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훈 소장의 세상사는 이야기] 가황 ‘라훈아’의 추억
[최승훈 소장의 세상사는 이야기] 가황 ‘라훈아’의 추억
  • 김민수 기자
  • 승인 2023.07.13 0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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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훈
•한국생애설계포럼 대표
•한국생애설계연구소장

얼마 전 ‘유투브’에 ‘라훈아 교통사고로 별세’라는 방송이 나와 기절초풍을 할 뻔했다. 다행히 가짜 뉴스라 밝혀져 가슴을 쓸어내린 적이 있다. 정말 나쁜 놈들이다. 이런 가짜 뉴스들은 반드시 응징하여 우리 사회에 발을 붙일 수 없도록 하여야 한다. 

   <Modoosearch News. 230523>
   <Modoosearch News. 230523>

'라훈아'와 나는 특별한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잠깐 스친 인연이 아니라 40여 일 동안 동고동락했던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2020년 9월 30일 우리 시대 최초로 비대면 초대형 공연이 코로나19 장기화로 지친 국민들을 위로하고 응원하고자 마련된 ‘2020 한가위 대기획’ “대한민국 어게인”이라는 캐치프레이즈(catchphrase)로 전국에 방영되었다. 

공연 도중 “여러분 우리는 지금 힘듭니다. 우리는 많이 지쳐있습니다. 저는 옛날의 역사책을 보든 제가 살아오는 동안에 왕이나 대통령이 국민 때문에 목숨을 걸었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본 적이 없습니다. 이 나라를 누가 지켰냐 하면 바로 여러분들이 이 나라를 지켰습니다. 윤봉길, 안중근 의사 등 이런 애국지사들 모두가 다 보통 우리 국민이었습니다. 

여러분은 IMF 때도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며. 집에 있는 금붙이를 다 꺼내서 팔았습니다. 이처럼 국민이 힘이 있으면 위정자(僞政者)들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이 세계에서 1등 국민입니다.”라는 말에 온 국민이 감동했었다.

지난해 가을에 그렇게 보고 싶었던 ‘라훈아 쇼’를 관람하게 되었다. 올림픽 공원 체조경기장은 입추의 여지도 없이 관객이 들어차 있었다. 시작 시그널과 함께 라훈아 특유의 복장과 미소를 지으며 그가 나타났다. 노래도 좋았지만, 그 독특한 입담은 철학가를 능가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듯했다.

노래하던 중간에 “고모부 직인 김정은 앞에서 때리 직이도 우째 노래하누” 나훈아는 2018년 평양공연 불참 속내 털어놓았다. 데뷔한지 55년 콘서트서 만담꾼처럼 늘어놓는 이야기에 갈채와 함성이 저절로 나왔다.

“지는 노래가 전부 서정적입니더. 근데 뚱뚱한 저거는, 저거 고모부를 고사포로 쏴 직이고, 저거 이복형을 약으로 직이고, 당 회의할 때 꿈뻑꿈뻑 존다고 직이뿌고. 그런 사람 앞에서 이 세상에~ 하나밖에~ 둘도 없는~ (나훈아의 ‘사랑’), 이기 나옵니꺼? 으이?” 

나훈아가 쏟아낸 부산 사투리 가득한 고백에 객석은 웃음바다가 됐다. 그의 데뷔 55주년 전국투어 콘서트에서 2003년 발표곡 ‘공’의 ‘띠리~띠리~띠리~리리~’ 후렴구를 부르던 도중 만담꾼처럼 익살스럽게 꺼낸 이야기였다. 하지만 내용은 묵직했다. 언론 접촉을 극도로 꺼리는 나훈아는 항상 자신의 공연에서만 속내를 터놓기로 유명하다. 

지난해 7월 대구 공연에서는 당시 이재명 후보에 대해 “내 바지가 지 바지보다 비쌀긴데”라고 꼬집은 발언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후보가 TV 토론회에서 여배우 스캔들을 해명하며 ‘바지 내릴까요’라고 한 발언을 비꼰 것이다.

이날도 특유의 화법으로 속내를 털어놨다. 2018년 평양공연에서 김정은이 왜 나훈아가 오지 않았느냐고 물었고, 도종환 당시 문체부 장관이 “스케줄이 바빠서”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말은 달랐다. 

