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익 컨설턴트의 소소한 일상이야기73] 어머님과의 마지막 이별
[한상익 컨설턴트의 소소한 일상이야기73] 어머님과의 마지막 이별
  • 김민수 기자
  • 승인 2022.05.24 06: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상익
•푸른소나무 life plan consulting 대표
•수필가 •재취업지원 컨설턴트 
•한국생애설계사(CLP)

지난주 어머님을 모신 용인 공원묘지에 다녀왔다. 
어머님을 뵙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장(移葬)하기 위해서다. 누나 부부와 우리 부부가 참석한 가운데 18년 가까이 된 어머님의 묘를 개장하여 장사지낸 후 유택 동산에 모셨다. 

공원묘지 관계자와 약속한 시각에 가보니 이미 인부들이 파묘(破墓)하여 유골을 수습할 개장 준비를 마치고 유족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님 묘를 쓴 지 거의 18년이 되니 육탈(肉脫)하여 시신은 뼈만 남은 상태라 별도의 관을 쓰지 않고 사무실에서 준비한 종이 상자에 담아 이장해도 된다고 했다. 

누나의 제안으로 간단하게 이장을 위한 예배를 드린 후 인부들이 정성스럽게 뼈를 수습하여 양팔을 벌려 잡을 만한 크기의 종이 상자에 담아주었다.

18년 전 어머님을 이곳에 모실 때 하관하고 취토(取土)하면서 북받치던 울음을 억지로 참았었는데 육탈하여 뼈만 남은 어머님의 모습엔 눈물이 나기보다는 인생이 참 헛되고 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이 상자에 담긴 어머님의 유골은 가벼웠다. 생전에 어머님을 업어드린 게 언제였는지 아니 한 번이라도 업어드린 적이 있었는지 잠시 생각이 스쳐 갔다. 어머님의 유골을 차에 싣고 40분 거리에 떨어져 있는 화장터로 갔다. 

옛날에 내가 기억하고 있던 화장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깔끔한 건물이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이름도 화장터라는 용어는 쓰지 않고 ‘평온의 숲’이란 감성적인 명칭을 사용하고 있어 훨씬 더 거부감을 줄여주고 있다. 

숲으로 둘러싸인 주변 경관도 아름다웠고 속이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건물 유리창이 햇빛에 반사하여 반짝반짝 빛을 내며 유족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시설도 잘 정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고인을 모시는 직원들의 정중하고 예의를 갖추는 모습에서 어머님의 마지막 남은 유골을 정리하는 마음의 짐이 조금 덜어지는 것 같았다. 

사무처에서 필요한 양식을 작성하고 대기실에서 한 시간 남짓 기다린 끝에 분골을 받아 유택 동산에 모셨다.

이장하는 사진을 찍어 뉴질랜드와 미국에 있는 자녀들에게 보냈더니 왜 갑자기 이장하는지 궁금해했다. 큰아이들은 할머니와 함께한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할머니에 대한 정이 더 각별하기에 한국에 돌아와도 할머니를 추억할 장소가 없어졌다는 게 아쉬움이 큰 것 같다. 

어머님과의 마지막 이별을 하면서 문뜩 뉴질랜드에서의 생활이 떠올랐다. 우리가 뉴질랜드로 이민 갈 때 어머님을 모시고 갔었다. 이웃 친척도 없는 이국땅에서 적응해서 사시는 게 어려울 거로 생각했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지막까지 아들인 내가 모셔야 하고 비록 외국이라도 자식과 손자들이 있는 집에서 노년을 보내시는 게 나으리라 생각했다. 

인제 와서 뒤돌아보면 우리도 외국 생활이 힘들고 답답할 때가 많았는데 전혀 말이 안 통하는 곳에서 문밖을 나가 다닐 수도 없고 한국어 텔레비전 방송도 볼 수 없는 곳에서 어머님이 얼마나 힘드셨을지 죄송스럽고 후회스러운 마음이 크다. 

