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익 컨설턴트의 소소한 일상이야기81] 바보상자 예찬(禮讚)
[한상익 컨설턴트의 소소한 일상이야기81] 바보상자 예찬(禮讚)
  • 김민수 기자
  • 승인 2022.07.19 08: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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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익
•푸른소나무 life plan consulting 대표
•수필가 •재취업지원 컨설턴트 
•한국생애설계사(CLP)

장인어른의 일과는 텔레비전 앞에서 시작해서 텔레비전 앞에서 끝난다.
올해 96세가 되신 장인어른은 아침 6시 반쯤에 거실로 나오신다. 세면도 하시고 옷도 갈아입고 나오시니까 기상은 더 이른 시각에 하시는 게 분명하다.

거실에 있는 장인어른 전용 의자에 앉으신 다음 제일 먼저 하시는 일이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켜시는 일이다. 그런 다음 커다란 돋보기를 이용하여 조간신문을 읽으신다. 텔레비전 소리에 신문 읽는 게 불편하실 만도 한데 전혀 개의치 않으신다. 이런 습관적인 일과의 시작은 하루도 거르는 일이 없이 반복되고 있다. 

나는 장인어른의 일과에 맞추기 위해 좀 더 일찍 일어나서 화장실에서 조간신문을 대충 흝어보고, 장인어른이 거실에 나오시기 전에 신문을 전용 의자에 갖다 놓는다.

여기서 전용 의자란 몇 년 전에 구입한 L 사의 1인용 리클라이너 소파를 말한다. 그동안 오래 사용하시던 가죽 의자의 쿠션이 내려앉아서 허리가 편하다는 광고를 믿고 내가 서울에 있는 매장까지 가서 직접 구입한 것이다.

우리 집에서 제일 좋은 의자이니 자연스럽게 장인어른 차지가 되었고 장인어른이 저녁 9시 무렵에 주무시러 들어가시면 내 차지가 된다. 장인어른이 온종일 앉아 계시면서 장인어른의 체형에 맞게 정형화되어서 다른 식구들은 모두 불편해하는데 장인어른에겐 그 어느 공간보다 편하다고 하신다. 그래서 그런지 아침부터 저녁에 주무시러 가실 때까지 온종일 전용 의자에서 떠날 줄을 모르신다.  

전용 의자에서의 주된 일과는 텔레비전을 보시는 일이다. 전에는 책도 자주 읽으셨는데 눈이 침침해지셔서(백내장이 있다고 안과에서는 수술해야 한다고 하는데 너무 연세가 많으셔서 하지 못하고 있다) 오래 책을 보시기가 어렵게 되면서 낮잠 주무시는 시간을 빼고는 대부분 텔레비전에 의존하고 계신다. 당연히 아버님의 전용 의자의 방향은 항상 텔레비전으로 향해 있다.

장인어른이 집안 서열상 1위이시라서 텔레비전의 채널 선택권은 늘 아버님이 쥐고 계신다. 올해로 만 90세가 되시는 장모님은 장인어른의 전용 의자 옆에 있는 긴 소파에 앉거나 모로 누워서 장인어른이 선택한 프로그램을 대부분 따라 보시다가 아버님이 낮잠을 주무시거나 보고 있는 프로그램에 관심이 없어 보이면 그제야 리모컨을 챙겨서 여기저기 채널을 돌려 보신다. 

아침에는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을 시청하시고, 12시 정오 뉴스를 본 다음에는 대부분의 경우 장인어른의 선택은 스포츠 프로그램이다. 주로 유럽 프로 리그 축구 경기, 특히 손흥민이 나오는 재방송 경기를 주로 보시지만, 프로 농구, 배구, 야구, 심지어는 한 번도 해보지 않으신 골프 경기까지 골고루 시청하신다. 

다양한 스포츠 경기를 선택하시는 장인어른의 취향과는 달리 장모님은 세계 여행안내 프로그램을 좋아하신다. 그래도 두 분이 마음이 맞아 즐겨 시청하시는 종목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의외로 UFC 경기나 프로 레슬링 경기이다. 아마 격렬한 격투기를 보면서 두 분 모두 대리 만족하시는지도 모른다.

두 분이 의견 차이없이 함께 시청하시는 또 다른 프로그램은 저녁 일일 연속극과 주말 연속극이다. 9시 이후에는 잠자리에 드시기 때문에 그 전에 하는 연속극을 즐겨 보신다. 장인어른은 9시에 끝나는 일일 연속극을 마지막으로 텔레비전 시청을 마침과 동시에 비로소 전용 의자에서 내려오신다. 그러면 내가 주로 그다음 선택권을 갖는다. 

나는 이민 전에는 뉴스 프로그램을 빼놓지 않고 챙겨 봤는데, 다시 한국에 돌아와서는 그다지 즐겨 보지 않는다. 아직도 변해버린 한국 사회에 익숙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불편한 뉴스거리가 많기 때문이다. 

대신에 한국에 와서 흥미를 갖고 보게 된 프로그램은 노래 경연 프로그램이다. 재해석한 익숙한 노래나 모르는 노래를 듣는 재미도 있지만, 무명 참가자들의 간절함이 마음에 와닿아 응원하며 빠져들게 되었다. 그래서 방송국마다 경쟁적으로 하는 경연 프로그램을 시간이 맞으면 보려고 한다. 

그 외 예능 프로그램은 거의 보지 않지만, 가능하면 드라마를 한 편 보려고 한다. 전에 읽었던 책에서 노년을 행복하게 보내는 방법의 하나가 재미있는 텔레비전 드라마 보기라고 했던 것이 과거 경험에 비추어 보면 공감이 가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이 뉴질랜드로 이민 갔을 초창기에는 한국 방송 프로그램을 비디오로 녹화해서 빌려 볼 때였다. 그래서 빨라야 일주일이 지난 후에야 다음 편을 볼 수 있었다. 

그 일주일의 기다림과 기대 그리고 모국어로 보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낯선 뉴질랜드 생활에 재미와 활력을 가져다주었으며 외로움을 견딜 힘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일주일을 기다려 취향에 맞는 드라마를 보는 건 내 삶의 소확행이다.

텔레비전을 흔히 바보상자라고도 한다. 하지만 우리 장인 장모님을 보면 노년에 텔레비전만 한 친구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90세를 넘긴 연세에 눈도 침침해져서  작은 글자체의 책도 읽기 어렵고, 거동 또한 불편하여 바깥출입이 어려우신 장인 장모님에게 텔레비전은 단순히 시간을 보내는 도구가 아니다. 

다양한 볼거리와 먹거리를 보여주어 대리 만족을 할 수 있게 해주며, 평생 가보지 못했던, 아니 앞으로도 결코 가볼 수 없는 곳들을 편안히 집에 앉아서 구경할 수 있게 해주며 바깥세상의 소식을 전해주는 소통 창구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을 선택할 수 있고, 곁에서 쉼 없이 이야깃거리를 제공하며 외로움을 달래준다. 

텔레비전은 우리 가족에겐 바보상자가 아니라 절대 마음이 변하지 않고 늘 곁을 지켜주는 친구이며, 잠시라도 장인 장모님을 즐겁게 만들고 웃게 만드는 기특한 녀석이다. 자식도 할 수 없는 효도를 텔레비전이 하고 있는 것이다.
 
한상익(myhappylifeplan@gmail.com)

•푸른소나무 life plan consulting 대표
•수필가
•재취업지원 컨설턴트
•한국생애설계사(CLP)/생애설계 전문강사 
•뉴질랜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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