“저거는 내가 바빠서 못갔다 카는데, 적어도 제 공연 오신 분들은 알아야합니더. 거기서 때리 죽이도 안(노래가) 나올낀데 우째 하누. 앞에 있으면 귓방맹이를 쌔리든지 해야지.” 객석에선 “와~” “그렇제!” 환호가 터져 나왔다.

나훈아 공연은 표 구하기 어렵기로도 유명하다. 예매가 진행된 공연은 전부 5~8분 만에 전 석이 매진된다. 공연표 정가는 약 14만 원이지만 암표 값은 4~50만원이 넘는다고 한다. 필자도 그 어렵다는 티켓을 큰딸이 광클(빠른클릭)한 끝에 겨우 공연에 참석하게 되어 2시간 30분 동안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지난해 코로나 감염 확산세에도 공연을 강행해 눈총을 받았던 나훈아가 거리 두기 해제 후 진행하는 무대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능청스레 “코로나 첨 나왔을 때 맥주가 새로 나온 줄 알았소. 지금 함 보이소. 원숭이 두창인지 세창인지. 이게 다 무슨 짓입니꺼.” 

또 동요 ‘반달’을 부르면서 “달에 사람이 가면서 계수나무와 토끼가 사라졌다. 인간들이 하는 짓이 하도 이러니 벌 받는거 아인교”라며, “아프리카 밀림 온갖 것 다 잘라 불태우니 원숭이가 갈데 없어, 두창인지 세창인지가 전염되고, 동굴 근처에 아파트를 다 지으니 박쥐가 갈 데 없어 병을 다 옮기는기라. 세계 지도자들이 딴소리 할 게 아니라 자연을 고만 해치자. 인간들 정신 차리자 캐야 합니다.” 객석에선 박수가 쏟아졌다.

“내년 공연을 장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박수칠 때 떠날 거다. 절대 무대에서 박수를 구걸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 나이치고 잘 부른다는 소리가 제일 싫다”며 웃었지만, 그 말이 무색하게 첫 곡 ‘테스형’부터 앙코르 곡 ‘갈무리’까지 총 22곡을 전부 혼자 열창했다. 

지난해 낸 신곡 중 ‘체인지’ 때는 마이클 잭슨 같은 차림으로 직접 춤추며 노래했고, ‘맞짱’ 땐 살아있는 말을 타고 무대로 나섰다. 그걸로도 모자라 “앙코르 대신 좋은 국산 말 쓰자”며, “또, 또”로 관객 호응을 유도하더니, 당초 예정된 2시간보다 30분을 더 길게 노래했다.

중·장년층이 대부분인 객석을 향해서는 “아(애)들이 막(마우스) 두들기 갖고 표 구해가지고 보내준 거를 내 알거든요”라면서 그런 자녀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해달라고 했다. 

공연 막바지 나훈아는 “카메라로 내 얼굴 함 땡기 봐라. 잘 보이소 늙었는가”라더니 “세상이 이렇더라도 꼭 세월에 맞서 이기라”며 관객에게 외쳤다. 

“여러분, 한번 태어난 세상, 죽기 살기로 이쁘게 살아야 합니더.” 
이 정도의 포스와 카리스마를 가진 연예인이나 정치인이 대한민국에 나훈아 이외 누가 또 있을까? 그는 연예인이라기보다는 국민의 마음을 속 시원하게 뚫어주는 이 시대 위인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날 공연 관람으로 10년 묵은 체증이 쭈욱~ 내려가는 느낌을 만끽했다. 18년 방북을 했던 연예인 중 아들뻘인 김정은 앞에서 허리를 90도나 굽힌 나이 68세 나이의 조모씨 와는 격이 다르다. 함께 방북한 연예인 이모, 윤모 등 정은이 앞에서 팍팍 수그리던 모양새가 많은 사람 들의 울화를 부채질했던 적이 있는데, 그는 한마디로 멋쟁이였다. 역시 나훈아다. 

