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길 CEO칼럼]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전대길 CEO칼럼]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 김민수 기자
  • 승인 2023.01.18 0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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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대   길
(주)동양EMS 대표이사, 수필가
국제PEN 한국본부 이사 

예전에 이발소 거울 위에 걸렸던 아래 그림은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명화(名畫)다. 

“나폴레옹이 정말로 알프스를 넘었을까?”란 호기심이 발동해서 알아보았다. 지금부터 222년 전에 나폴레옹이 설선(雪山) 알프스를 넘은 건 역사적 사실이다. 

프랑스 신고전주의 화가인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의 처세술은 뛰어났다. 그는 30대 초반에 ‘루이 16세’의 궁정화가로 일하며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혁명정부의 편으로 돌아섰다. 그는 프랑스 혁명 과정을 그린 ‘테니스 코트의 선서(1790년)’와 ‘마라의 죽음(1793년)’ 등 혁명을 미화(美化)하는 그림을 그렸다. 

1799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1821)‘가 정권을 잡자 ‘자크 루이 다비드’는 다시 나폴레옹의 전속 화가로 변신했다. 1801년 그의 대표작인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을 그렸다. 

1800년 나폴레옹은 알프스를 넘어서 이탈리아 북부를 침공했는데 나폴레옹이 알프스산맥을 넘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그린 것이다. 그가 권력자를 미화(美化)하는 능력은 참으로 탁월했다.
                       
나폴레옹은 신장(身長)이 작고 뚱뚱한 편이었다. 그가 프랑스 군대를 이끌고 선봉에 서서 알프스산맥을 넘은 것도 아니다. 병사들이 먼저 알프스를 넘은 후에 알프스 지리(地理)에 밝은 농부가 끄는 노새를 타고 안전하게 알프스를 넘었다. 

하지만 그림 속의 조각 같은 이목구비의 나폴레옹은 위엄이 넘친다. 앞발을 든 백마(白馬)에 앉아서 호령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멋지다.   

그림 왼쪽 아래 바위에 선명하게 새겨진 ‘보나파르트’라는 이름도 눈에 띈다. 그 밑에는 알프스를 넘었던 카르타고 장군 한니발과 신성 로마 제국의 샤를마뉴 대제 등 전설적인 영웅들의 이름이 흐릿하게 적혀 있다. 나폴레옹이 이들을 뛰어넘는 역사상 최고의 영웅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위 그림을 본 나폴레옹은 매우 흡족해했다고 한다.  

어용화가(御用畫家)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
어용화가(御用畫家)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

‘자크 루이 다비드’는 ‘어용화가(御用畫家)’로 활동하며 프랑스 예술계의 대부(代父)로 군림했다. 나폴레옹이 실각(失脚)한 후에는 벨기에 브뤼셀(Brussels)로 망명했다. 

그곳에서도 자크 루이 다비드는 부자(富者)들의 초상화(肖像畵)를 그려 주면서 풍요로운 삶을 살았다. 자크 루이 다비드는 작가 정신이 희박했지만 그림을 잘 그려서 그의 작품은 프랑스 근대를 대표하는 명화(名畫)로 평가받는다. 

나폴레옹이 실제로 알프스를 넘는 또 다른 그림이 있다. 1850년 ‘폴 들라로슈’는 나폴레옹이 노새를 타고 알프스를 넘는 그림을 그렸다. 더욱 현실적인 그림을 의뢰받았기 때문이다. 다비드가 그린 화려한 군복이 아닌 추위를 막기 위한 평범한 회색 코트를 입었으며 차갑고 힘겨워하는 분위기가 돋보인다.   

‘폴 들라로슈’가 그린 노새를 타고 알프스 설산(雪山)을 넘는 나폴레옹
‘폴 들라로슈’가 그린 노새를 타고 알프스 설산(雪山)을 넘는 나폴레옹

‘아서 조지 온슬로’ 백작과 ‘이플리트 들라로슈(Hippolyte Delaroche/1797~1856)’가 1844년 파리 루브르 박물관을 둘러보고 다비드가 그린 그림의 타당성과 연극성에 대해 논평했다. 그리고 들라로슈에게 더 정확한 버전인 나폴레옹이 노새를 타고 알프스를 넘는 그림을 그리도록 의뢰했다. 

들라로슈는 현실적인 그림을 그려 황제로서 위엄 있고 영웅적인 모습이 아닌 고난을 겪으면서 힘겹게 알프스를 넘어가는 모습을 그렸다. 하지만 그는 나폴레옹을 비하(卑下)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그는 나폴레옹을 존경하고 고난을 겪은 친숙하고 신뢰할 만한 인물로 묘사하려고 힘썼다.

