적인 건의를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면 제아무리 권세가 큰 대신이라도 아랫사람들의 소리를 가리거나 군주를 어리석게 할 수 없으며, 백성들의 실정이 조정에 그대로 반영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정관 10년, 태종이 주위에 있는 신하들에게 물었다. “창업(創業)과 수성(守成)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어렵소?” 

‘방현령(房玄齡)’이 대답했다. “천하가 혼란스러워지면 영웅들은 다투어 일어나지만, 싸워 이겨야만 제압할 수 있으니 창업이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자 ‘위징’은 “제왕이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세상이 혼란스러워진 뒤의 일입니다. 혼란을 제거하고 나면 천하의 인심이 제왕에게로 돌아옵니다. 일단 천하를 얻은 뒤에는 마음이 교만해져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소홀해지니 민심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미 세운 업적을 지키는 수성이 훨씬 어렵습니다.”고 했다.

정치의 근본은 군주나 신하 한 개인에 의해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상호 협력할 때 가능하다. 그러나 대다수 신하들은 군주의 위세에 눌려 솔직한 의견을 펼치지 못하고, 잘못된 명령을 그대로 시행하여 수많은 백성들에게 재앙을 안겨 주기도 한다. 

이것은 신하들이 올바른 간언을 할 수 없도록 한 군주에게 첫 번째 책임이 있고, 다음으로 책무를 다하기 보다는 윗사람에게 영합하려고 한 신하의 책임이 크다 할 것이다.

특히 간의대부 ‘위징’은 황태자였던 ‘건성’의 책사로 그를 위해 다양한 정책을 건의하였으나 우유부단한 건성은 용기와 결단력이 모자라 아우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 

건성이 죽자 그 책사인 위징이 이세민에게 붙잡혀오게 되는데, 자신을 죽이라고 건의했던 ‘위징’을 죽이려고 했으나 당당하고 용기 있는 그의 올곧은 태도와 백성을 위한 지극한 애민 심을 높이 사게 되어 그를 용서하고 간의대부로 임명하게 된다. 

태종은 항상 바른말로 간언하며 조금이라도 옳지 못한 결정이나 바르지 못한 생각으로 행동을 하게 되면 목숨을 걸고 간언하는 ‘위징’을 죽이고 싶도록 미운 생각이 들 때도 있었으나 숙고해 보면 그것은 군주와 나라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의 의견을 수용하였다고 한다.

‘정관지치(貞觀之治)’가 가능했던 것은 태종이 거울이 없으면 자신의 생김새를 볼 수 없듯이 신하들의 간언이 없으면 정치적 득실에 관해 정확히 알 방법이 없다고 한 그의 통치 철학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먹줄이 있으면 굽은 나무가 바르게 되고 기술이 정교한 장인이 있으면 보옥을 얻을 수 있듯이, 시세를 꿰뚫어 보는 혜안을 가진 신하의 충언은 군주를 바로 서게 할 뿐 아니라 천하를 태평성대로 만들 수 있게 한다고 하였다. 

태종이 신하들에게 당부했다. “나는 상소를 받으면 언제나 두려운 마음이 들고, 말하는 것도 순서를 잃게 되오. 내가 이러한데 하물며 간언과 논쟁을 하려면 신하들 또한 두려움이 따를 것이오. 그러므로 나는 간언하는 자의 말이 내 생각과 맞지 않아도 그가 나를 범(犯)하였다고 생각하지 않겠으니 신하들은 자기의 생각을 진실되게 내게 전하도록 하시오.” 

불통과 소통은 정반대의 뜻이지만 그 차이는 조직의 발전과 흥망과 직결되어있는 것이다.

군주가 신하의 간언을 구하는 경우는 적지 않으나 그것을 받아들여 국정에 반영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신하들의 간언이 대부분 군주의 생각과 반대편에 서 있기 때문이다. 

태종은 신하들의 솔직하고도 거침없는 비판을 수용하려고 애썼으며, 이 때문에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제대로 된 간언을 받아들여 통치의 지침으로 삼는 것이 성군의 중요한 덕목이라 생각했다.

태종의 이러한 태도가 군신 간에 민주적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여 정확한 정책이 효율적으로 집행될 수 있게 한 것이다.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일종의 지도력의 위기를 겪고 있는 오늘의 상황에도 태종의 지도력 원리는 그대로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당대의 걸출한 지도자였던 ‘이세민’이지만 고구려 정벌을 실패한 궁극적인 원인은 고구려의 준비된 자주 국방력과 군. 신. 민의 일치단결된 애국심, 양만춘이란 걸출한 지도자와 고구려 명장들이 함께 노력한 치밀하고 집요한 전략의 우세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 전투에서 양만춘 장군의 화살에 한쪽 눈을 잃게 되는 당 태종은 훗날 이렇게 탄식하였다고 한다. “만일 위징(魏徵)이 살아 있었다면, 나의 고구려 원정을 막았을 것.”이라 했다. 당 태종을 위대한 군주로 만들었던 간관(諫官) ‘위징’은 ‘고구려 원정과 안시성 전투’ 1년 전인 서기 643년에 사망하였다. 

개인 간에 소통이 안 되면 관계가 파괴되고 조직의 소통이 막히면 실패의 길로 갈 뿐이다. 정관정요를 통해서 불통과 소통의 의미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리더가 반드시 한번 읽어야 할 책인 ‘정관정요’의 일독을 권한다.

최승훈
•한국생애설계포럼 대표
•한국생애설계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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