나는 나훈아의 노래보다 그의 사람 됨됨이를 더 좋아한다. 노래만 최고가 아니라 인성과 품격이 최고이다. 나훈아는 노래만 잘하는 게 아니라 작사, 작곡도 직접하는 실력파 가수이다. 또한 그는 철학과 자존심과 배짱도 있는 어느누구라도 범접하기 어려운 아우라가 멋있는, 한 세기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인물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이러한 소양과 능력이 저절로 나오는 것은 아니다. 노래 곡에는 꼭 시(詩. 작사)가 있어야 하고 좋은 詩는 그 속에 멜로디가 들어 있다고 한다. 작곡가가 곡을 만드는 게 아니라 그 詩 속에 있는 멜로디를 끄집어내는 작업을 한다는 것이다. 그가 인문학적 소양이 풍부하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그의 독서량은 엄청나게 많아서 책벌레라는 별칭도 있다고 한다. 힘든 공연이 끝나고 귀가길, 차 속이나 집에서도 여러 장르의 책을 읽는다고 한다. 

40세 즈음에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을 읽고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스스로 참 똑똑한 줄 알았다는데 노자에게 그냥 뒤통수를 맞은 듯한 책이 도덕경이었다고 하면서 그때부터 ‘다른 사람들 뒤에 서자는 생각으로 앞에 서지 않고 한 발짝만 뒤로 서자’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독서를 통한 지식이 스스로 자신을 거르는 체가 되었고 세상을 사는 지혜가 담겨 있는 책에서 자기관리의 방법을 터득했다.”는 것이다.

그는 땀을 흘리지 않고 노래하는 가수는 다 가짜 노래를 하는 것이라는 철학을 갖고 있다. 단순히 목소리로만 부르는 게 아니라 온몸을 다 써서 노래를 토해내다 보면 저절로 땀에 젖는다는 것이다. 

나훈아의 공연관(公演觀)은 그의 성격처럼 화끈하게 느껴진다. 다음 공연을 위해 아껴두지 않는다. 몽땅 쏟아붓는다. 비싼 요금을 내고 공연을 보러 오는 관객들에게 최고의 무대를 보여 줘야 한다는 그의 철학에 크게 공감한다.    

 <1973. 7월 공군 교육사, 신병대대 중대본부 앞에서. 사진 필자 제공>
 <1973. 7월 공군 교육사, 신병대대 중대본부 앞에서. 사진 필자 제공>

1973년 7월 공군 현역으로 복무하던 필자가 공군 교육사령부 항공병학교 신병대대 내무반장으로 근무할 때이다. 

제대를 3개월 앞둔 당시에 사령부 정문에서 훈련받으러 입대하는 최홍기(본명) 훈련병과 최초로 조우(遭遇)하였고, 입대가 확정되고 훈련을 이끌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6주 동안 내무반 숙소에서 함께 숙식하고 훈련을 하면서 고락을 같이하게 되었다. 

당시 부대 상황이 연예인 출신 훈련병의 노래를 공개적으로 시킬 상황이 아니었다. 어떻게 그의 노래를 라이브로 한번 들을 수 있을까? 고민도 많이 했다. 그와 필자는 최씨 라는 공통분모(?)가 있어 다른 훈련병보다 친근하게 지내는 터이기는 했다. 

곧 제대하게 되는데 천하의 ‘라훈아’의 노래를 못 듣고 제대한다면 평생 한이 될 것 같은 조바심이 생겨났다. 어느 날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노래를 몇 곡 들을 수 있을까?’ 그런데 그는 흔쾌히 대답했다. ‘가수가 노래하는 것이, 뭐 어렵습니까?’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내 소원을 풀 수 있는 순간이었다. 

73년 7월 말 어느 토요일 밤에 빈 병동(兵棟)에 비공식 무대를 만들고. 기타를 준비하여 약 70여 분 동안 희망곡 “고향의 그 사람” 외 20여 곡을 라이브로 듣는 행운을 누렸다. 그 감동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다. 

1977년 5월 필자가 공군 전역 친구와 대전의 공군 교육사령부로 동원훈련에 참가하던 길에 마침, 제대를하고 대전에서 ‘초원(草原)’이라는 경양식 식당을 경영하던 그를 만나 잠시라도 군대 생활 이야기와 그의 근황 이야기를 함께 나누었던 기억은 두고두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최승훈
•한국생애설계포럼 대표
•한국생애설계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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