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익 컨설턴트의 소소한 일상이야기114] 내리사랑
[한상익 컨설턴트의 소소한 일상이야기114] 내리사랑
  • 김민수 기자
  • 승인 2023.03.07 07: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상익
•푸른소나무 life plan consulting 대표
•수필가 •재취업지원 컨설턴트 
•한국생애설계사(CLP)
•뉴질랜드 변호사

나는 아들만 넷을 두었다. 
지금은 애 많이 낳은 사람이 애국자라는 소리를 듣는 시대이지만, 내가 아이들을 키울 때는 “아들딸 구별 말고 둘 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표어가 유행하던 때였다. 

하나만 낳으면 제일 좋고 둘 이상은 낳지 말라고 둘째 애까지만 세금 공제와 보험 혜택을 주던 때에 넷씩이나 낳았으니 코미디언 김병조가 유행시킨 “지구를 떠나거라~”라는 소리를 농삼아 심심찮게 들었다.

그런 어려운 여건 속에 자란 큰아이가 1983년생이니 올해 만으로 40세가 되었고 둘째는 연년생이니 내년이면 불혹이 된다. 셋째는 3년 터울이고 막내는 4년 터울이니 첫째와 막내는 8살 차이가 난다. 

형제들 간에 나이 차이가 나는 탓도 있지만, 형들의 막내 사랑은 각별하다. 지금은 막내도 서른이 넘었고 키도 형들만 하고 아이를 둘이나 둔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었지만, 형들 눈에는 여전히 마음이 가는 막냇동생인 모양이다. 

얼마 전 뉴질랜드 네이피어 부근에서 허리케인이 발생했다는 소식에 그곳에 살고 있는 막내네가 걱정되어 가족 단톡방이 난리가 났다. 다행히 막내 집에는 큰 피해를 보지 않았지만, 막내를 걱정하며 마음 쓰는 형들의 사랑을 엿볼 수 있었다. 

나도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듯이 모든 아들들이 다 소중하고 사랑스럽지만, 형들과 뚝 떨어져 낳은 막내에게 아무래도 신경이 많이 쓰이고 마음이 더 가는 게 사실이다. 옛말대로 내리사랑이란 말이 맞는 것 같다.

막내에게 쏠리던 사랑이 이젠 손자들이 생기면서 사랑이 더 내려가게 되었다. 네 아들들이 공평하게 모두 자녀들을 둘씩 낳아서 나는 졸지에 손자녀를 여덟이나 둔 할아버지가 되었다. 

첫 손자를 본 후 ‘할아버지’란 호칭이 무척 어색하고 나에겐 아직 맞지 않는 옷처럼 여겨졌는데, 손자들이 너무 귀엽고 이뻐서 할아버지가 되는 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큰아들네는 아들 쌍둥이를 낳았다. 6분 간격으로 태어난 아이들이 인큐베이터 안에서 꼬무락거리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쌍둥이 손자들은 첫 손자이기도 하고 함께 살면서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기 때문에 정이 많이 들었다.

둘째네 큰딸은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잠시 뉴질랜드에 와서 함께 살았다. 아들만 득실득실한 집에 처음으로 태어난 손녀라서 삼촌들의 귀여움을 듬뿍 받았다. 나도 아들만 키우다가 여린 손녀를 대하다 보니 “불면 날아갈까 두렵고, 잡으면 꺼질까 두렵다”는 ‘취지공비 집지공함’(吹之恐飛 執之恐陷)이란 말의 의미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둘째는 미국에 돌아가서 낳는 바람에 아직 직접 보진 못하고 영상 통화를 통해 얼굴을 익혔다. 

셋째네도 딸과 아들을 두었다. 이 아이들은 다행히 우리가 뉴질랜드에 방문했을 때 만나서 얼굴을 익힐 수 있었다. 막내네는 아들만 둘을 두었는데 큰아들은 역시 우리 내외가 뉴질랜드에 방문했을 때 보았고, 둘째 아들은 산후조리를 해주러 가서 거의 두 달 동안 함께했기 때문에 갓난아기 때 기억이 남아 있다.

한국에 돌아와 살면서 아쉬운 점 중의 하나가 손자녀들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세상이 좋아져서 영상 통화를 하며 커가는 모습을 볼 수는 있지만, 직접 만나 안아보고, 어린 살냄새를 맡으며 정을 나눌 수가 없기에 한계가 있다. 또한 함께 공유하는 추억이 없다는 것도 아쉬운 점 중의 하나이다.

나는 늦둥이로 태어났기 때문에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추억이 없다. 내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이 세상에 안 계셨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히 어머니, 고모 그리고  할머니가 함께 찍은 빛바랜 희미한 흑백 사진이라도 남아 있어서 할머니의 얼굴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따금 전해 들은 할머니에 관한 얘기를 통해 어떤 분이셨는지 막연히 상상만 할 뿐이다. 하지만 할아버지 사진은 남아 있지 않아서 도무지 어떤 분인지를 알 수가 없다는 것이 항상 아쉬웠다.

내가 할아버지 할머니와의 추억이 없어 아쉬웠기 때문에 우리 손자들과는 많은 시간을 공유하며 어릴 때 추억을 많이 쌓아주고 싶었는데, 우리가 한국에 나오는 바람에 공백이 생기고 말았다. 그래서 손자들이 커가는 모습을 간간히 사진으로 접할 수는 있지만, 그들과 함께 나눈 추억이 없다는 게 마음에 걸린다. 

아내는 손자들보다 아들들이 더 보고 싶다고 한다. 어떤 글에서 손자들을 이뻐하는 이유는 ‘내 새끼’가 낳은 자식들이기 때문이고, 손자들을 기꺼이 맡아 키워주려고 하는 것은  조금이라도 ‘내 새끼’가 덜 힘들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기 때문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아버지는 기른 정만 있지만, 어머니는 기른 정에 낳은 정까지 있으니 ‘내 새끼’가 우선인 것은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아버지인 나는 이젠 다 어른이 된 우리 자식들보다 아직 만만한(?) 손자녀들이 더 좋다.

작고한 박완서 작가는 자신의 수필집에서 어린 외손자가 방문하여 선물로 준 민들레를 떠올리며 보답의 기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손자 사랑이 좋다고 했다. 

또한 손자에게 쏟은 사랑과 정성을 갚아야 할 은공으로 기억되기보다는 아름다운 정서로 남아 있기를 바라면서 “내가 불태운 것만큼의 정열, 내가 잠 못 이룬 밤만큼의 잠 못 이루는 밤으로 갚아지길 바란 이성과의 사랑, 너무도 두렵고 무거운 책임감에 짓눌려 본능적인 사랑 또한 억제해야 했던 자식 사랑... , 이런 고달픈 사랑의 행로 끝에 도달한, 책임도 없고 그 대신 보답의 기대도 없는 허심한 사람의 경지는 이 아니 노후의 축복인가”라고 손자 사랑이 더 좋은 이유를 털어놓았다.

나도 손자들에게 쏟는 사랑은 보답을 기대하지 않기에 더 자연스럽고 자유롭다. 그리고 그들에겐 책임질 부모가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나저나 사랑의 깊이는 함께한 시간에 비례하는데 언제나 지나간 시간을 메꿀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한상익
•푸른소나무 life plan consulting 대표
•수필가 •재취업지원 컨설턴트 
•한국생애설계사(CLP)
•뉴질랜드 변호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