위 그림에서 보듯이 ‘나폴레옹이 가슴팍에 손을 넣는 포즈(Pose)’는 '숨겨진 손'으로 불리었다. 이런 포즈(Pose)는 그 당시 서양에서 유행하던 상류층의 근엄한 리더십을 나타내는 몸짓이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위장(胃臟) 건강이 나빴다는 게 알려지면서 '배가 아파 문지르는 포즈'로 잘못 알려졌다. 북한의 김 정은도 코트의 단추를 열고 가슴팍에 손을 꼽는 모습을 의도적으로 연출하는데 독재자들이 의도적으로 나폴레옹을 따라 하려는 의도적인 몸짓이지 싶다. 

이런 행위는 18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세계 시민주의적·인도주의적 우애(友愛)를 목적으로 하는 비밀 결사 조직인 ‘프리메이슨(Freemason/석공<石工>)’ 회원들의 포즈(Pose)란 주장이 있다. 미국 조지 워싱턴 대통령, 아마데우스 볼프강 모차르트, 그리고 철학자 몽테스키외 등이 프리메이슨 회원이었다는 설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나폴레옹의 상징인 유품을 관람하며 나폴레옹 체취(體臭)를 느낄 수가 있다. 

하림그룹 자회사 ‘NS홈쇼핑 판교 사옥’의 나폴레옹 갤러리에 전시된 나폴레옹 ‘이각(二角) 모자(帽子)’
하림그룹 자회사 ‘NS홈쇼핑 판교 사옥(분당 대왕판교로 645번길 36)’의 나폴레옹 갤러리(031-606-8525)에 전시된 나폴레옹 ‘이각(二角) 모자(帽子)’

2014년 11월16일 하림그룹 김 홍국 회장이 나폴레옹의 상징과도 같은 ‘이각(二角) 모자(帽子)’를 파리 퐁텐블로 오세나 경매에서 낙찰받았다. 

검은색 비버(Beaver) 모피(毛皮)로 만들어진 이 모자(높이 24cm, 길이 56cm)는 1800년 6월14일, 알프스를 넘은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 군대와 맞서 싸운 마링고 전투에서 착용했다. 그 후 부대 수의사(獸醫師)에게 선물했었다. 모나코 왕가에서 이를 사들여 소장하다가 경매에 내놓았었다. 

2023년 1월 현재, 성남 판교 NS홈쇼핑 나폴레옹 갤러리(30평 규모)에서 일반인에게 나폴레옹 유품을 전시하고 있다. 나폴레옹 모자를 비롯해 마렝고식 도검(刀劍)과 고무수채화 2점, 덴마크 왕이 나폴레옹에게 준 코끼리 훈장도 함께 전시하고 있다. 매일 10시~20시까지 관람할 수 있다. 자녀교육을 위해 방문하길 권한다.  

<김 홍국 하림그룹 회장>
<김 홍국 하림그룹 회장>

그는 중학생 시절에 <<나폴레옹 평전>>을 열독하고 나폴레옹의 진취적인 긍정(肯定)의 힘에 큰 감동을 하였다. “1%의 가능성만 있어도 100%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 비로 나폴레옹 황제다”라는 믿음으로 언제 어디서나 그의 머릿속에는 나폴레옹을 존경하고 Role-Model로 삼고 일했다. 

김 홍국 회장은 소년 시절에 맨 처음 병아리 몇 마리를 애지중지 키워서 시장에 내다 팔면서 사업에 재미를 느꼈다.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축산업 공부에 심취했다. 축산업에 투신해서 세계 최고의 닭고기 생산업체로 우뚝 선 김 홍국 하림그룹 회장의 말씀이다. 

“사람은 머릿속의 뇌(腦)로 생각한다. 머리에 쓰는 모자(帽子)야말로 그 사람의 상징이다. 따라서 나폴레옹이 쓰던 이각 모자는 나폴레옹의 상징이며 긍정과 도전 정신이 살아 숨쉰다”고 평소에 생각하며 살았다. 

나폴레옹 모자를 구입하게 된 동기(動機)다. 2014년 11월 어느 날 김 홍국 회장이 KBS-R에서 나폴레옹 모자가 프랑스 경매에 나왔다는 뉴스를 듣고 용기를 내어 입찰에 응했다.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는 나폴레옹 불굴의 정신과 “흙수저란 없다”는 김 홍국 회장의 도전정신을 대한민국 젊은이들에게 고취하기 위해 나폴레옹 모자를 낙찰받았다. 
  
끝으로 필자는 매주 금요일 새벽 6시에 열리는 KMA CEO 550회 조찬 세미나(2019.5.31)에서 나폴레옹의 도전정신을 계승,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기업가 김 홍국 하림그룹 회장의 <글로벌 식품기업을 향한 원대한 꿈과 도전>이란 주제의 특강(特講)을 듣고 큰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 

전   대   길
(주)동양EMS 대표이사, 수필가
국제PEN 한국본부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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