하지만 같이 살 때는 나도 그리고 우리 아이들도 낯선 곳에 적응하여 어떻게든 살아가려고 아등바등하느라 어머님의 심정까지 헤아릴 겨를이 없었다.

뉴질랜드에서 몇 번의 집을 옮겨 가며 여러 해를 보낸 어느 날 어머님이 고향 충주에 가고 싶다고 하셨다. 

어머님은 이민법 상 가족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이민해 올 때 방문자 신분으로 오셔서 함께 살면서 이미 체류 기간을 넘긴 상태라 한국에 돌아가면 다시는 재입국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사정 얘기를 하면서 이해시키려고 했지만, 한번 마음먹은 노인네의 결심은 막무가내였다. 

고향에 대한 향수가 더 깊어가시면서 본인의 의지를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하셨다. 무작정 집을 나서 걸어서 충주에 가시겠다고 집을 나서는 바람에 온 식구가 비상이 걸려 어머님을 찾으러 다닌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다행히도 어머님을 알아본 친절한 이웃들이 차에 태워 집에 모시고 와줘서 어려운 상황을 넘기곤 했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야 하고 우리 부부는 일하러 나가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문을 잠그고 가면 마당과 연결되는 쪽문을 통해 탈출(?)하셔서 그 쪽문까지 널빤지로 높게 막아 놓기도 했었다. 

우리는 그때 어머님의 그런 행동이 치매의 초기 단계였다는 걸 전혀 생각지 못했고 단지 고향에 가고 싶은 절실함 때문이라고만 여겼기 때문에 어머님과의 실랑이와 술래잡기는 계속되었다.

결국 어머님의 집착에 우리가 두손 두발 다 들고 누나에게 연락하여 한국으로 모시게 되었고 마침내 한국에서 마지막을 보내셨다. 

어머님의 임종 소식을 듣고 우리 가족은 부랴부랴 비행기 편을 구해 간신히 어머님이 가시는 길에 함께할 수 있었다. 장례식장과 묘지는 한국에 사는 누나가 마련해 놓았고 지금까지 가족 대표로 묘지를 관리했었다.

묘지 관리 계약이 올해 5월 말로 끝나게 되면서 누나가 어머님 묘를 파묘해서 유골을 화장하여 보내드리자고 제안했다. 처음에는 어머님의 묘소가 없어지면 찾아뵐 수 없다는 것이 아쉽게 생각되고 마음에 걸려서 바로 답을 해줄 수 없었다. 

하지만 나이가 80이 넘은 누나가 지난번 어머님을 뵈러 갔다가 힘에 부쳐 며칠을 앓았다고 하면서 나도 이젠 내일모레면 70이 되고 자녀들은 모두 외국(우리 네 아들 가족은 뉴질랜드와 미국에 살고, 누나의 두 아들 가족은 터키와 독일에 살고 있음)에 살고 있으니 나중에 누가 관리할 수 있겠느냐는 말을 들으면서 어머님 묘 옆에 묻혀있던 이웃 묘가 떠올랐다. 

봉분 위로 무성하게 자란 잡초와 언제 갖다 놓았는지 알 수 없는 빛바랜 조화 속에 외롭게 잊혀가는 안타까운 고인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누님의 제안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어머님의 유골을 화장하여 유택 동산에 모심으로써 물리적으로 어머님을 만날 곳이 없어졌다. 

그렇더라도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을 애써 부정해 보려 한다. 부모가 먼저 떠난 자녀를 가슴에 묻듯이 자식도 떠난 부모를 가슴에 묻게 되고 기억이 살아 있는 한 몸은 떠나 있어도 떠나보낸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한상익(myhappylifeplan@gmail.com)
•푸른소나무 life plan consulting 대표
•수필가
•재취업지원 컨설턴트
•한국생애설계사(CLP)/생애설계 전문강사 
•뉴질랜드 변호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